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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을 살리는 법과 죽이는 법
조회수 | 2,420
작성일 | 07.03.21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같은 법을 바리사이들은 죽이기 위해서 적용했고, 예수님께서는 살리기 위해서 적용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음한 이 여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고,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여인을 용서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자 하십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죄인으로 단정 짓고 심판하는 데 아주 느리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하시는 데 아주 빠르셨지요. 사람들이 여인을 처벌해 달라고 재촉을 해도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인이 미처 청하기도 전에 용서하고 계시지요. 우리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십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리사이 성향에 더 가까운지, 예수님의 성향에 더 가까운지 우리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제자입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바리사이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 제자라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 남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고, 용서하는 데는 끝까지 무신경한 바리사이적 모습이 우리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묵상할 것은 단죄나 처벌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끝까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묻고 처벌을 했다면 그 여인은 아마도 돌에 맞아 한을 품고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여인의 삶은 끝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새로운 삶을 열어주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자비와 사랑의 모습보다는 성급하게 단죄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트집 잡아서 미래까지도 막고 마는 바리사이 성향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반성할 것을 촉구합니다.

헝가리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어느 시골을 여행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그 마을 극장에서 리스트의 제자라고 하는 여류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스트는 그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리스트의 숙소로 어떤 젊은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리스트를 보자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청했습니다.

"유명한 분의 이름을 빌지 않으면 연주회를 열어도 올 사람이 없기에 무례하게도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연주회는 중지하겠사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리스트는 그 여인에게 연주를 시키고 주의 깊게 들은 후 연주법에 대한 자세한 주의를 주고 잘못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지금 나는 당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소.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문하생이 되었고, 리스트의 제자로서 연주회를 열어도 좋으니 안심하시오. 그리고 연주회에 스승인 리스트가 특별 출연한다고 알리시오."

리스트는 제자를 사칭한 여자의 잘못을 덮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선물까지 베풀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감동한 이 여인은 리스트를 존경하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리스트가 화를 내어 여자를 단죄하고 망신을 주었다면 아마도 여자는 리스트를 평생 원망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죽을 죄를 지은 여인을 사랑으로 감싸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 주셨습니다. 단죄는 천천히, 용서는 청하기 전에 먼저 행하신 예수님 사랑이 사람을 살렸습니다. 단죄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큰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요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길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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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주제입니다. 잡혀온 여인과 돌을 들고 그 주변에 빙 둘러서 있는 살기등등한 사람들. 죄를 지은 것은 확실하게 드러났고, 그 판결도 모세가 옛날에 해놓았으니 이 여인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돌을 던질 것이면서 다만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예수님의 판결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형에 동의하시면 물론 바로 그 자리에서 돌무더기에 묻힐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의하시지 않으신다 해도 살아날 가망은 없습니다. 만일 동의하지 않으시면 모세의 율법을 반대한다는 죄목으로 예수님도 그 여인과 함께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우선 모세율법의 집행을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절묘한 대답에 나이든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싱겁게 물러갔습니다. 살면서 이런 저런 죄를 지어 모세의 율법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들 돌아가고 마침내 그 여인과 예수님이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끝나진 않았습니다. 아직 돌로 칠 자격이 충분히 있는 분이 하나 남았으니, 바로 죄 없는 예수님이셨습니다. 당신께서 돌로 치실 차례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 소송을 종결지으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확실히 죄인임을 확인하시지만, 새로운 출발을 허락하셨습니다(요한 8, 10-11).

사람들은 끝장내기를 좋아합니다. 기회만 허락되면 상대방의 끝장을 보고 싶어 합니다. 요즈음 정치상황을 보면 대선 후보 예정자들끼리 벌리는 경쟁에서, 만일 빈틈이라도 보이면 그것으로 끝장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업들의 기술경쟁에서도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 치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끝장내기보다는 늘 새 출발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19)고 했습니다.

죄지은 인간이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 아니 그러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거시는 예수님의 사랑. 우리는 이런 은총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은총을 이웃에게 설파하고 나누어 주기 위해 이 사순절이 있습니다. 사순절은 항상 새로운 출발의 때입니다. 우리네 마음 속에서도 이웃들이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하느님의 마음 속에서 우리도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백남용 신부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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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두려움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죄상을 알았다는 사실과 죽음이 곧 닥쳐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죄인은 죄 때문에 얻는 상처보다 그것이 남들에게 알려지면서 느끼는 수치심에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인도 그만큼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죄로 인한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예수님의 용서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아니 예수님께 따져물어서 만일 예수님께서 제대로 그녀의 죄상을 판단하지 못한다면 예수님마저 제거하려는 속셈을 내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심에 서 있던 여인의 죄보다 여인과 예수님을 압박했던 유다인들의 죄를 물으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말씀은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죄를 먼저 생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따지기 전에 남의 죄를 따지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라는 화두를 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의 죄를 단죄하기 이전에 자신의 죄를 먼저 살피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고 강하게 호소하셨습니다. 그 용서는 복음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말씀에서 명확해집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이때의 반전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결정적 동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의 용서는 신앙생활의 바탕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용서를 청하면 풀리는 신앙의 신비를 우리는 매번 생활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죄를 고해하고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특히 사순시기 때에 판공이라는 훌륭한 관습이 있습니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나를 탓하고, 남을 책망하기보다는 나의 들보를 찾아내어 용서를 청하는 시기,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이 마무리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여인의 죄도 용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태도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기 이전에 벌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당신께 찾아와서 죄를 고해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용기가 부족한 것뿐입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에 우리는 우리 죄의 뿌리를 반성하여 주님께 고해해야 하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매몰차게 간음한 여인을 몰아세웠던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바라신 바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이웃의 잘못에 너그러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각박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작은 실수나 잘못을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여유는,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성당에서도 이런 여유와 용서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작은 실수를 범하면 수군거리고 뒤에서 말하곤 합니다. 이런 행동은 잘못을 범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칫 교회를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엄청난 죄를 지은 여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실수와 죄를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달라고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 양해룡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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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자신의 죄를 살피고 고해성사를 통해 부활 대축일을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이야기는 과거의 죄를 캐묻고 처벌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롭고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는 아주 편리한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들에게는 유리하게(마르 7,9-13 참조) 타인에게는 가혹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어처구니없이 주절대기도 합니다. 죄인들이나 세리들과 거리낌 없이 교류하고, 안식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하시는 예수님이 이들에게는 눈에 든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라는 기막힌 올가미를 사용하여 예수님까지 제거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대로 여인을 돌로 쳐죽이는데 동의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명백한 현행범을 그냥 용서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돌팔매질에 대한 열정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매스컴과 인터넷을 통해서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파헤치고, 때로는 근거 없는 소문을 무차별적으로 퍼뜨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 무언가를 쓰시면서 숙고의 시간을 버십니다. 예수님은 땅에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 아니면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라고 쓰셨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기보다 이웃을 단죄하는 일에 더 적극적 입니다. 이웃의 잘못에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메마른 인간들에게는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생명의 샘이신 주님의 존재가 너무나 불편했을 것입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끈질기게 재촉합니다. 예수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시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돌직구’가 되어 진짜 돌을 들고 있던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정확하게 꽂힙니다. 그토록 확신에 찬 행동을 보이던 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간음한 여인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 앞에서 ‘돌’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부터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객관적인 율법의 요구와 그 적용만이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돌직구’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자백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는 죄짓지 마라.”(루카 8,11)는 말씀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여인을 진심으로 믿어주고 앞으로 잘 살라고 격려하십니다.

서울대교구 김영국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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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사순 5주일의 전례 말씀들은 부활을 목전에 둔 우리 신앙인들에게 과거의 잘못과 죄를 청산하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믿음의 생활을 견고히 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그분께로 모여든 온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 가운데에 세워놓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악의 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 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질문입니다. 만일 모세의 율법대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하면 그동안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의연한 모습을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지구상에서 인간인 한 누구도 단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누구를 단죄하는 한 기쁨도, 평화도, 행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며 그를 향해 돌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을 둘러보면 모두가 서로 더 큰 돌을 들려고 무한경쟁을 하는 형국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희 가 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돌을 내려놓는 것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코앞에 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죄로부터의 용서!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죄 때문에 모두 죽어야 할 사람들이 용서를 통해서 모두가 살아나는 것, 이것이 부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을 단죄 할 수 있는 유일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 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제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시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9) 사도 바오로의 확신대로 우리도 용서의 삶을 통해 부활을 향한 힘찬 행진을 시작합시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10-11)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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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도 간음한 자입니다.

1. 간음하면 어떻게 되는가?

간음 당사자는 즐거우니까 간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음을 하면 어떻게 될까? 그 배우자는 어떻게 되는가? 배우자는 철저하게 농락을 당하는 것입니다. 복수심 때문에 이제 뵈는 것이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과 행동이 비인간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 자녀들도 버림받은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받는 고통은 얼마나 큰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니 간음한 자는 돌로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도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 여인은 배우자와 자녀들을 큰 고통과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발각되어 끌려온 그 여인이 당장 당하는 수치심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주위 사람들이 그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합니다. 이웃 사람들이 그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내 버리려 합니다. 그 여인이 무질서한 즐거움을 찾는 바람에 여러 명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2. 나도 간음한 자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나도 그 간음한 여인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즐거움,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져 온갖 핑계를 둘러대며 살곤 합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무질서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손에 넣으려고 한 적이 많습니다. 하느님만은 모든 것을 잘 아십니다. 알고 보면 나의 파렴치한 생각과 사고와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많은 사람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외면당하고 버림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사실 그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끌려온 그 여인처럼 수치스러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없애 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것이고, 나는 수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 이기심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내 안락한 생활만을 추구하곤 합니다. 이렇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는 나의 이기적인 태도들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결국 나는 훨씬 더 고통스럽고 비참해졌습니다.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면 그들은 죽고 맙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아니 내가 사는 도시의 바로 이웃에서 나의 무관심 속에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죽어갑니다. 그런 결과로 나도 죽고 맙니다. 그래서 따져보면 나도 간음한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3. 간음한 그 여인 앞에, 오늘 내 앞에 계시는 하느님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스승님이신 예수의 첫 번째 반응은 침묵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흥분해서 말하고 행동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침묵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 희한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괘씸한 질문을 받고 당황하시는 가운데서 하느님 아버지를 어찌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원토록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도 유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그 여인에게 어떤 눈길을 보내고 계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어떤 표정으로 곤경에 빠진 여인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의견이 무엇인지 아드님 예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그 여인을 사랑하는 눈으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난처한 상황에 놓인 그 딸을 애처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강렬하게 와 닿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돌을 던지면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할까요?

4.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여인을 단죄하시기는커녕 더욱 사랑하고 계시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도’ 단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누가 누구를 단죄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그 여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결국 인간은 하느님 사랑을 받고 무한한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참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고, 해방시킵니다.

5. ‘가거라’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다가 해방하도록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실 때 명령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라”(탈출 14,15).

그 여인은 이후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고,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비롭게 된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주님, 저희들이 다시 죄를 짓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저희도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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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만남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발사가 자신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제자를 한 명 맞이했습니다. 3개월 동안 열심히 스승님께 기술을 익힌 제자는 드디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그는 그 동안 배운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첫 번째 손님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깎았습니다. 그러나 거울로 자신의 머리 모양을 확인한 손님은 투덜거리듯 “머리가 너무 길지 않나요?”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보 이발사가 손님의 말에 아무 답변도 못하고 있을 때, 스승님이 웃으며 말합니다. “머리가 너무 짧으면 경박해 보인답니다. 손님에게는 긴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걸요.” 이 말을 들은 손님은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갔습니다.

잠시 뒤에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너무 짧게 자른 것 아닌가요?” 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초보 이발사는 아무 말도 못하는데, 스승님께서 말합니다. “짧은 머리는 긴 머리보다 훨씬 경쾌하고 정직해 보인답니다.” 이번에도 손님은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 손님이 왔습니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본 손님은 머리 모양은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막상 돈을 낼 때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에 스승님께서는 “머리 모양은 사람의 인상을 좌우 한답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머리 다듬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요.”라고 말했고, 세 번째 손님 역시 매우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네 번째 손님이 왔고 그는 이발 후에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참 솜씨가 좋으시네요. 겨우 20분 만에 말끔해졌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초보 이발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스승님께서는 “시간은 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손님의 바쁜 시간을 단축했다니 저희 역시 무척 기쁘군요.”하면서 손님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어떻게 보면 한없이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긍정적인 말을 통해서 손님이나 자신의 제자를 기분 좋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을 보면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람들에게 힘을 뺏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지금 사순 제 5주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을 맞는 의미도 남다를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이나 잘못된 버릇, 낭비벽, 교만 등 자신의 악습을 버리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의 그늘 속에 갇혀 있다면 어둠의 자녀로 남습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미움과 증오는 과거를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는 미래를 보는데서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정한 여인의 과거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행동과 그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손에 돌을 들고 ‘욱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한 때 그녀 또한 순수한 마음이 있었고,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분들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예수님께로 돌아온다면,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그동안 내가 가졌던 명예, 자존심, 체면, 학력, 경험도 모두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의 과거를 보지 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온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우리들 모두를 초대하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으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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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만나면서 당신이 자비롭고 의로운 재판관이심을 계시하십니다. 이는 율법학자들이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라는 질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두 차례나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며’(요한 8,6-8 참조) 그 옛날 시나이 산에서 당신 손가락으로 율법을 쓰신(탈출 31,18 참조) 하느님의 모습을 재현하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돌로 쳐라!”라고 명령하신다면 이는 “나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다”(요한 3,17 참조)라는 평소의 가르침과 행동에 위배됩니다. 또한 “이 여인에게 죄가 없으니 풀어 주어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당신의 사명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죄인들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죄인을 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 율법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은 죄를 단죄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을 단죄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양심의 지성소(至聖所)로 돌아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여 의로워지라는 은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한국 법조계의 전설이신 ‘사도법관’ 김홍섭(바오로) 판사님이 떠오릅니다. 이분의 위대함은 1950년~60년대에 사형수들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실정법(實定法)과 하느님의 법이 담겨 있는 자연법(自然法) 사이에서 신앙인으로서 깊이 고뇌하며 판결하던 구도자적인 삶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낙태죄 위헌 여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고귀한 사명은 사회 구성원들의 인간적인 이익과 여론에 부합하는 실정법적인 차원의 지침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느님의 영원법인 자연법을 수호하고 구체화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여성과 임산부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중 어느 것이 자연법에 더 부합한 지는 우리 모두에게 불문가지(不問可知)의 보편적인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태아는 산모와는 별개로 존중받아야 할 고귀한 생명입니다.

아무쪼록 헌법재판관 여러분의 지혜로운 판결을 간청하며 오늘 복음의 예수님 판결이 우리 모두에게 빛을 비추어 주기를 비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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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 : 2019년 4월 7일
  |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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