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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죄를 묻지 않으시는 하느님
조회수 | 2,417
작성일 | 07.03.24
올가미를 슬기롭게 빠져나가시는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인다. '단죄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형제들을 단죄하고 벌(罰)하려 했던가? 우리도 죄를 뉘우치며 주님 앞에 꿇어 용서를 청하자.

1. 돌에 맞아 죽을 죄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살인과 배교(背敎)와 우상숭배와 간음을 큰 죄로 간주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공적인 보속을 명하였다. 시대에 따라 법 감정이 변하듯이, 요즘은 일반인의 생각도 많이 바뀐 듯 하다. 어떤 40대 주부가 예비자 교리를 마치고, 영세를 하기 위해 본당신부님과 면담을 하면서 질문을 하였다. 신부님도 얼마 전에 방영된 '애인'이라는 연속극 보셨지요. 신부님 제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주부로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다하면서, 직장이나 모임을 통해 알게된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죄가 됩니까? 정말 무슨 말을 듣고싶은 것인가 싶으면서도, 질문을 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하기 때문에, 말 해 줄 것은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차 한잔 정도 마시는 것이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남편 아닌 남자 친구를 개인적으로 만나다 보면 인간관계의 정(情)이란 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대로 조절되는 것도 아닌데, 찻집에서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주어진 자신의 임무를 다 한다고 하지만, 부부관계란 항상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이기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부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가에 자주가면 아무리 조심해도 물에 옷이 젖게 마련이듯이 그것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세상 흐름이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지요. 그 예비신자는 "잘 알겠습니다." 하였지만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2 예수님께 놓아진 올가미

오늘 복음의 상황은 겉으로는 단순히 죄녀 하나를 불러 예수님의 고견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면 그 당시 모세 법으로는 돌로 쳐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역설해 오신 터였다. 평소의 주장대로 "죄녀(罪女)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은 모세 법을 어긴 죄인으로 고발될 것이고(이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이다), 법대로 돌로 쳐죽이도록 묵인하면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주장을 번복해야 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 대한 재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모두들 끌려온 여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돌을 불끈 쥔 손에는 살기(殺氣)가 돈다. 사태는 험악하고 심각하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답을 재촉하지만, 예수님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신다. 그러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하셨다. 사람들은 한 대 맞은 표정들이다. 예수님은 끌려온 죄녀를 향해 쏟아지던 단죄와 저주의 눈길을 각자를 향해 돌려보도록 하신 것이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그냥 둔 채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문제삼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대신학교 다닐 때 '3선 개헌'을 반대하여 삭발 데모를 한 경험이 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별 느낌이 없었는데, 삭발한 동료의 모습을 보거나, 복도를 지나가다 큰 거울에 비친 나의 낯선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옷매무새와 말씨와 행동거지를 하나 하나 뜯어보면서 너무나 쉽게 판단을 한다. 그러나 남들의 눈에, 아니 하느님 앞에 비친 나의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자주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이다.

3. 다시는 죄짓지 말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를 돌로 던져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간음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소위 문민정부가 끝나기 며칠 전에, 23명의 사형수를 처형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중에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죽으면서 장기(臟器)를 기증한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안다. 그러나 시기와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다 보면, 그런 것은 사치스런 말장난 라고 여겨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가차없이 단죄하고 매장시키며 그들을 밟고 올라서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돌을 던질 자격으로 본다면 예수님보다 더 당당한 자가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해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죄대로 우리를 갚으신다면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자.

고해소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맹세하노니,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노라."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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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어서 생활하여진 시간으로서의 용서와 화해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강해>는 그것의 많은 긍정적인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공간과시간이라는카테고리를너무도동일한차원에두고있기에,그시작부터복음서와그리스도교그리고그뿌리인유다교전통을곡해하고있다.

기술 문명 속에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며 그 공간의 세계에서 우리의 힘을 증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사람은공간을넘어서지만,시간은사람을넘어선다.시간은우리의모든경험에본질적이면서동시에우리의모든경험을넘어선다.시간은오로지하느님께만속해있다.시간은모든범주위를떠도는신비이자他者가아닐수없다.

오늘 요한복음이 전하는 장면에서의,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이 나이 많은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갔다는, 외면적인 하나의 큰 반전 역시 그래서 좀 더 깊은 차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간음하다 “現場에서” 붙들려 온 여인에게서 사람들은 공간적인차원에서만고착되어있지,시간적인차원을보지못하였다.그들에겐“그곳 現場에서 이곳 刑場으로” 붙들려 온 여인만이 중요한 문제였지, “그 때의” 여인이 어떠했고 또 “지금의” 여인이어떠한지는중요하지않았던것이다. 한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그분과 함께한 예수(요한 1,1)와의 만남을 통해서 실질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이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문제인 것이고,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나이 많은 자들은 문제의 핵심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 듣고 그것에 맞갖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거저 그들이 나이가 들어서 죄가 더 많다고 느끼고 또 이를 통해 다른 죄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유다인으로서싫든좋든“공간을 넘어서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이며, 그들이 이렇게 나이가 들 때까지 시간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안식일때문이었다.

시간은공유의대상이고, 공간은 소유의 대상이다. 공간을 소유하면 다른 모든 존재의 적수가 되지만, 시간 속에서 살면 다른 모든 존재와 동시대인이 된다. 인류는 여러 민족과 여러 나라로 갈라지고 나뉘어져 있다. 공간속의사물이빼앗아간것,바벨탑이빼앗아간것을인간에게되돌려주는것이바로시간속의순간이다.사람은공간을정복해가며그속에서문명의찬란한발전과업적도이루지만,오늘복음서속에서의여인처럼바로그공간안에서실존의좌절과아픔을맛볼수밖에없는것이다.이제전혀다른무엇인가가필요한데그것이바로“생활하여진 시간”이다. 모든 존재의 우정과 일치는 시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원론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을 지켜주는 것 역시 “생활하여진 시간”, 즉 주일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다!)이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아니면 그것을 의식하고 있건 그렇지 않건, 중요한 것은 주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고 우리도 결국 어떠한 모양새로든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나와 다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상황이 어떠하건 우리는 주일이라는 “시간 속의 지성소”에서 머무르고, 그것을 통해 선사된 영원을 누리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 이진수(스테파노) 신부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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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절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의 삶을 반성하고 속죄, 보속해야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주님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곧 다가올 것이기때문입니다.

오늘 전례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용서의 중요성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계명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 22,37 참조.)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화해는 회개를 전제로 하고, 회개를 통한 화해는 용서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마라.” (43,18)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죄로 인해 자비하신 하느님을 스스로 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과 형제들과의 화해는 회개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회개는 용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라는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갔다.”(8,9)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왜 모두 떠나갔을까? 우리는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고해를 마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이 평소 가벼이 여겨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자신의 ‘알아내지 못한 죄’를 떠올렸던 것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흔히 어르신들이 “살아있다는 것 이 죄 아닙니까?”하시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론 살아있다는 것이 보속이기도 합니다만, 어떠한 죄 없이 매일을 살 수있는 신앙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저를 포함해서요.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잘못도 용서해 줄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따라서 우리 손에 쥐고 있는 돌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땅에 내려놓고, 그 대신 하느님의 선물인 자비와 용서를 거머쥐고 누구에게나 기쁜 마음으로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더욱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복음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면 그 어떠한 허물과 잘못과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십니다. 이번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 평소 우리가 살피지 못했던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는 무엇이었는지를 묵상하고, 내가 먼저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와 자비를 청해보도록 합시다. 아멘.

마산교구 박영진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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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누구에게도 던지지 못할 돌 하나 손에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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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신학교 기숙사, 1층 엘리베이터 옆에 그림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백지에 검은 먹으로 돌을 하나 쥐고 있는 손 하나가 거칠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손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던지지 못할 돌 하나 손에 쥐고’.

이 문구가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자신이 죄인이기에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차마 던지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돌을 던지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거친 손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스스로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각으로는 죄인인 여인을 그들의 율법대로 처리하려는 것은 옳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이라는 구실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죄인을 끌고 나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던질 것을 제시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죄인의 회개이며, 회개하는 이를 하느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 자신을 심판관이라 착각하며 이웃에게 돌을 던지지 말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누구나 죄인이다.” 이러한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께 계속해서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단호한 재판관이, 심판관이 되어서 나의 허물은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만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자비하심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남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회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회개의 사순시기도 이제 종반부로 나아갑니다. 이 고난과 인내의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부활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쁜 부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모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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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주효상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4월 7일
  |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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