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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조회수 | 2,353
작성일 | 07.03.22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와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규정돼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난처한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그간에 일관되게 죄인들을 두둔하고 용서를 강조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처신을 뒤엎는 일이 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한다면 분명하게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참으로 묘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계략에 조금도 말려들지 않고 난처한 상황을 기묘하게 피해 가시고 자신이 고발자들과 여인에게 해주고자 하는 것을 모두 다 이루어 내십니다.

예수께서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고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언가 쓰고 계실뿐 직답을 회피하셨습니다. 고발자들이 답을 재촉하자 비로소 몸을 일으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한 마디 하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언가 쓰셨습니다. 조용한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세등등했던 사람들이 왠일인지 하나 둘 자리를 뜹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간음한 여인을 도륙낼 듯 했던 사람들이 집었던 돌을 슬며시 놓아버립니다. 그리고는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자리를 뜹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죄 없는 사람부터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손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누굴 판단하거나 단죄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그렇게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고 살면서 실수나 과오도 있었을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처단하려 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순간 누굴 감히 단죄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누굴 판단하고 심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부터 뒤돌아보게 함으로써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을 선포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더불어 사는데 있어서 서로에 대한 너그러움은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훨씬 더 애틋하고 긴밀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은 세상을 단죄함으로써 구원하고자 했던 분이 아닙니다. 율법학자들은 10계명을 풀어서 세세한 행동규정들을 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실천케 했습니다. 일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은 도저히 그 규정들을 지켜낼 수가 없었습니다. 법규를 어겨 죄를 지었을 때는 속죄의 제사를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늘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거운 짐이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나에게 오라! 내가 그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 예수님은 단죄가 아니라 용서로써 사람을 구원합니다. 죄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 다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 구원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은총입니다. 단죄가 아니라 용서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뒤틀린 삶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용서 앞에서 좌절과 포기를 극복하고 희망과 의욕을 갖게 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그랬을 것입니다.

안동교구 조창래(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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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단죄하는 마음에 돌맹이 하나를 던져 용서라는 파문을 일으켜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과 간음하다 붙잡힌 한 여인과의 대화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봅시다.

어느 날 나는 간음의 범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과 예수님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모세의 입을 통해 공포된 신명기의 법에 따르면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칠흙 같은 밤의 상황입니다. 온갖 두려움과 공포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순간입니다. 오금이 저려오고 두려움에 치를 떠는 순간입니다. 나를 끌고 온 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큰 돌맹이 하나씩이 들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고 나를 향해 던지는 욕설과 손가락질마저도 이제 아득해지기 시작합니다. 누구 하나 나서서 나를 변호해주는 이가 없습니다. 나는 그저 두려움에 떨며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심판을 기다릴 뿐입니다.

드디어 공개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누군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고발하는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집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만 그 목소리 안에는 겨자씨만한 아량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를 죽여야 한다는, 그래서 모세의 법을 바로 세우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해야 한다는 고지식함 뿐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영락없이 죽었다. 이렇게 단 한 번의 실수로 돌에 맞아 죽는 신세가 되어버렸구나….” 내 앞에 서 계신 예수라는 심판관의 말 한마디만을 숨죽여 기다릴 뿐입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판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잠시 고개를 들어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 역시 그윽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곤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잠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그분이 써 내려 가시는 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서 빨리 판결을 내려주시길 기다리며 초조해 하고 있던 이들도 가까이 다가와 그분 손가락의 움직임을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살인, 간음, 비방, 욕설, 거짓말, 이기심, 판단, 미움, 폭력….” 그분 손가락은 우리 인간들이 매일 매순간 범하며 살아가는 온갖 종류의 죄목들을 다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의아해하던 군중들이 또다시 외칩니다. “쓸데없는 일 하지 마시고 얼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사람들의 재촉에 드디어 그분은 허리를 펴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나는 “이젠 정말 끝이구나…” 그러면서 머리를 팔로 감싸 안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판결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잠시 후 온 세상이 조용해졌습니다. 나를 향해 욕설과 손가락질을 하던 사람들은 돌맹이를 하나씩 하나씩 땅바닥에 떨구며 떠나가고, 내 주변에는 심판관 예수님과 어지러이 널부러진 돌들뿐이었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이제 살았다는 기쁨 속에 눈물을 흘리며 그분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또다시 나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집으로 돌아온 지금의 내 모습은요? 또다시 똑 같은 죄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또 나를 타이르고 새롭게 살게 하십니다. 죄인인 나이지만 그저 허망하게 돌에 맞아 죽기보다는 다시 또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창조의 순간에 당신 입김을 불어 넣어 우리가 숨 쉴 수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도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분이십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들이지만,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어 가꾸시는 분이십니다. 집 나간 아들 같은 우리들이지만, 다시 돌아온 우리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돌맹이를 집어 듭니다. 누군가를 쳐서 죽이려 합니다. 죄인인 내가 또 다른 죄인을 치려고 합니다. 사람을 살리시고 그래서 또다시 힘내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마저도 우리가 꺾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는 너무나도 확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더욱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그분께서는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의 소망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 권중희 베드로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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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공성사를 집전하다 보면 간혹 ‘이분이 건성으로 성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교우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성찰을 해도 딱히 죄도 없고 계명을 어긴 것도 없는데 부활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고해성사는 꼭 보아야하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고, 그래서 제대로 된 성찰을 하지 못하고 의무감에서 판공성사를 보게 되는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라는 것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찾고 반성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해성사의 출발은 의로움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쓰며 살았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 자신들은 죄인이 되며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그날 먹은 설거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걸을 걸음 수도 제한 해 놓았고, 저녁에는 촛불도 켜지 않았습니다. 불을 켜는 것도 일이기에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행위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말씀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을 잡아다가 예수님께 물으며 그분을 꼬임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얘기하신다면 그동안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어울렸던 예수님의 행위가 정당성을 잃게 될 것이고, 여인을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몰아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계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죄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 짓는 잣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판공성사를 준비하면서, 계명을 어긴 것이 없으니 성사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계명을 지키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죄인을 가려내려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인들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일날 미사를 빠지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중에 고해성사 보기 귀찮아서 그냥 참석(?)만 하고 미사 시간 내내 딴 생각을 하는 것을 ‘의롭다’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단순히 계명만 지키는 행위를 바라실까요? 그래서 지키는 이들은 의인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죄인으로 만들기를 원하실까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신 것은 계명을 지키지 못한 이들을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으로 길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율법에 따라서 처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 없는 자만이 그 여인을 처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죄인과 의인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보냄으로써 우리가 의롭게 되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는 구원의 성사임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동교구 정도영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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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의로움은 용서로부터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 43장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위대한 손길이 역사 안으로 들어왔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가 과거의 구원체험 사건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일상 혹은 삶의 시간속에서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실패와 좌절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일 때, 출애굽의 그 위대한 사건을 기억하며 마음을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또 다른 일을 하시려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이사 43,18)라고 하십니다. 과거는 미래를 통해서 반복되는 실수를 피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새 일’을 하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유배 전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탐욕에 빠져있었을 때 수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지금 유배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라는 하느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새 일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립 3,9) 사실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신 그 온전한 믿음은 창조된 인간과 창조하신 하느님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준수는 의로움의 표현이 될 수 있을지언정 의로움의 도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이야기가 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자비의 해를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를 주제로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 권고합니다. 자비의 표현의 양식은 용서입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의로움으로 그리고 용서로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에 충실한 사람과 간음하다 들킨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 여자는 당시 모세오경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그 죄가 무거운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통해 간음하다 들킨 여자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율법은 의로움의 도구가 아닙니다. 간음한 여자를 고발하는 이들을 예수님은 비난하거나 그들을 직접적으로 단죄하지 않습니다. 용서와 고발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라는 차원에서 고발은 당연합니다. 정의는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정직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때 율법주의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곧 용서는 예수님의 눈높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8장 6절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라고 전합니다. 땅에 무엇을 쓰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몸을 굽히신 예수님은 간음하다 들킨 여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평등한 눈빛으로 그 마음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새 일’을 하시는 하느님은 그 일이 바로 용서와 자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 안동교구 최장원 라우렌시오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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