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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마음속의 돌
조회수 | 2,442
작성일 | 07.03.23
한 수도자가 성전 옆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수도자의 집 앞에 어떤 창녀가 살고 있었는데, 밤낮 없이 사내들이 그 집에 들락거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수도자가 어느 날 그 창녀를 불러다 놓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밤낮으로 죄만 짓고, 그 죄의 대가를 어떻게 받으려고 하는가?”

이 말을 듣고 그 여인은 자기의 부정한 행실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자신의 구차한 목숨을 이어 갈 수가 없어서 그 일을 당장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자는 자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행실이 변하지 않자, 심지어 그녀의 집에 드나드는 남자들의 수를 세어 그 만큼의 돌을 마당 한가운데 쌓아놓고 여인을 나무라기도 하였습니다.

“여인이여! 이 돌무더기가 보이지 않는가? 그대는 이 돌무더기만큼 많은 죄를 지었다. 자, 그래도 그와 같은 짓을 집어치우지 않겠는가?”

가엾은 여인은 그 돌무더기가 너무 많은 것에 놀라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자신의 죄 많음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빌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날 죽음의 천사가 그 집 위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교롭게 그 수도자도 그 날 밤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국의 사자는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깊이 회개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천국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수도자의 영혼을 묶어서 지옥으로 던졌습니다. 창녀의 영혼이 천국으로 오르는 것을 본 수도자는 외쳤습니다.

“이게 바로 그 의롭다는 하느님의 심판인가? 나는 일생 동안 금욕과 절제, 그리고 가난 속에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저 여자는 죄 속에 파묻혀서 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천국으로 가다니...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말을 듣고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다. 너는 네가 생각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된다. 저 가련한 여인은 비록 몸으로는 죄를 짓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항상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빌고 있었다. 여인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고 있을 때 너는 여인의 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가득하지만, 너의 마음 안에는 여인의 죄에 대한 단죄만이 가득하구나. 그래서 너의 가슴은 죄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하느님은 공평하시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공평하심을 잊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들어있는 티를 보며 형제를 판단합니다.

누구나 돌을 하나씩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차하면 자기를 공격하거나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들이 있으면, 때론 자기보다 좀 더 앞서가거나 자기보다 인정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여도 그 돌을 번쩍 들 기세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저 또한 돌아보면 마음속에 품은 돌을 사용할 날을 찾아다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땅에다 무언가를 쓰시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는 돌에다 이웃의 잘못을 새기는데 주님께서는 흙에다가 쓰신후 그것을 휘휘 지워버리시는 것은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마음속에 돌을 품고 있었기에 오늘의 이 말씀이 더욱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이제 마음속에 꼭꼭 간직하였던 그 돌을 버려야겠습니다.

인천교구 한정수(그레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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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

우리는 어느덧 사순시기의 끝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인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는 죄와 그 죄를 지은 죄인을 향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단순히 알려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순시기의 끝에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은 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여자의 인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를 끌고나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주님께 질문합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님의 생각을 떠봅니다.
 
그들이 신명기 22장 22-24절과 레위기 20장 10절에 언급된 율법규정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 규정에 따르면, 혼인 계약을 맺은 어떤 남자나 여자가 다른 남자나 여자와 동침할 경우, 두 사람을 다 그 성읍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옭아맬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의도는 주님을 이중 굴레라는 올가미에 가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 율법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이제까지 선포하신 사랑과 자비를 적용할 것인가 하는 갈등에 빠트린 것입니다.
 
죽이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거스르는 결과가 될 것이고, 자비를 베풀지 말고 죽이라고 하면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을 뒤흔드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 굴레에 빠트려 주님을 고소할 근거를 찾으려 한 것입니다.
 
복음 저자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핵심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가 움켜쥐고 싶은 삶의 조건들에 주님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이런 행동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
 
땅에 새겨진다는 말씀은 바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곧 죄를 고발한 사람도 진정한 죄가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지 않으면, 결국 흙에 새겨져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 운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물음은 바로 나 자신은 죄에서 자유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은 죄인을 고발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수 있는지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비추어 보라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신앙의 삶이란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고요하게 항해하지만 거센 시련의 폭풍우가 몰아치면 이내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바다는 매우 광활하고 그에 비해 내 배는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간에는 우리 내면에 있던 불안과 근심과 고통이 고개를 쳐듭니다.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상황에 마주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불안과 고통은 늘 주님을 향한 회의적인 마음과 불신앙을 초래합니다. 세상을 향해 아니면 주님께,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깊이를 드러나게 합니다.
 
이제 여인을 단죄하던 모든 이들이 떠나고 그 여인은 주님과 단 둘이 대면하게 됩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과 자비를 베푼 사람이 침묵 속에서 함께 일치되는 순간입니다. 우리 죄를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짊어지신 십자가 주님이 앞에 계신 것입니다. 겉으로나 내면으로나 잘 바뀌지 않는 우리 모습에도 그 모든 것을 품어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우리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신이 용서가 필요 없는 완벽한 신앙인이라고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 홍승모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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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만나서 차 한 잔정도 마시는 것이 큰 죄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으로 인하여 곤혹한 처지에 놓이셨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멋진 답변으로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는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다짐하십니다.

언젠가 고해성사 중에 황당한 경우를 당하였습니다. “신부님, 제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주부로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다하면서, 직장이나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죄가 됩니까?”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는가 싶으면서도, 질문을 하는 고해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약간 난처해졌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가르쳐야 하기에 “만나서 차 한 잔 정도 마시는 것이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남편 아닌 남자친구를 개인적으로 만나다 보면, 인간관계의 정이란, 나 혼자만의 생각대로 조절되는 것도 아닌데, 찻집에서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외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고 하지만, 부부관계란 항상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부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물가에 자주 가면 아무리 조심해도 물에 옷이 젖듯이, 그것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세태가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지요.

그 신자는 “잘 알겠습니다.” 하였지만 실망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황당한 경우를 당하였습니다. “신부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잠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부적절한 관계가 유지되는가를 물었더니, “지속적인데, 관계를 정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십니다.

제 답변은 “관계를 정리하고 고해성사를 다시 하십시오.” 이었지요. 왜냐하면 고해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자신이 지은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실망하고 고해소를 떠나갔습니다.

아마 이 주보를 보시는 많은 신자분들이 부활맞이 판공을 하셨겠지요.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박희중 안드레아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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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 43,16-21 보아라,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내 백성이 양껏 마실 물을 주리라.
제2독서 : 필리 3,8-14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을 것입니다.
복음 : 요한 8,1-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삶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1독서 18절)

배농사를 봄에 시작하며 가지치기를 했는데, 어떤 나무의 경우엔, 크고 굵은 가지를 다음 해 열매를 얻기 위해 톱으로 자르면서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과연 금년에 내가 원하는 대로 나무가 형태를 갖추어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의구심 때문인지 자꾸 자른 가지가 눈에 밟혀 나무 둘레를 돌아보곤 하였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고 하셨는데... 과거를 돌아보아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공리인데 신앙의 원리는 역사 공리와 다른가 보다.

사막에 물을 대어 주고(1독서 20절)

리비아에 진출한 동아그룹은 사막에 물줄기를 만들어 도시로 물을 공급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물을 끌어다 네겝 지방을 과일 나무들이 우거진 녹지로 만들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미리 내다 본 것이었을까...?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 속에 끌려나온 것은 죄녀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였다. 한 사람은 죄를 지어 끌려나왔고, 또 한 분은 죄를 짓지 않고서도 반강제적으로 대중 가운데 서게 되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라 했는데...... 오늘 우리의 사회 속에 간음의 죄악이 비일비재함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간음죄를 세상에서 없애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만연된 그 죄를 덮어주시고, 죄없다고 인정해 주신 것이리라.

제5복음을 현 시대에 맞게 다시 써야한다면 요한 복음 8장의 이야기가 끝난 그 날 저녁 그 현장에 있던 이들의 저녁기도는 어땠을까 하고 다음과 같이 기도문을 만들어 보았다.

(1) 율사들과 바리사이들 : "우리 선조들의 주 하느님, 오늘 예수라는 한 인물을 만나 새로움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선조 모세 님을 통해 내려주신 당신의 율법을 통해 사회악을 없애 정화해야 우리가 사는 사회가 맑아지는데 오늘 저희가 하고자 하는 방법과 다른 또 다른 사회 정화의 길이 있음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죄녀에게 돌을 던지지 않게 되어 손에 부정의 피를 묻히지 않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2) 죄녀 : "오늘 한 멋진 청년(예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슴을 건질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몸둥이 밖에 없어 몸으로 벌어먹고 살아왔는데 오늘 한 멋진 분을 만나 새로운 삶에 눈을 뜰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는 제 한 몸, 돈이나 육적 기쁨에 탐닉하기보다는 더욱 가치있는 곳에 쓰여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3) 예수님 : "오늘 제게 '지혜'를 주시어 아버님, 죄 많은 한 어린양을 구해낼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아마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권위에 따랐다면 저 또한 손에 피를 묻혀야 했을 것입니다. 법보다는 사랑과 자비, 용서를 통해 인간 세상이 밝아지는데 저들이 갖고 있는 아버님의 율법으로는 용서보다는 법의 실행이 앞서게 되었 있어 저 또한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기가 퍽 어려웠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용기와 지혜를 주시어 법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저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제 뜻보다는 아버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2010년 3월 21일자 평화신문 19면에는 <생활속의 복음>란에 홍승모 신부님의 강론 내용이 실려있다. 그 내용 중 복음의 예수님께서 죄녀를 처단하라 촉구하실 때에 땅바닥에 무언가 쓰셨다고 하는 구절의 의미를 연상해 묵상토록 해 주는 예레미야 예언서 17장 13절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 나는 이 말씀 중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란 표현을 나이많은 노인부터 죄의 현장에서 돌아선 이들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 이름이 땅에 새겨졌다가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려 지워졌으리라 여기게 되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죄의 물들지 않은 손에 대해 감사했을테니까...

▶ 이석재 신부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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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님의 판단을 묻습니다. 당시 간음죄는 공동체 앞에서 공개처형을 당하게끔 되어있지요. 따라서 이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예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신 사랑이 먼저인지, 모세가 말한 정의로운 율법이 먼저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지요. 이번에는 분명히 자기들의 판단이 옳다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실 것이라고, 그래서 무조건 사랑만을 이야기하면서 용서하려는 예수님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도 율법도 먼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시지요. 사실 이 여자가 정말로 죄인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죄는 혼자서 범할 수가 없거든요. 현장 검거했다고 하지만 왜 남자는 없고 여자만 끌려와야 할까요?

자신들의 생각만 옳다고, 자신들의 생각이 율법의 정신과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던질 수 없었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 생각했던 자신이었으나, 실제로는 너무나 많은 죄에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은 전혀 따르지 않으면서도 내 뜻은 어떻게든 관철시키려는 욕심,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이기심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주님의 뜻이 완성되어야만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루소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

외로움에 젖어 살라고 주님께서 공동체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함께 어울려 살면서 기쁘게 살라고 공동체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외로움에 처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똑같은 죄인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

▶ 조명연 신부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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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이 깊어가는 오늘 지난주의 복음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에 버금가는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 한편을 들려줍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의 초점이 죄인을 바라보는 하느님 아버지의 시선, 곧 자비와 용서에 맞추어져 있기에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하느님이시며 예수님이십니다.

모세의 율법 신명기 22장 22-23절은 간음하다 붙잡힌 경우, 남자와 여자 모두를 성문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붙잡혔다는데 남자는 어디로 가고 끌려온 사람은 여인 혼자뿐입니다. 고발의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목적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묻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리던 예수님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옭아매려는 속셈이지만 예수님은 아주 엉뚱한 행동을 취하십니다. 그분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십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고 몸을 굽혀 다시 무엇인가 쓰십니다. 침묵이 흐른 후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떠나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가자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여인아” 이 말은 낯선 여인을 아주 정중히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아주 정중하게 대합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간음한 여인은 군중이 모두 떠난 뒤에도 끝까지 예수님께 남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싶었습니다. 군중과 달리 죄를 깨달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세주의 자비를 청하며 회개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 세상 이야기이고 죄인인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여인은 바로 나의 이야기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인천교구 김용환 신부
  | 03.16
인천교구 민경덕 신부 1 7.2%
찬미예수님.

우리 병사 친구들과 우리 가족여러분도 기쁘고 복된 한주간을 잘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소원수리’라는 것을 들어보셨는지요?
참으로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병 생활을 하던 당시, 부대 내무실에 행정관이 들어와서, 쪽지를 나눠주며 말했습니다.

‘자신의 군생활 중, 부당하고 불합리적인 언행을 당한 일이 있으면 적어서 제출해라’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기회가 왔구나~’라고.
그런데 생각만큼 쉽게 손이 움직여지지가 않았습니다.
두렵고 망설여지는 마음. 알 수 없이 흔들리는 눈빛들을 저를 향해 쏠려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에게 주어진 쪽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군생활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신 여인을 기억해보게 됩니다.

당신에게 많은 이들이 여인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은 지상생활을 걱정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다만 여인의 삶을 걱정하셨을 겁니다.
진정 여인의 모습을 통해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보셨고,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신자 여러분,
우리가 군 생활을 통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단순히 계급이라는 것을 통해서 상대를 단죄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많은 군중들이 죄를 지은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고자 합니다.
하지만 돌을 던질 수 있는 이는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예수님뿐이셨습니다.

많은 병사친구들이 군 생활 중에, 미워하는 이가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할 수 있음도 기억한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 미움이 상대를 향한 돌 던짐이 아니길 희망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라’

사순시기를 들어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무런 조건 없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고,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고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잊지않고 잃지않길 청해봅니다.

‘너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너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1,18)

이 말씀이 우리를 감동하게 합니다.

바로 하느님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신 말씀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한 주간 참된 주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단과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길 희망하는 주간이 되길 청해봅니다.

아멘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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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의 자비가 더욱 돋보이더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도록 이끌어주는 말들이 있습니다. ‘속담, 명언, 격언, 잠언, 금언’이라고 칭해지는 말들이 대표적인 예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좋은 말들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지요. 성경 안에는 이런 말들이 보물처럼 묻혀 있습니다. 특히 복음 중에서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씀은 그 자체로 우리 신앙인을 의식적인 성찰로 인도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짧은 순간이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 돌을 들고 있던 이들이 떠올렸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인을 단죄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나는 죄가 많아서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감탄을 하며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혼자 남은 여인과의 대화도 짧지만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하지요.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여인의 죄를 모르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덮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죄를 지었으면, 그리고 그것이 드러났으면 공개적으로 심판을 받고 죗값을 치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믿는 이들에게, 용서는 그 이후에나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여기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의 용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은 스스로 잘못하고 죄를 진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죄의식,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의 경우 죄에 대한 용서로 고해성사를 보지요. 그리고 고해성사를 볼 때 목소리를 높여 외치다시피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오히려 목소리를 작게 하여 소곤소곤 말하여 무슨 고백을 하고 있는지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해서 하나하나 묻고 따지며 들추어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이왕이면 조용히 덮어둔 상태에서의 용서를 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마음을 잘 아셨겠지요. 그러니 복음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요약해 봅니다. “묻지 않고, 들추지 않고, 성찰하게 하니 하느님의 자비가 더욱 돋보이더라.”

▦ 인천교구 김인섭 바오로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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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와서 도자기 그릇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기 가방에서 그릇 하나를 꺼내고는 마음에 드는 진열된 도자기 그릇을 하나씩 부딪쳐 보는 것입니다. 점장은 이상한 이 행동을 보고는 “손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이 남자는 “그릇을 서로 부딪쳐 보면 품질을 알 수 있지요. 좋은 그릇은 청아한 소리를 내거든요.”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가게의 도자기 그릇을 하나씩 부딪치며 소리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도자기 그릇의 소리를 들어본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별로입니다. 소리가 맑고 청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점장은 “그러면 제가 사용하는 그릇으로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라면서 그릇을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이 남자는 반신반의하면서 이 그릇으로 부딪쳐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주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탁한 소리만 내던 그릇이었는데 말이지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남자가 가져온 그릇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좋지 않은 그릇으로는 어떻게 부딪쳐도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었지요.

이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세운 기준이 잘못되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남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 이러한 잣대로 바라보니 모든 것이 틀린 것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렇게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기 위한 것이었지요. 죽이라고 하면 그동안 그토록 예수님께서 강조했던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따질 수 있으며, 살리라고 하면 모든 유다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시지요. 돌을 던지라고 했으니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동시에 죄 없는 자는 있을 수 없으니 여자에게 돌을 던질 사람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 마음에 좋은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지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궁지에 몰까만을 생각했었고 이를 위해 모세의 율법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잘못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준을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것이며, 나만 옳다는 기준으로 상대방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옳다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이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죄로 가득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제는 제대로 된 기준을 세우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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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적성검사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적성검사 안에는 장래 희망을 적는 난이 있었다고 해요. 한 학생이 그 난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람.’

그 학생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담임선생님의 부름을 받은 뒤에 “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거야? 장래희망을 쓰라고 하니까 ‘사람’이라고 써?”하면서 신나게 혼이 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지 못하고 눈치 없이 대꾸했습니다.

“진짜에요. 정말로 장래희망은 사람입니다.”

그 순간, 선생님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만 곧 학생의 뺨에서 불이 났지요. 왜 그랬을까요? 선생님께서는 학생이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결국 학생은 신나게 맞고, 교무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고 해요.

‘진짜 사람인데…….’

우리 모두의 장래희망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처음부터 사람이지 동물이었습니까?”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안에는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면서 내 자신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쫓아갈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 사람, 즉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영역을 넘어서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려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판단과 심판을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었던 지요?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계속해서 손에 돌을 움켜쥐고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사람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러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것은 사람이 아닌 사람만, 즉 신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만이 돌을 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때요? 나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는 양 얼마나 자주 돌을 움켜쥐고서 상대방을 향해서 힘차게 던졌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그러한 기회를 내 이웃에게 절대로 주지 않으려고 할까요? 그 모습이 바로 사람이길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진짜 사람’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손에 남을 판단하는 돌이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할 수 있는 빈손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손에 비판의 돌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빈손을 만듭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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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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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라는 스님이 불상을 태운 일화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당나라 시기 유명한 고승인 단하천연(丹霞天然)이 낙양 동편에 있는 혜림사에서 하룻밤 묵을 때 벌어진 일이다. 때는 겨울이고 눈까지 내려 추위에 떨던 단하는 결국 불당의 목불(木佛)을 쪼개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것으로 언 몸을 녹이며 날을 새웠다.

다음날 사찰 전체에 난리가 났다. 성스러운 불상을 태워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절의 주지가 단하에게 왜 불상을 태웠냐고 따져 물었다. 단하는 천연덕스럽게 이 절의 불상이 유명하다 하니 부처님의 ‘사리’를 얻을까 해서 태웠다는 것이다. 목불에서 사리가 나올 리는 없는 법, 주지는 나무 불상에 어찌 사리가 있겠느냐며 화를 냈다.

이에 단하는 “사리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나무토막”일 뿐이라며 오히려 주지를 힐난했다. 나무토막에 불과한 불상이 추위에 떠는 중생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한 사람, 오늘 독서에서의 바오로다.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그는 그리스도를 지켰고 나머지는 버렸다. 심지어 그 나머지를 ‘쓰레기’라고 여길 정도로 선택의 동기가 분명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하느님의 의로움’이다. 바오로가 지킨 것은 그가 버린 것을 통해 얻게 될 선물이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분명했던 바오로는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 올 일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열성적인 전도는 모두 이것에 근거한다. 한 가지를 지키려면 그와 반대된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지키려 하는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율법을 버리지 못한다. 그 과거가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안정감 때문인데 그들이 버리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 여인을 사지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대에 세웠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세밀하게 다듬어진 율법은 어느새 그것이 보호해야 할 사람을 삼켜버렸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빈껍데기인 자기 자신이다. 바오로가 쓰레기로 여긴 그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느님의 새로운 약속, 즉 신약(新約)의 중심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버렸다면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버리신다. 이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만이 남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구약(舊約)이 계약과 그에 대한 인간의 충실함을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의 의로움’이 주요한 문제였다면 이제 신약에서는 나의 충실함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위로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샘이 솟고 사막에 강물이 넘실거리는(이사 43,20) 것과 같이 믿기지 않는 구원의 잔치이다. 바오로는 그것을 깊이 이해했고 그래서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약속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적발된 여인을 끌고 와 처분을 강요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간음죄에서 남자들이 빠져 있다는 당시의 율법도 못마땅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는 소위 지식인들의 행태가 불편하다. 예수님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끌려온 여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셨을 뿐 아니라 율법은 지키면서도 사람은 버리는 식자층의 어리석음도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딴청을 피우신다. 그들이 계속 대답을 청하자 예수님은 역정을 내지도 그들을 나무라지도 않으시면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로 이 사건의 선택을 군중에게 맡겨버리신다. 나이 든 자들부터 하나 둘 떠나가더니 결국 그 여인만이 남는다. 여인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구원된 것은 그 여인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또 한 여인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리를 떠난 그들도 동시에 구원됐다고 말할 수 있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혼동했던 교회의 과거를 우리는 기억한다. 중세의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지켰음에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벽을 더 높이 쌓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그때만 있던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면 교회를 위해서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멋진 성전을 짓는 일도, 교회의 교리를 수호하는 일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우선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들이 버려져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교회에 남겨주신 유일한 유언이기 때문이다.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불상을 애지중지하는 것보다 그것을 태워 추위에 떠는 중생을 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불심이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선택하시려고 당신을 버리신 시간이다. 그런 예수님께 하느님은 놀라운 일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버리셨던 그것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 주신 것이다. 죽음을 통한 부활의 신비이며 버림을 통한 얻음의 역설이다. 우리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버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지 않기를 희망한다. 재산을 쌓아둔 부자가 바로 그날 밤 불려갈 것이라는 복음말씀(루카 12,16-21)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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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 가톨릭신문 2019년 4월 7일
  |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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