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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용서받은 자녀답게 살자
조회수 | 2,470
작성일 | 07.03.21
한탄하지 마십시오

‘D.H 컨시다인’ 신부님의 책 ‘하느님께 신뢰’라는 책을 보면, 이 같은 위로와 희망의 말이 나옵니다.

“엎질러진 물에 대하여 한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잘못과 죄 속에서 살지 마십시오. 그것을 더 이상 상관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기도록 하십시오.

통회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 자체보다도 오히려 죄로 인한 낙담으로 하느님을 멀리 하는 수가 더 많습니다.

낙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일어나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께 가까이 가십시오. 고개를 떨군 채 뒤로 물러서 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을 하십시오.”

이 말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복음의 주인공은 간음하다 붙잡혀 죽음을 가까스로 면하고 예수님께 용서를 받은 간음한 여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가 죄를 용서받은 다음에도 자신의 죄에 대한 한탄과 낙담, 실의와 후회 속에만 살았다면, 예수님의 그 엄청난 용서는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용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과 해방의 마음을 가슴 깊이 담아 그녀에게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 11).
이 말씀은 죄짓지 말고 일어나 용감히 세상 악과 싸우라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한 한탄과 자기 실망, 좌절 속에 살았던 복음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예수님을 배신하였던 ‘유다 이스카리웃’일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장담하며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간음한 여인까지도 용서하시는, 사랑과 용서의 스승을, 그 스승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사무치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배신의 옛 죄에 대한 낙담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 복음을 위하여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죄에 대한 낙담으로 사랑과 용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때문에 옛 죄에 빠져 낙담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 18~19)

힘을 청하십시오

예수님 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주머니 털어 먼지 안 날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모두 먼지 펄펄 나는 죄인들입니다. 누구나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1요한 1, 10).

우리는 거듭 짓는 죄를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죄 속에서만 머물러 있지 말고 떨쳐 일어나 주님의 사랑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 11) 하신 예수님 말씀이 끊임없이 귓전에 울리도록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 중에, 죄의 낙담 속에, 교만함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죄 중에 주님을 만나 회개의 삶을 사셨던 중세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늦게야, 너무도 늦게서야 만난, 용서와 아름다움의 주님을 향하여 이렇듯 용기 있는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임을 알아 뵙게 하신 임이옵기에
갈수록 더욱 알아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신 임이옵기에
임 앞에 제 약함이 있사오니
강함은 지켜 주소서. 약함은 거들어 주소서.
임 앞에 제 앎이 있사오니, 임 앞에 제 모름이 있사오니
임께서 열어 주신 곳에 제가 들어가거든 맞아 주소서.
임께서 닫아 거신 곳에 제가 두드리거든 열어 주소서.
임께서 저를 고쳐 놓으실 때까지,
고쳐서 완성하실 때까지.”

진정 많은 용서를 받은 자녀답게 정말 용기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불러일으키신 주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고쳐 주시리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말입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 3, 13).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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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규칙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석타형(石打刑)에도 그렇다. 죽어 마땅한 자로 인정된 사람을 동구 밖으로 끌고나가 모든 사람이 돌을 던져 죽인다.

이 게임의 묘미는 처형집행인에 대한 배려에 있다. 즉, '누군가는 죽었는데, 그를 죽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내가 그를 죽였다고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그는 죽어 마땅한 자이고, 율법의 이름으로 정의의 심판이 내려졌을 뿐, '살인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석타형은 십자가형과 일치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그 처형에 동참한 사람 중에 아무도 '내가 주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다. 내가 죽을 죄인입니다.'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속에 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죄인들의 속량을 위하여 희생 제사를 봉헌하신다. 우리 죄인들은 공범자의 자격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하였지만, '악당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분개할지언정 바로 내가 그 악당이라고 고백하지는 않는다.

그 악당들이 오늘 큰 미끼를 발견했다. 간음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을 본 악당들은 이 여인을 올가미 삼아 예수님을 엮을 음모를 꾸민다.

'모세의 율법대로 죽여라!'하면 '율법을 따르는 네가 다른 율법은 왜 안 지키느냐?' 하고, 만일 '살려줘라!'하면 '네가 율법을 무시하느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석타형에는 또 다른 규칙이 있다. 석타형에 쳐해질 자가 율법을 어긴 죄인임을 확식하는 목격 증인이 최초로 돌을 던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의 증언을 믿고 안심하며 돌을 던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두려움의 기색도 없이 태연하시더니(나는 이 대목이 매력적이다!) 이윽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신다.

게임은 끝났다. 그러나 숙제는 남는다. 우리 가운데 진정 누군가를 향해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있는가? 나는 죄 없는 자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단죄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요구하신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

▶ 최원석 신부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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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무엇을 쓰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6ㄴ).

오늘 복음 말씀의 한 구절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접할 때마다 위의 구절에 눈이 머무릅니다. ‘주님께서는 그 거친 땅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붙잡힌 여인에게 있어 그 순간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절박한 시간이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의기양양했을 그 시간이 주님께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시간이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해 봅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일순간 여인의 입장에서는 ‘아! 결국 이렇게 죽음을 맞는구나.’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처분을 원망할 수 있었겠습니다만 결국 예수님도 그 여인도 이 말씀으로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 여인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요한 8,11ㄴ).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서는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심각한 죄인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기꺼이 품어 안으시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이미 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자비로우심 앞에 아무것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릴 운명이었던 그 여인까지도 기꺼이 용서하시는 주님 앞에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돌이켜보면 어느 한 순간 은혜롭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 한 순간도 죄악이나 실수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생각되는 때도 없습니다. 우리네 삶이 대부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생들이여! 힘내라. 자비의 원천이신 우리 주님은 지금도 나를 위해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심에 감사드려라!”

지금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위하여 몸을 굽혀 거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십니다.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입니다.

▶여성재 부르노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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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어색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느림의 미학이라 할까요? 함께 지내면서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면과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리려는 변화의 다양성, 이 모든 것이 필요한 만큼의 시간과 잘 반죽이 된 것 같으면 그저 한 마디, “괜찮다!” 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지금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아마도 ‘쿨 하다’ 와 ‘뒤끝 작렬’ 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요즘 유행어로 예수님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1. 뒤끝 작렬(?) 예수님!
예수님과 만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의 마음자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루카 11,37~54), 올가미를 씌우려고(마태 22,34~40; 마르 12,28~34; 루카 10,25~28),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루카 6,7),죽이기 위해서(마르 14,1) 온갖 술수를 부립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기에 그분을 두려워합니다(마르 11,18). 아버지이신 성부의 뜻을 이행하시는 것뿐인데,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이 그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뒤끝 작렬의 말씀을 하십니다(마태 23,2~36; 마르 12,38~40; 루카 11,39~52. 20,45~47 참조).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 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오늘 복음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 하지만 뒤끝 작렬 예수님 에게서는 ‘찌질이’ 와 같은 느낌보다는 ‘통렬하고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속이 후련하다는 것이지요.

2. 쿨(Cool)한 예수님!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할까요? 복음서 전체가 주님의 쿨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자를 부르실 때,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드실 때,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실 때(마태 8,1~4; 루카 5,17~26; 마르 3,1~6),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하시는 장면에서(마르 14,36),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어졌다” 고 하실 때(요한 19,30)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쿨한지 모릅니다. 뒤 돌아보는 법이 없으시지요.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여인에게 쿨하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지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8,11).

3.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약속한 저희들입니다. 주님께서 원치않는 일에는 언제나 뒤끝 작렬(?)을 감수해야 될 것이며,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에 대해서는 늘 쿨(Cool)하게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것입니다.
쿨(Cool)한 예수님!
쿨(Cool)한 천주교 신자!

춘천교구 이상철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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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사순의 시간

“나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 3, 10)

이제 사순시기도 막바지의 시간을 나아가고 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결심했던 사순의 시기, 부활을 향한 발걸음을 돌아보면서 사도 바오로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 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지” (필리 3, 14)를 돌아보며 사 순의 마무리를 해 본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목적지가 부활임을,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음을 다시금 새겨 본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리 3, 10 - 11)의 말씀이 나의 삶 안에서 어떻 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핀다.

또한 부족한 삶의 모습을 알지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 11)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입 고, 또 그 사랑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결심해 본다.

사순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지나온 옛일에 대한 반성에서 그 치지 않고, 새로운 일(이사 43, 19)을 시작하는 출발이 되어야 함을 안다. 이는 바 로 나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그분께 위탁하는 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형제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넘겨 줌으로써 영 원한 생명을 불러오는 참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체험하였던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고 간직 하며,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 11)의 말씀으로 힘 을 얻고 그분을 닮는 모습의 삶을 통해 그분의 부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여 나 아가는 삶을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춘천교구 김길상 다니엘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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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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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죄를 지어 죽음의 위기에 놓인 불쌍한 여인을 살리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을 통하여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 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언제나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노리던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함정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믿고 음흉한 미소를 띠고 그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율법대로 처형하라 하면 평소에 그분이 가르치고 살아온 사랑과 용서의 삶에 어긋나게 됩니다. 거기에다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최고회의 산헤드린의 사형집행 권한을 금지했으므로 로마법을 어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살려주라 하시면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사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궁지에 몰려 대답을 못 한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분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살기등등하여 예수님을 몰아붙이던 그들은 완전히 기가 죽어서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사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침내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아무도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타이르시고 그 여인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지혜로서 죄인의 목숨을구하시고 이제 그를 진정한 회개로 이끄십니다. 이 여인은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생명을 건지고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죄와 저주와 폭력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인의 죽음을 바랐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감싸주고 그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크나큰 사랑과 관심, 지혜가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죄스런 삶에서 회개하도록 부르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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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강동금 베드로 신부 : 2019년 4월 7일
  |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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