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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회개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U턴'하는 것.
조회수 | 2,132
작성일 | 07.03.18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 저와 '죽이 잘 맞던' 직장 선배 한 분이 있었습니다. 팍팍하던 직장생활, 선배로 인해 그나마 잘 견딜 수 있었지요. 하루 온종일 일에 시달리다가도 선배 생각만 하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한마디로 '천사표'였지요. "오늘 저녁 한잔 같이 하자"고 제가 떼를 쓰면 단 한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배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인기 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선배와 한잔하고 싶어 했고, 점심 한 끼 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 선배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을 나누느라 월급의 절반 이상을 '접대비'로 지출했습니다.

그렇다고 선배가 많이 배웠거나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며, 재산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백'이 든든한 사람, 줄을 댈 만한 사람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선배 '인기'의 비결은 다름 아닌 '한결같음'이었습니다. 선배는 아무리 만나도 싫증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분위기를 편안하고 포근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선배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도 자신의 말은 최대한 아꼈습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방 말을 귀담아 들어주며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괴로워서 다가갈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 같아 찾아갈 때마다, 그저 소주 한잔 사주던 선배,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던 선배를 통해 저는 하느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하느님은 '자비 빼면 시체'인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심에도 유산을 챙겨 제 갈 길을 떠난 '싹수머리 없는' 자식조차 그저 말없이 다시 받아들이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저질렀던 숱한 과오나 방황은 당신 안중에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가련한 처지에 가슴아파하십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저 우리가 당신께로 발길을 돌리는 그 자체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죽을 것만 같아 찾아갈 때마다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며 우리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아 주십니다.

살다 보면 가끔씩 철저하게도 제 자신이 망가지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술에 빠져 바닥을 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참담한 실패의 순간,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순간,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하얗던 순간, 생의 최저점에 서는 순간, 정말 비참함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 자신 본연의 모습, 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런 순간, "하느님을 떠난 나는 결국 티끌이었구나! 결국 내 생애는 하느님 자비로 이어온 자비의 역사였구나!" 하는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야 깨닫는 바지만 아버지를 떠난 인생은 무의미한 인생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비록 수시로 우리가 죄악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방황과 타락의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다시금 새 출발 기회를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지칠 때마다, 세상으로 인해 상처받을 때마다, 우리 자신의 한계에 실망할 때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하느님 그분 품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U턴'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이 방향이 올바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빨리 U턴 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가던 길의 방향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연기처럼 덧없는 것들을 진리라고 여겼던 삶,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바쳤던 지난날 그릇된 삶을 접고 어떻게 해서라도 진정한 사랑,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사랑을 찾아 돌아서는 일이 회개입니다.

언제나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언제나 거듭 태어나고 싶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궤도를 본질적으로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일, 그것이 회개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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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가진 돈을 다 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내가 엄마 할게” 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계속 내 뒤를 쫓아다니시며 이것저것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저는 그만 귀찮아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도로 꺼내주며 이제 엄마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을 보며 그때를 기억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뽑으라면 아마도 이 비유가 선택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구나, 바로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애쓰고 계시는구나’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작은아들:아, 정말 지겹다. 나도 머리가 굵을 만큼 굵었는데 평생 이렇게 아버지 밑에서 고리타분하게 농사나 짓고 살아야 하나. 더 넓은 세상에 나가 많은 걸 경험하며 내 힘으로 살고 싶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돈, 돈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아버지께는 좀 죄송하지만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자. 그런데 형님이 뭐라고 하실까? 하기야 어차피 내 몫을 내 맘대로 쓰는 건데, 뭐. 잘 되면 될 것 아닌가? 와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순순히 내 몫을 정리해 주시지? 아무튼 이 그늘을 벗어나려면 가능한 한 멀리 떠나자. 마음이 변하시기 전에 빨리.

사람들이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부정한 짐승이라 먹지도 않는 돼지, 더구나 돼지 먹이인 이 열매를 먹는 꼴을. 그러나 이것이라도 배불리만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 종들도 마음껏 먹는 아버지 집의 따뜻한 식탁이 너무도 그립다.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어찌 이 꼴이 되었지? 생각하니 그 많던 재산이 제대로 쓰인 데가 없군. 많던 친구들도 돈과 함께 날아가 버렸으니.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야. 선하신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어.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어.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이렇게 죽을 지경이 되어야 제정신이 드니, 아버지 집이라면 종이라도 좋은 것을…. 아버지는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시는’(시편 103,10) 주님처럼 용서해 주실 거야. 잘못에 절망하여 생을 포기하지 말고 아버지께 가서 용서를 청해보자. 용기를 내보자. 그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

큰아들:아버지, 너무 무력하십니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라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십니까? 저 녀석의 기질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늘 빠져 나갈 궁리만 하고 집에서 어디 제대로 마음먹고 일한 적이 있습니까? 저 재산으로 무엇을 하리라는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왜 한번도 설득해 보거나 따끔하게 꾸중해 보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넘겨주십니까? 힘에 부친다면 저도 있고 종들도 있지 않습니까! 참 답답하십니다. 남 보기에 창피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떤 소문이 들려올지 뻔한데, 이제 더 이상 저 녀석과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아버지께서 이러실 수가? 내가 뭐라고 했던가. 돈을 어디다 썼는지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집에 들어오게 하시다니. 더구나 옷과 가락지에다 잔치까지. 이젠 내 유산마저 넘볼지 모르는 저 녀석의 소행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 말이라면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으시더니 도대체 나는 뭔가? 나는 뭔가? 아버지는 나와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어. 오후 늦게 온 일꾼들에게 제일 먼저 임금을 지불하지 않나. 그것도 아침 일찍 온 사람들과 똑같은 일당을 지불하는 그런 아버지. 아,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섭섭할 뿐입니다. 아버지, 제 몫도 주십시오.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버지:아들아, 사랑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니! 하느님께서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으로 선택하고 살 수 있도록 존중해 주신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나는 내 아들을 안다. 붙들어 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지.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은 큰 아픔이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제발 몸만 성하게 살아준다면 하는 것이 내 기도였지. 그래서 나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구나. 한번도 돈의 행방에 대해 추궁하지도 않고, 앞으로의 다짐도 받지 않는 내가 무능하고 무력한 줄을 나도 안다. 네가 그렇게 되었어도 나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게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니 마음을 풀고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을래? 아들아, 내 마음을 알아다오.

나:회개란 우리 마음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라 하는데,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모르는 아들, 정말 비극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잔치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깨달을까? 회개하기 어려운 조건이지.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가 큰아들이구나. 세리들과 죄인들에 해당하는 작은아들처럼 차라리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를 아는 것이 더 낫겠군. 아버지를 알게 해준 그 죄, 그래서 부활 찬송은 ‘오, 복된 죄여’라고 하지.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지어야 할까? 그건 분명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큰아들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두렵고, 아버지의 참모습을 알게 된 작은아들이 부러울 따름이야. 무엇보다도 내 생각을 뒤엎는 사실은 아버지의 무력함이 작은아들을 돌아오게 한 것이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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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우리 마음을 당신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독서

루카 15, 11 – 32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15, 1 – 2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행동이 하느님이 행하시는 일에 비추어 볼 때 올바른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계속 불평하는 바리사이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집을 떠난 작은아들 (12 – 24절), 그리고 후반부는 집에 남아 있는 큰아들(25 – 32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겪는 삶의 구체적 모습은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나” (13절)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20절)라는 묘사에서, 아들이 아직도 집에서 멀리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 집에 있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것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는 마음도 품지 않고, 늘 집 가까이 ‘들’ 에서 일합니다(25절). 집안에서 벌이는 잔치소리를 들을 때 집에 뛰어들어 가기보다 먼저 하인을 불러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묻습니다(26절). 우리는 그의 태도를 통해 늘 집에서 살지만, 집이 언제나 돌아가서 편안하게 쉬고, 사랑과 힘을 받는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들 사이의 서로 반대되는 삶의 결말은 본문에 짧게 담겨 있습니다. 집에서 멀리 있던 아들은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는 것을 말하려고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19 – 20절), 늘 아버지 가까이 있던 큰아들은 작은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이 불공평하다고 여겨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28절).

너무나 대조적인 두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봅시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도 집 밖으로 달려가 그를 껴안고 환영하면서 잔치를 벌입니다. 나아가 큰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자 그를 달래기 위해 또 집 밖으로 나가 달래면서 잔치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1절) 집을 떠나 다른 세상에서 제멋대로 산 작은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부드러운 사랑을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큰아들의 냉담함과 계속되는 거부도 아버지의 인내에 찬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가 됩니다.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에게 똑같이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15, 24.32). 이렇게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인데,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커다란 기쁨과 포옹, 그리고 불평하는 큰아들도 잔치에 초대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기다림과 인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 늘 순종하면서도 불만에 가득 찬 큰아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상징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예배하면서도 사랑에 가득 찬 하느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에 예수님한테서 자주 비판받습니다(루카 11, 37 – 52; 20, 46; 마태 23장). 예수님은 큰아들도 타일러 잔치에 참석하게 하려고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바리사이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집에 들어가 동생과 함께 잔치를 즐겼는지는 본문에 없어, 그가 아버지 사랑의 본질을 그대로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카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모두 구원될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죄인들이 우선 대상이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구원하는 힘과 사랑은 작은아들에서 출발하여 모든 이에게 도달합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영성적 의미입니다.

성찰

오늘 말씀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로 느끼려면 우리가 딸과 아들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형제와 자매가 된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초대교회가 깊이 성찰했음을 보여줍니다.

기도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 19)

▶ 성 바오로회 임숙희 수녀
  |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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