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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새로운 탈출
조회수 | 2,111
작성일 | 07.03.24
오늘 1독서는 바빌론의 유배 생활을 끝낸 유대인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가나안 복지와 풍성한 수확의 축복을 주셨지만 우상숭배에 젖고 죄악에 찌들어 하느님을 저버린 결과 유배생활의 혹독한 현실을 맞아야 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허망했던 생활에 몸둘 바를 모릅니다. 죄악에 대한 자책감과 후회가 늘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들추지 않으시는 희망과 용서의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그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희망과 용서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두고 “누구든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여인을 돌로 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간음한 여인의 죄도 크지만 그 여인을 단죄하려는 이들의 죄는 더욱 크기에, 죄에 물들어 무디어져 있는 그들 자신의 위선과 오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남의 눈에 들어있는 티를 잘 보면서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는 교만한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고 되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부드럽게 타이르셨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을 배신했던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던 하느님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진짜 죄인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고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며 결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죄를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실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랑과 용서의 치유를 믿어야 하고 서로서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죄인들이며, 또 앞으로도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사람들이며,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 우리도 용서를 나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서로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이웃을 판단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판단하고 돌아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그 사랑과 자비를 가진다면, 우리는 더 큰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와 회개를 통한 사랑이신 주님의 새로운 탈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 43, 1-3)

부산교구 백성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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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의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앉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나자렛 출신 젊은이로서 사실은 성전에서 가르칠 수 없는 신분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하느님 아들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꾸민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신다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당신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에 대해 가르치신다는 것을 말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율법(신명 22,22-24 참조)을 내세워 한 여인을 돌로 치려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에서 구해 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부인, 그들이 어디 있소? 아무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았지요?’ 그 여자가 ‘아무도 안했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다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사람들은 하느님과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죽이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다는 사실을 대조해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인간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을 잊어버립니다. 복음서는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태 7,3)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단편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면, 이웃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약 70년이 지난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계셨다는 것을 알아들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 생명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유대교가 하느님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유대교는 이제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인데, 유대교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사람을 살리지 않고,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만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이 구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류역사에 제일 먼저 집필된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가 집필하게 한 법전입니다. 그 법전이 법질서의 기본으로 삼은 것이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 상대가 잘못한 그만큼 앙갚음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가 제정하는 법들은 함무라비의 것보다는 많이 세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 정신은 역시 동태복수법적입니다. 다만 개인 각자가 잘못한 이에게 복수하는 대신 국가공권력이 잘못한 이를 잘못한 그만큼 벌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예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만든 사회의 기본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질서에 준해서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복수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1,4). 그 생명이 보여주는 바를 빛으로 받아들여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빛을 받아들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말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8,32). 예수님의 말속에 머물러서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단죄하여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고, 그 노력은 인간 세계의 악순환(惡循環)의 고리를 끊어서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간 사회가 만든 질서 따라 삽니다. 그래서 재물을 좋아하고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해지고, 약자 앞에서는 강하게 행동합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허세도 부리며 이웃에게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멀리합니다. 이런 삶의 현상은 동물들 안에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종족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가진 성향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구약성서의 말씀이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 만든 질서에서 하느님의 질서에로 사람을 불러냅니다. 자비와 용서의 질서를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동태복수법을 기본으로 한 우리의 질서는 악에 대해 악으로 갚는 질서입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악,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악의 순환에 말려들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워서 참으로 자유로우십니다. 그 자유를 배워 사는 사람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유대인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율법만을 확대해 보면서 자유와 구원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잊으면서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가 사라지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로 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하느님은 복수라는 악순환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고 살리면서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악순환을 벗어나 자유롭다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만든 악순환을 벗어나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서,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복음은 우리를 부릅니다.

▶ 서공석 신부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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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의 길 : 살리는 길과 죽이는 길

요한복음 7-10장에는 애당초 계시된 두 갈래의 길이 뚜렷이 보인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께서 추진하시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꾸미고 있는 죽음의 길이다. 이 두 길은 예수와 그의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으로 서로 고조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이 두 길은 나란히 펼쳐진 평행의 길이 아니라 서로 교차되는, 또 교차될 수밖에 없는 길로써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막다른 길이 되어야 하는 길이다. 생명의 길은 빛이요, 죽음의 길은 어둠이다. 그런데 생명의 길이 죽음의 길과의 교차점에서 제지당하고 거부당하고 있다. 어둠에 덮여있는 이 세상에 한 가닥의 빛이라도 더 주시려 바삐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순 제5주일에 들려주는 복음말씀에 그대로 쓰며있다.

초막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신(7,10) 예수께서는 축제기간 7일 중에 반(半)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계셨으며(7,11), 나머지 반은 거의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시는(7,14) 바쁜 일정을 보내신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는 중에 ’큰소리’(7,28)와 ’외침’(7,37)을 곁들이는 큰 열성을 보이셨다. 생명의 길을 위한 예수의 가르침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한 일은 죽음의 길에 합세했던 자들 중에 몇몇이 예수께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그분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빈손으로 돌아왔던 성전 경비병들(7,45-46)도 그렇고 니고데모(7,51)도 그렇다.

명절의 마지막 날(7,37)을 올리브산에서 묵으신 예수께서 다음날 이른 아침에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 가르치신 것(2절)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된다. 오늘 복음은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복음으로 ’간음(姦淫)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판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8,1-11)을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인다. 이 대목은 원래 요한복음의 수사본(手寫本)에 없던 대목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다가 빨라도 5세기경 그 내용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금의 위치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학자들은 오늘 복음을 앞·뒤의 문맥과 비교하여 볼 때 어느 쪽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오히려 이것이 7-10장 전체에 고조되는 논쟁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8장 12절부터의 말씀이 성전 입구 헌금궤가 있는 곳(8,20)에서 언급된 데 비하여 오늘 복음은 땅바닥이 있는 성전 마당에서 있었던 사건으로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어울리지 않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필자가 보기엔 이 대목을 여기에 삽입한 이유를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 대목을 여기에 첨가한 의도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갈래 서로 다른 길에 있다. 즉, 사람을 살리는 길과 죽이는 길에 있다는 말이다. 간음(姦淫) 행위의 주인공인 여인이 현장에서 발각되었기 때문에 발뺌의 여지가 추호도 없다. 여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넘겨진 셈이다. 간음한 행위 자체는 이미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하는 범죄이다.(신명 22,22-24; 레위 20,10) 그러나 그들이 여인에 대한 판결을 유보한 채로 예수를 진퇴양난의 길에 빠뜨리려 한다. 예수께서 여인을 용서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고, 여인을 단죄하면 자비와 사랑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팽팽히 맞선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인을 법대로 죽이려는 죽음의 길을, 예수께서는 법을 어겨서라도 여인을 살리는 생명의 길을 택하려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대답이 우리의 심금(心琴)을 울린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7절) 다른 필사본에는 그 동안 예수께서 땅바닥에 돌을 쥔 사람들의 죄목을 썼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나갔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말라’(11절)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다.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스로는 죄인이면서도 남의 잘못을 응징하려 한다면 죽음의 길을 걸으려는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비록 죄인이지만 생명의 길을 걷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박상대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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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고 용서하자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순 시기, 특히 이번 주부터 하느님의 사랑과 주님의 수난을 특별히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는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주님의 말씀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용기와 힘을 내어 바라는 목적지를 향해 최선을 다하여 달리도록 일깨워주십니다. 특히 복음의 말씀으로 죽음 목전까지 간 간음한 여인에게는 주님의 자비를, 이기심과 시기심, 자만심에 빠진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에게는 주님의 정의를 알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는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어진 율법으로 간음한 여인을 벌하며 또한 간음한 여인을 통해 자기들을 부끄럽게 하는 예수를 어찌해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남의 잘못을 보고 고쳐주려는 마음보다 그를 심판하고자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여야함을, 일곱에 일흔 번 용서해야함도 잘 알고 가르치면서도, 남의 잘못을 보는 순간 심판하고 벌주고자 합니다. 말 한마디만 해 주어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심하여 돌아올 수 있는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이용해 자신을 옳음을 들어내고 싶고 나아가 자기 잘못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남의 잘못을 심판함으로써 자기가 이루고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합니다. 이런 일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 싶게 일어나는 것 같아 더 마음 아픕니다. 어쩌면 열심히 할수록, 교회 봉사직을 크게, 많이 맡을수록 더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 성직자도 수도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이들에 비해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용서하시고 용기를 넣어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통하여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에게 하느님 앞에 다 죄인임을, 자신을 죽이게 하는 죄 뿐만이 아니라 남을 죽이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려줍니다.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남은 두 주간, 하느님 앞에 누구나 잘못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이웃의 잘못을 보고 심판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어 회개하고 그리고 자비의 하느님께 나아가 용서를 청하는 주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김옥수 신부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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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에 보면, 간음하다 들킨 남자와 여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그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특히 원로들을 중심으로 동네 전체가 공동으로 사법권을 행사했습니다. 공동으로 사형까지 집행함으로써 죄와 그에 대한 응징, 재발을 방지하는 노력에 모두 동참했습니다. 물론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 야만적인 방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실행되는 사형 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현행범으로 잡힌 오늘 복음 말씀의 여인은 사형에 처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핑계도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 여인을 잡아다가 돌을 던져 죽이면 사건은 끝납니다. 그런데 일이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흉계를 꾸몄기 때문입니다. 그 불쌍한 여인보다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노리고 있는 적대자들의 올가미에 걸려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 그들은 쾌재를 부르며 예수님께 덮어씌운 올가미를 잡아챌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야 합니다.”하고 대답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 전체가 신빙성을 잃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 죄인들의 친구라던 저 예수,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운운하던 저 자. 보라, 역시 별 볼 일 없는 자이다.”하고,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아니, 불쌍하니 이번만은 용서해 줍시다.” 한다면, 이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정면 도전이고, 그 법을 제정하신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이라는 무거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자신도 돌을 맞을 중죄인이 됩니다.

이런 난관 속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대답은 그분의 매력을 잘 드러냅니다. 그 매력은 단순히 재치 있게 위기를 벗어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율법 너머 더욱 놓은 차원으로 이끄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여인을 단죄하고 처벌하려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기들의 죄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그 여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 여인은 속으로나마 핑계 속에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리라고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는 남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두 가지 자세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의 자세와 예수님의 자세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깝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산교구 이수락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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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의 이웃에게 자비의 얼굴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 복음은 ‘올리브 산’을 단 한 번 언급하는데(요한 8,1), 오늘 복음이 그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시작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신 뒤 이른 아침 성전으로 올라가시는데, 이는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성전 바로 동쪽 편에 위치해 있으며, 성전에서 보면 이른 아침 해가 뜨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아침 햇살이 올리브 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듯 하느님 영광이 올리브 산에서 성전 안으로 들어오리라 믿었습니다(에제 11,23 43,2 등).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침 해가 뜨는 시간 올리브 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은 마치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처이고, 지성소에 있던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어좌입니다. 앉아서 가르친다는 것은 권위를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느님의 권위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시험에 들게 하려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데리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여인을 한가운데 세우고 묻습니다. 모세는 간음한 여인의 경우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탈출 31,18을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 손가락으로 돌 판에 율법을 새겨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써주신 돌 판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는데,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직접 쓰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자리에 계신 분임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쓰셨다는 말을 세 번에 걸쳐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계속 다그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씩 떠나고 여인과 예수님만 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써주시는 가르침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며, 죄인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고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파견되신 분이라는 것 말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모조리 없애고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경계하고 경계하여 하느님만을 참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자기가 생각한 바에 따라, 자기와 반대하는 이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이용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인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인은 분명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해 그 여인의 죄를 이용하려 들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통해 모두의 죄가 드러나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스스로의 죄를 자각하게 만드십니다.

자비의 희년에 지내는 사순시기가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다시 한 번 남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교황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입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이웃에게도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가 자비의 얼굴을 지니게 될 때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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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서의 사람임을 기억하자

오늘 복음의 내용은 감동적이면서, 예수님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에 반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백성의 지지에 앙심을 품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또다시 주님을 곤경에 빠뜨릴 의도를 가지고, 현장에서 간음으로 적발된 여인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타납니다.

예수님 활동 시기에 간음의 죄는 공개적으로 사형시킬 수 있을 정도의 중범죄였습니다. 여인이 돌에 맞아 죽는다 한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법을 이용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면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고발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돌을 던져서 죽이라고 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스스로 어기셨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 위선적이라는 수모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그들의 계략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자신만만해진 무리들은‘이제는 당신도 별수가 없지’하는 맘으로 빨리 답을 달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는 중에도 주님은 동요함이 없이 땅에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일어나셔서 입을 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주님의 말씀에, 모여 있던 이들이 당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은 자들부터 슬금슬금 달아나기 시작하지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여인을 돌로 쳐 죽이고자 모였던 자들은 다 사라지고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그녀를 보내십니다.

그 후에 그녀의 삶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인생이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이 사순 시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감동을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언제나 세상의 법과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이었고, 언제나 사람을 살리시는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얼마나 큰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우리가 이웃을 얼마나 쉽게 단죄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와 보속의 시기,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 우리는 용서의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 부산교구 송제호 야고보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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