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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조회수 | 2,513
작성일 | 07.03.22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6가지 감옥 속에 갇혀 지내는 경우가 많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공주병, 왕자병에 걸린 사람이 있겠습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친구가 없습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는 의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감옥에 들어간 이들은 항상 세상을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지향’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이렇게 과거에만 연연하다보니 현재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다섯 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속담이 꼭 들어맞는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른 채, 남의 떡만 크게 바라보는 자가 있다면, 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행복을 지향하면서도 어느 순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속 좁아지는 이유는, 대개 이러한 감옥들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겸허하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단죄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부족함과 가능성을 잘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그러한 잘못, 아니 그 이상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부족함을 바라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고 단죄하는 그 순간, 나 역시도 똑같은 잘못, 아니 그 이상의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시작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 통념상 죽음에 해당되는 잘못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살면서 용서하지 못할 잘못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인을 바라보는 측은하고 자애로운 눈빛을 묵상하면서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는 억지로 참지 마시고, 화를 낼 필요도 있습니다. 흔히 그리스도인이라면 화가 나도 참고 용서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괴로우면서까지 남을 용서하려 애쓴다면 그건 또 하나의 자기 학대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화’의 ‘끝’에 있는 것이지 ‘화’의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 속의 공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그분과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상대 또한 약하고 가련한 한 명의 영혼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때, 그 때가 용서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 잡혀온 여인이 약하고 가련한 한 명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우리 역시도 같은 처지 일 수 있습니다. ‘나도 약합니다.’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생활할 때, 오히려 유혹하는 자는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것입니다.

군종교구 이기범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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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성화는 특별합니다. 그는 보이는 것만 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새로운 해석으로 성화를 그렸기에 그의 그림은 특별합니다. 그는 요한복음 8장 1-11절을 소재로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화는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릅니다. 이 성화에는 돌을 든 군중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 쓰지도 않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깊은 생각으로 우리의 시선을 성화에 머물게 합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장엄한 죽음의 행렬을 하고 있습니다. 행렬의 끝에는 장례식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계단 위 그림의 중심에는 사제가 있고, 사제의 오른쪽에는 향을 든 사람이 있습니다. 사제의 왼쪽에는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제의 맞은편에는 애도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왜 군중들이 죽음의 행렬에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남의 잘못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쉽게 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중들 중 간음한 여인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봅니다.

간음한 여인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예수님과 그 제자밖에 없습니다. 또 그들만이 자기의 가슴을 치듯이 손을 자기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 자기를 탓할 줄 아는 자만이 남의 허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 가슴을 치는 예수님의 손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로 보이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보지 못하고 간음한 여인의 잘못만 탓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십니까?”(요한 8,4-5) 그래서 그의 손짓은 자기가 아닌 남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옷을 보십시오. 죽음의 색인 검은 옷이 아닌가요? 왜 검은색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남을 탓하는 자의 종말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례식의 주인공은 혹시 남을 탓하고 있는 이 사람이 아닐까요?

하지만 간음한 여인은 긴 베일이 달린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마치 새신부가 된 듯합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았음을 예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뉘우치는 사람이 세상의 빛 아닌가요? 그래서 그 여인은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죄를 자기 스스로 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까요? 남의 죄를 탓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허물을 깊이 묵상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여인처럼.

군종교구 손용환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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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사순시기를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그 여정에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우리 교우 여러분들은 각자의 사순 여정의 길을 잘 걷고 계십니까?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속상해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위로를 건네십니다.

오늘 복음 한복판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군중들이 그 여인을 잡아먹을 기세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유다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죄는 사형이라는 형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여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며 이 여인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묻습니다. 만약 간음한 여인을 살려주면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정통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면 평소에 자비와 용서를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태도에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이 계획적인 상황 속에서 긴 침묵을 깨고 다음의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건네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 말씀을 통해 이 세상 어디에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 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를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감싸 안아 주는 그 말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와 함께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위로가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용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사 43,18-19)

▦ 군종교구 윤성민 그레고리오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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