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7 45.6%
[의정부] 마음껏 돌 던지십시오
조회수 | 2,232
작성일 | 07.03.24
사순시기가 깊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축제가 그만큼 가까이 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은 바로 그 부활의 목전, 사순의 정점에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골의 깊이가 바로 부활의 산의 높이와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부담 때문입니다.

그 부담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부담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매체가 발달한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이 떠들썩해질 만한 성추문 사건이 조용한 시골동네에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그 사건에 새로운 말씀과 권위로 당대 검색어 1위를 달리셨을 법한 예수님께서 휘말린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도구적으로 이용되는 여인의 몸과 큰 숙고 없이 단순한 호기심 정도로 상황을 즐기는 듯 보이는 군중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이 모든 상황을 이용해 너무도 정당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일단의 거룩한(?) 무리들.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찌나 비슷한지.

오늘 예수님을 눈엣가시 같이 여기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제대로 된 건수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렇잖아도 뭔가 재미있는 일 없나 하고 심심해하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이 목숨처럼 신앙할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던 도구인 율법에 대한 권위를 위협하던 풋내기 예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 흥밋거리로는 최고인 ‘성추문’ 사건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인간이 가진 나약한 본성 때문에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이해나 배려,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도 역시 많은 경우 자신과 이웃, 하느님께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공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은 네가’ 돌을 맞지만 ‘내일은 내가’ 그 자리에 설 수도 있다는 두려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구라도 도구화 하고 무고한 사람을 가차 없이 음모에 빠뜨리는 이들의 반성 따위는 없었습니다. 대신 이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면서도 그 방법이란 거기모인 많은 이들에게서는 눈곱만큼도 찾기 어려운 ‘사랑’ 뿐이기에 너무도 부담스러운 예수님의 고민과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죄를 지은 여인 하나를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그닥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던질 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만한 마음을 열어 그들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다르지 않은 죄인임을 깨닫게 만드는 일, 그리하여 그들이 준비한 돌이 남이 아니라 먼저 자신에게 던져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일은 예수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정리하시는 예수님의 한마디, “누구라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누구라도 여러분 가운데 죄 없건, 있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주변의 실수하고 죄지은 사람들을 마음껏 비난하고 단죄하고 심판하십시오. 돌을 던지면서 느끼는 자기 죄에 대한 은폐와 타인에 대한 단죄의 쾌감은 순간 짜릿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간 이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었는지는 시간이 지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의정부교구 오용환 베드로 신부
447 45.6%
무엇을 보고계십니까?

고개를 들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세요. 어렵지 않게 내 가족과 이웃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곧이어 내 안에 생겨나는 어떤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다양한 감정이 머릿속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 우정, 고마움의 감정일 수도 있고, 의심, 짜증, 분노의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 눈은 내 생각을 자극합니다. 이제 그들 틈에 끼어 있는 나를 한 번 찾아보세요.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나 자신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내 눈은 나를 보지 못합니다.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 역시 많지 않습니다. 내 눈은 나를 향하지 않고 내 주위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한 번 감아보세요. 지금은 무엇이 보입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 과거의 기억들, 내 현재의 고민들, 내 미래의 꿈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내 눈에 보이던 주위 사람들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내 눈을 감을 때 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보고 계시지도 않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보고 계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몸을 굽혀 땅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눈은 오직 간음한 여자를 향해 있지만, 예수님의 눈은 오직 땅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서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지금 내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눈을 감아야 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야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내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 김효준 레오 신부
  | 03.20
447 45.6%
정부 출범을 전후해서 한때 청문회들이 있었던 걸 기억합니다. 중계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중에 뉴스거리를 통해 결과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무사히 잘 통과한 후보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질이의심스러운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일반적인 국민 감정과는 달리 정작 후보자들 가운데에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냥 잠자코 조용히 지냈으면 그 동안 이루었던 부귀영화 잘 누렸을텐데 공연히 나와서 벌집같은 상처만 가득 안고 낙마한 후보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재수 없게시리 잘못 걸렸다’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국가 지도자 계층에 거론되는 이들이 군 면제는 기본, 위장전입과 탈세는 필수 등 등의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단지 그들만의 허물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병들어 있는 모습 가운데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 또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또 거기에 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둘러싸이십니다. 한 여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곧 당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죄인으로 끌려왔던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다 어디 갔습니까? 그들은 돌아가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내게 될까요? 그들 역시도 ‘재수 없게시리…’ 하며 투덜댔겠습니까? ‘더 조심해서 절대로 걸리면 안 되겠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내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왜 재수없게 걸렸느냐고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부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는 더 더욱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새로운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죄 짓지 않는 삶입니다. 부러워하는 삶이 아닌 당당한 삶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신 전부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새로운 삶으로 초대된 주인공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대되는 새로운 삶이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일확천금을 꿈꾸는 대박 난 삶이 새로운 삶입니까? ‘나만 아니면 돼’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우리의 새로움입니까? 새일을 하시려는 주님,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그 분과 함께 우리 세상에, 우리 가슴에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하겠습니다. 단죄하시기 보다는 용서하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 또한 더 부지런히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는 거룩한 날들을 향해 나아갑시다. 침 흘리며 부러워하는 삶이 아닌 나눔과 감사의 삶, 그 당당함으로 우리의 날들을 채워나갑시다.

의정부교구 김인석 신부
  | 03.16
447 45.6%
[의정부] 희망의 전달자가 됩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연구를 했는데, 그 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은 사람에게 살아갈 힘,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과 참 희망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희망을 잃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보내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나 사막과 같은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들 듯이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 희망을 가지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위기에 처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여인은 숨겨졌던 자신의 죄가 드러남으로써, 노인에서 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죽이려 덤벼드는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절망의 순간에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사슬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인의 죄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옮아갈 수 있는 희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소외감과 절망감)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이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처럼 실의에 빠지거나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헛된 희망을 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인 희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희망의 전달자로 바로 이 교회를 세상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전달자로 쓰시기 위해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희망의 전달자가 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희망의 전달자가 되어 보면 어떨까요?

▦ 의정부교구 민형기 안셀모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1
447 45.6%
[의정부] 용서와 화해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씁쓸한 마음으로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고 계신 예수님,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는 간음한 여자, 죄지은 여자를 끌고 와 예수님께 처벌을 강요하는 득의양양한 분노 가득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

오직 침묵만이 흐릅니다. 고귀한 생명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 죽음의 어둠이 가득합니다. 죄를 구실 삼아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처지에 놓인 사람, 암울한 죽음의 분위기 한가운데에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외로이 계십니다.

생명을 지닌 소중한 사람 그 자신은 잊혀지고 오직 그가 지은 죄만 남아 있습니다. 죄인 역시 사람일진대, 고발하는 사람들은 오직 죄만 바라봅니다. 죄인은 뭇 시선으로 말미암아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그들이 아니라, 사람을 낳은 어머니 땅을 향합니다.

죽음의 판결을 강요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성난 목소리는 점점 더 모질게 울려 퍼집니다. 간음한 여자의 흐느낌과 가쁜 숨소리가 더욱 애절하게 흩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서 거센 죽음의 외침을 물리치시고, 다시금 생명으로 초대하는 가슴 시린 목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다른 이의 죄를 비난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있으리라 믿는 어리석은 이들, 다른 이에게 죽음의 올가미를 씌움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이제 하나 둘씩, 자신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몸을 낮추고, 다른 이에게 덧씌움으로써 오히려 자신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던 올가미를 걷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모두가 떠난 뒷자리에 용서하는 예수님과 용서받은 죄인이 마주합니다. 참된 속죄와 조건 없는 용서, 그리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 새 생명, 새 삶의 은총으로 가득합니다. 서로를 죽이려던 어둠의 그림자는 거두어지고, 삶 안의 온갖 불의와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거듭 태어나는 아름다운 삶의 빛이 비칩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할퀴며 상처내고 심지어 생명까지 앗아가는 죽음의 문화 한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가 죄를 부르고, 비난이 비난을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우리 삶의 자리의 곳곳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은 이와 용서받지 못한 이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속죄와 아름다운 용서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죄지은 여자와 그녀를 고발하던 군중들 사이의 예수님의 자리에 서 봅니다. 누군가 사람 사는 세상을 얽어맨 단죄와 비난의 사슬을 끊고, 기쁨과 희망 가득한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일구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447 45.6%
[의정부] 사랑은 닮아 가는 것이다.

---------------------------------

우리는 머지않아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신앙인의 준비는 사순시기에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가 지은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는 죄로부터 멀어질 것을 다짐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가 잘 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더욱 크게 내릴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떠나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마도 모인 사람들이 자신들도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와 같은 죄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서 하느님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 때 짓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죄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일화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간음한 한 여인을 몰아세우고는 그녀에게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한 여인이 큼직한 돌을 집어 들고 그 간음한 여자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살짝 당황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막아서며 말합니다. ‘어머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참 유머러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고해소에 앉아 있으면 가끔 이런 성모님과 같이 자신의 죄를 찾을 수가 없다는 신자를 만나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 신앙의 여정 가운데 어둠에서 빛의 삶으로 변화되는 회심의 길은 죄를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사순시기의 마지막 지금이라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합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그분의 생각과 행동 방식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

의정부교구 안종찬 나보르 신부 : 2019년 4월 7일
  | 04.0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19   [의정부] 꿈나무, 땔 나무  [3] 2361
718   [군종] 고통과 역경을 통한 진정한 부활 신앙  [2] 1969
717   [수원] 진실과 증거  [5] 2212
716   [안동]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26
715   [부산]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5] 2263
714   [마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4] 2340
713   [대구] 우리도 함께 가겠소  [4] 2235
712   [인천] 부활은 새로운 시작  [3] 2236
711   [서울]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83
710   [대전] 우리 곁에 살아계신 주님  [1] 1975
709   [청주] 주님과 함께라면  [1] 138
708   [춘천] 말씀에 귀 기울여라  [2] 2272
707   [원주] 일상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100
706   [광주] 증거하는 삶  2180
705   [전주] 일어나시오.  [2] 106
704   (백) 부활 제3주일 독서와 복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2] 1913
703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 2159
702   [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3] 2212
701   [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3] 2299
700   [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25
699   [인천] 사람을 믿어도 행복한데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2] 2182
698   [대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477
697   [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4] 2117
696   [안동] 문제가 없으면 그게 문제  [2] 1980
695   [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3] 2186
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87
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1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98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4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4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7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1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5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1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3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5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0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1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69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