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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조회수 | 2,197
작성일 | 07.03.22
음력으로 새해를 시작했던 지난 연중 제7주 일. 저는 이 자리를 통해 모든 교우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자비로이 용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피해는 모래에 써 놓고, 은혜는 대리석에 써 넣어라”는 프랑스 격언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동안 이 격언을 실천하며 지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순 시기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는 오늘, 이번에는 “비밀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 자유를 맡기는 것이다.”라는 스페인 격언을 통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간음한 여인이 있었고,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녀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그녀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강조했던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심상으로, 모세는 이러했는데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들의 눈엣가시인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칭하는 그들의 교활함은 극치에 달했고, 잠시 후 그들은 자신들이 판 함정에 오히려 걸려들고 맙니다.

여기서 그들이 실수한 것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간음한 여인의 죄를 덮어주기보다는 그녀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면서 예수님께 고자질한 것이고, 또 하나는 죄에 대한 판결보다는 예수님의 속을 떠 보려고 했던, 다시 말해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교만함이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그들만의 비밀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비밀을 세상에 폭로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스스로 관대하게 용서를 베푼다든지, 아니면 정의롭게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자유를 예수님께 맡겨버리고 스스로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족속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요람(搖籃)에서 알게 된 비밀은 무덤 속까지 간직하며 가져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면 그에게 상처를 주기 쉽고, 누군가 나를 믿고 고백했는데 다음 날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두 번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밝히고 싶지만 감춰두면서 상대가 올바른 길로 돌아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 상대의 부족함을 책하며 흉보기 전에 내 자신의 부족함을 미리 바라보며 인정할 수 있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덕행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먼저 그 여인의 잘못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시며 다시는 죄짓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감사드릴 뿐입니다.

수원교구 노성호(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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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자비를 통해 주시는 새로움

오늘의 전례 역시 지난 주일에 이어 하느님께서 용서와 자비를 통해 만들어 내시는 ‘새로움’에 관한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복음: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소식’을 계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소식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단죄하기를 바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연속성이 있다. 단지 차이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인공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시라는 것이다(골로 1,15).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그분께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3절)을 데리고 와서 심판해 주기를 요구했다. 모세법(레위 20,10; 신명 22,22)에 의하면 그 죄는 돌로 쳐 죽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예수의 심판은 단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요구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 했다”(6절). 만일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고발할 수 있을 것이고, 단죄하는 경우에는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온 예수님께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한 심판보다도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심판을 해야할 것임을 보여주신다. 두 번이나 땅에 ‘쓰시는’(6.8절) 행동은 간교한 속셈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법조문 자체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법의 근본정신을 읽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알아듣지 못했을까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7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린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때였다(9절). 물론 그들은 간음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떠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 이웃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지 않겠느냐?”(루가 6,42). 그러기에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을 해방시켜 ‘새로운’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10-11절).

예수님의 용서는 낭비적인 용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해 용서하시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생명을 위한 심판으로써 단죄와 죽음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르다. 특히 용서와 사랑의 심판인 빠스카를 맞이할 우리는 남을 단죄하거나 서로를 단죄하는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그럼으로써 이 지상에 예루살렘을 건설하도록 하여야 한다.

제2독서: 필립 3,8-14: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의 체험이다. 하여간 그는 비록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을 계속 달려간다. 또한 더욱 빨리 달려가기 위해 ‘대탈출’의 진정한 자세로써 겉꾸미는 과거의 모든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 안에 능력을 드러내실 그분의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0-11절).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새로운 것’은 빠스카의 신비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사순절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신비를 재발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영역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기에 자신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9절). 이러한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께서 용서를 베푸시어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한 그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자유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조욱현 신부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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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육체이자 육체의 영혼인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단일성을 이루면서도 그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체험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 19). 육신의 장애를 회복시켜주는 거룩한 사랑의 벳자타못을 알고 또 보고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갈 힘이 없습니다(요한 5,1). 더 나아가 세례의 옷을 입었음에도 우리는 죄를 짓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2840항).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만큼 깊은 이 간극의 심연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만이 넉넉히 메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자는 용서받았습니다. 용서를 원하기도 전에 말이죠.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한없이 자비로운 눈길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으며 세리였던 자캐오, 중풍병에 걸렸던 청년도, 오늘 간음하다 들킨 여인도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1429항).

교회 안에는 물과 눈물이 있으니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입니다(1429항). 사랑 없이 하는 회개의 눈물에비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발동한 회개의 눈물은 뜨거운 눈물입니다. 돌아온 탕자에서 아들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 때문에 슬픈 눈물을 흘렸다면, 아버지의 품안에서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기에는 구원에 유익한 슬픔과 고통이 따릅니다(1431항).

내적 참회는 삶 전체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일으키며(1431항) 따라서 마음의 회개, 내적 참회가 우선 목표이고 마음의 회개없는 참회행위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된 행위에 불과합니다(1430항). 우리의 회개는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담의 죄는 하느님의 자비를 억눌러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자극하여 도발시켰고,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은 더 풍성하게 내렸으며”(로마 5,20)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시는 하느님의사랑(오늘 복음)이 바로 회개의 시작입니다. 만일 오늘이야기의 여주인공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운 좋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다면, 진정한 참회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자캐오와 같은) 회개의 열매는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통회는 불완전한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내포하지는 않는 통회입니다. 즉,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너는 미지근하다’(묵시3, 16)하느님의 사랑을 제외한 통회는 무의미한 것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 통회란 불완전한 것이니 사랑에 도달하고 사랑과 섞이기 전에는 구원을 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른다거나 자기의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입니다’(1고린 13,3).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된다면 그는 그 죄를 미워하게 되고(1451항) 믿음 안에서 기도하게 되고(2609항)하느님께 청하게 됩니다(2631항). 그리고 ‘우리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망했으리라’ 하고, ‘오복된 탓이여’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이라면, 그리고 만약 더욱더 큰 죄인이라면, 그럴수록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생기며(루카15, 10)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루카7,47).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1432항). 해골터에서는 구세주의 사랑 없이 살거나 그분의 죽음 없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이승제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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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율법보다 더 큰 의로움--‘

“사순 시기 중에 있은 저녁 소공동체 모임을 잘 마치고, 다들 집에 갈 정리를 하고있는 데, 안드레아 형제가 제안을 합니다. ‘오늘은 이번 달에 축일자도 있고 하니 함께 축하의 자리 겸 회비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모두 그 제안에 찬성하며, 그럼 무엇을 먹을지 의견을 내보라고 합니다. 바로 그날이 금요일이었기에 모두 뭐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입니다. 간단히 치맥(치킨과 맥주)으로 한잔 하자는 의견부터, 그래도 저렴하게 대패 삼겹살에 소주로 한잔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까지 다양한의견이 나오는데, 그때 안드레아 형제가 다시 제안합니다. ‘오늘은 금육을 해야 하는 사순 시기 금요일이니깐, 술 한잔 할 수 있는 회로 하죠! 그래도 우리가 신앙인 아닙니까~’ 비싼 회를 먹게 되었다고 다들 그 제안에 좋아하며 나가는데, 축일 당사자인 요셉 형제는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아 보입니다.”

금육을 지켜야하는 사순 시기 금요일이면 때때로 위의 상황과 같은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상황처럼 ‘금육을 지키기 위해’ 값비싼 회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계명의 실천인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분위기는 상당히 긴박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군중들 사이에 한 가냘픈 여인이 죄인으로 끌려와 있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현행범으로,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했습니다(요한 8,5 참조). 이러한 모세의 법을 예수님께 제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지금,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의 이 질문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그 여자에게 돈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시면, 평상시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약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용서해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모세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그곳에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하느님과 모세의 법에 반(反)하는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울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이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약삭빠름에 비수를 꽂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물론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대답에서 그녀의 죄를 부정하거나 용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용서로써 회개할 기회를 죄인인 여인에게서 빼앗는 단죄가 더 큰 악행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보다 더 큰 의로움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올 수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필리 3,9 참조).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 시기 재계의 삶은 주님 보시기에 좋은 우리의 사랑과 나눔의 삶이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에 금육을 지키기 위해 값비싼 회를 먹으면서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재계의 삶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신앙인과, 금육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보속의 삶으로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인 중, 누가 더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자녀일까요?‘그 답! 모두 아시겠죠? 모르신다구요? 음~ 그럼 말씀을 한 번 더 읽어보세요! 답은 말씀 안에 있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사순 시기, 은혜로운 시간되시길 기도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11)”.

▦ 수원교구 윤성민 그레고리오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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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어떻게 죄 짓지 않게 되는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 오늘 복음 말씀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하려고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참 죄인이고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죄인의 처지에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를 좀 더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용서받게 되는지를 순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용서받을 수 있는데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나 거기서 흘리신 피가 외적으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당신도 그들 중의 하나처럼 심판을 포기하시는 듯 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하지만 용서에 관한 복음이라면 반드시 그 죗값인 ‘피’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오직 피만이 인간 안의 양심의 죄책감을 말끔히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히브 10,22)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양심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삶이 변화되지 않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약의 동물의 피로써 대사제가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가 들어있는 궤의 뚜껑인 속죄판에 그 피를 바르며 죄의 용서를 청했던 모습입니다. 우리 양심은 동물의 피로써는 우리 죄를 용서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피가 하느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인 우리 마음의 양심 뚜껑에 뿌려지지 않는 이상 양심의 가책은 잠재울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의 죄의 용서는 바로 양심의 질책을 완전히 잠재우는 일입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의 가방을 뒤져 친구의 시계를 훔쳤는데 시계를 가지고 있으면 들킬 것 같아 방과 후에 가져갈 생각으로 학교 뒤뜰에다 묻었습니다. 교실로 돌아오는데 손에 흙이 묻어 수돗가에 가서 손을 씻었습니다. 교실에 돌아온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먼저 들어와서 아이의 행동을 다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선주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선주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널 용서할 수 있단다. 그렇지만 선주야, 네 손에 묻은 오물은 물로 씻어 내렸지만, 네 양심에 묻은 오물은 어떻게 씻어내지?”

선주는 시계를 다시 친구의 가방에 넣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선주는 그 후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가책을 없애는 방법은 죗값을 치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범한 죄를 다시 회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신 깨끗한 피로써 대속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고해성사를 하며 그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겼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그 죄를 반복한다면 그 죄가 완전히 씻긴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의 자녀의 팔을 잘라야 한다면 다시 그런 죄를 지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매번 그리스도를 우리 죄로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또 죄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양심의 가책이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으니 그 가책을 잊기 위해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왕자가 어떤 별에서 만난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매일 술을 마시는 이유와 같습니다. 어린왕자가 주정뱅이에게 묻습니다.

“뭐하세요?”
“술을 마시고 있지.”
“술은 왜 마시는 거예요?”
“잊기 위해서지.”
“뭘 잊기 위해서요?”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
“뭐가 부끄러워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럽지.”

이 사람이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가 죄를 끊지 못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술을 끊기 위해서는 부끄럽게 만드는 양심의 가책이 먼저 끊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다 덮어주었으니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기 이전까지, 그리고 그 말을 가슴깊이 믿을 수 있기 전까지는 술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아담이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가책을 덮기 위해 하와를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어린양을 죽여 그 가죽으로 우리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음을 진정으로 믿어야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죄를 지우기 전까지는 죄의 반복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죄가 씻겼다고 믿게 되면 그 믿음이 그를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어떤 두려움도 그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마을의 겁 많은 호랑이가 3일 동안 굶어 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마침 어떤 토끼가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토끼 뒤를 쫓으며 말했습니다.
“어흥~널 잡아먹겠다.”
토끼가 멈추더니 호랑이 눈을 똑바로 째려보며 말했습니다.
“이기 미쳤나!”
호랑이는 충격을 먹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호랑이가 너무 배가 고파 꼭 오늘은 그 토끼를 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흥~널 잡아 먹겠다.”
“나야, 임마!”
또 호랑이는 충격을 먹었습니다. 다음날 굶어죽기 직전 이번엔 꼭 잡아먹겠다고 각오를 하며 나갔습니다.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다행히도 그 토끼가 아니었습니다.
“어흥 ~널 잡아 먹겠다.”
그러자 그 토끼도 눈을 치켜뜨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문 다 났어, 임마!”

우스갯 소리지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받은 사람도 위의 토끼와 같이 됩니다. 어떤 두려움도 나를 다시 죄에 옭아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4)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 받았다고 진정으로 믿었다면 간음한 여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 피의 효과가 그 양심까지 적셔주지 못했다면 그 여인은 또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죄를 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굳이 묻지 않으시는 이유는 당신 피로 죄가 씻겼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이후의 행위를 보면 자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장면이 나오나요? 상징적으로는 나옵니다. 바로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시는 장면입니다. 땅은 죄를 상징합니다. 뱀이 흙을 먹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에 당신 거룩한 손가락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쓰이고 그 말씀 덕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 쓰시는 장면은 하느님께서 돌판에 당신 손가락으로 계명을 새겨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법이 양심에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첫 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금송아지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돌을 들고 있는 바리사이들이고 우리 내면에서는 바로 나를 질책하는 자아이며, 그 깨어지는 돌판이 인간의 몸에 성령의 손가락으로 쓰여진 말씀, 즉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우상인 송아지를 없애기 위해 깨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어 “다시” 땅에 무언가 쓰시는데, 바로 하느님께서 우상이 사라진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그들 심장 안에 하느님의 법인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려고 “다시” 계명판을 만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갈아서 마십니다. 그렇게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은 첫 십계명판의 깨어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금송아지가 바로 지금까지 양심을 괴롭히고 있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 금송아지를 갈아서 먹게 되면 더 이상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그 돌을 내려놓고 떠나가게 만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였다면 죄인인 여인의 마음엔 이제 감사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이 양심에 새겨진 법만을 따르려는 욕망이 솟구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그 여인에게 돌을 들고 있는 금송아지들인 바리사이들을 몰아내고 그녀 심장 안에 당신의 법인 “더 이상 죄짓지 마라”를 새겨주십니다.

바벰바(Bemba)족은 아프리카 잠비아 북부의 고산지대 화전민 부족입니다. 이 부족은 범죄율이 아주 낮아,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습니다. 연구해보니, 그 비결은 마을에서 일탈행위자나 범죄자가 생기면, 역발상으로 부락민들이 그 사람을 칭찬하는 공개 릴레이를 하는 기발한 의식에 있었습니다. 부족 중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데려다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일을 중단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장에 모여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이루어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한마디씩 외칩니다. 그 내용은,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입니다. 그의 장점, 과거 선행 등이 하나씩 열거됩니다.

“이 사람은 지난번에 우리 가족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어요.”
“저번에는 실력을 발휘해 큰 사냥을 성공으로 이끌었어요.”
“지난번 마을에 일손이 필요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섰답니다.”

어린 아이까지 빠짐없이 말합니다. 과장이나 농담은 금지됩니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합니다. 판사도 검사도 없고 변호사만 수백 명 모인 법정과 같습니다. 아무도 문제 인물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걸쳐서 칭찬의 말을 바닥이 나도록 다하고 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 놀라운 ‘칭찬 폭격’은 죄짓고 위축되었던 사람의 마음을 회복시켜주고,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눈물겨운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이 부족에는 범죄행위가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사탄은 “참소”하는 일만 합니다. 죄를 지은 첫 조상들이 그러했고 의인 욥을 보고 하느님께 그러했으며 유다가 그리스도를 참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참소하는 이의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오늘도 그러하셨고 영원히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변호”입니다. 내 자아가 “그건 네 탓이야!” 할 때도 그리스도의 피는 “내가 다 죗값을 치렀으니 이젠 누구의 탓도 아니야!”라고 변호하실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양심을 자유롭게 해 주는 변호자이기 때문이 인간이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요한 2,1)

그분이 나의 죄를 변호해주시기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면 더 이상 나를 억누르던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고 깨끗하여져서 이젠 그분께 무엇을 해 드릴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자캐오처럼 자신의 재산 절반이라도 당장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납니다. 그분의 사랑에 반하여 다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우리 마음 안의 바리사이들을 물리치시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이를 믿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그분의 피가 우리 양심 위에 발라질 것이고 그러면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오늘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 거룩한 목숨을 우리 더러운 땅에 넣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죄를 용서 받았다는 증거는 바로 죄를 짓지 않고 있는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을, 혹은 누군가를 단죄하는 나의 자아가 그분의 피로 내 안에서 사라졌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양심이 자유로워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분의 피가 내 자아를 불살라 버리고 그 피가 내 양심에 발라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의 가책에서 벗어나 다른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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