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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조회수 | 2,063
작성일 | 07.03.28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거기서 벌어질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을 미리 기념토록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사건의 마지막 순간인 이번 한 주간은 길지 않은 예수님 생의 결론이자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 이루어질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실천하셨던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은 곧 우리의 예수신앙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부활)은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여 얻는 길이었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에 동참하는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루카 복음의 수난사를 따라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여정을 걸어봅시다.  

루카의 수난복음은 최후만찬으로 시작합니다.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빵을 떼고 잔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죽음의 삶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행하라 하신 것은 결국 무엇일까요? 자신을 쪼개고 떼어 나누는 일입니다.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의례가 지칭하는 그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가를 따지며 다툽니다. 스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는 죽음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은 그 죽음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세속적 가치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은 결국 낮은 사람처럼 처신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이 추구하는 하느님나라의 가치관은 제자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최후만찬을 하시고 난 다음 게세마니라는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마시고자 하는 잔은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도 인간적으로 번민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끝내 예수께서는 아버지 뜻에 자신을 모두 맡깁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가기로 작심합니다. 곧이어 제자 유다가 이끄는 일단의 무리가 예수를 체포하러 옵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끌려갑니다. 예수를 성전에 감금하고 지키던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때리며 조롱합니다. 갖은 욕설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예루살렘입성 때 환호하고 찬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지고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예수께서는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날이 밝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산헤드린 의회를 엽니다. 예수를 끌어내 심문합니다. 의회의 심문요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의회의 결론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의 변명이나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의회는 사형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데리고 갑니다. 지도자들은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반란선동 혐의로 고발합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고서 그가 모반을 꾀할 인물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은근히 빌라도를 압박하며 예수를 처형할 것을 종용합니다. 백성도 아우성칩니다. “십자가 형이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악을 써가며 고함을 지릅니다. 결국 빌라도는 폭동과 살인죄로 갇혀있던 또 다른 바랍바 예수는 놓아주고 나자렛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넘겨줍니다. 이렇게 예수께 내려진 사형언도는 막힘없이 간단히, 그것도 속전속결로 처리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한 때는 구름처럼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고 그분이 가실 길을 가로질러 찾아 나서기도 할 만큼 사람들의 인기와 총애를 받던 분이 아니던가? 예수를 처단하라고 외치는 백성의 돌변한 모습을 단순히 지도자들의 선동 때문이라든가 순간적인 군중심리와 격앙된 감정 때문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줄곧 외쳤던 하느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가치관, 인생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라, 다시 나라, 하느님사랑과 사람사랑이 둘이 아니다, 원수도 사랑하라, 바라는 대로 해주라, 거룩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등 예수께서 강조하신 것을 수용하고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큰 자기포기가 따르기에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께서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실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종국적, 근원적 해방과 자유를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단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가치관, 구원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형언도가 내려지자 사람들은 예수께 형틀을 지우고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사형장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는데 그 가운데는 예수를 보고 통곡하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하십니다. 해골산이라는 형장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세워놓고 다른 죄수 둘도 예수의 좌우편에 세워놓았습니다. 예수를 못박은 자들은 예수의 옷을 나누고 예수를 조롱하며 신 포도주를 권하며 빈정거렸습니다. 또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붙여졌습니다. 오후 3시쯤 되어 예수께서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승낙을 받고 시신을 내려 고운 베로 싸고 자신의 무덤에 안장하였습니다.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다른 장례절차를 따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여자들이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이로써 예수사건은 모두 끝났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외쳤던 사랑과 진실과 정의가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실증입니다.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예수의 그 신념이 놀랍고 그것은 마침내 부활이라는 영원한 확인을 이끌어 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이라는 희망을 일깨워 주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따라 십자가길 가면 언젠가 부활에 이를 것을 믿습니다.  

▶ 조창래(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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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당신을 위해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것

모든 것이 끝장 났습니다. 찬란한 태양도 빛을 잃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소리치던 군중의 그 함성도 이슬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적뿐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 오실 때에 기쁨에 넘친 함성은 온 대지에 울렸고, 천사들의 노래는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할 때 당당하던 그 모습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시골 마을 나자렛에서 묵묵히 일하시는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웃음 속에서 성부의 반기시는 말씀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처량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니지요? 아니겠지요? 우리가 허깨비를 보는 것이겠지요? 사람보다 못한 벌레 취급을 받으시고 온갖 발길질에 야유를 들으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 받는 이들과 함께 거닐면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실 때 그 놀라운 모습은 어디에 갔습니까? 배를 부서뜨릴 것처럼 보이던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그 힘은 도대체 어디로 살라졌단 말입니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목놓아 불러보아도 아버지마저 외면하시니 정녕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까? 왜 아무 말도 없으십니까? 아버지도 침묵 속에 아무 말도 아니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옷 벗어 나귀 발굽아래 깔고, 성지를 흔들며 우리의 임금님이 오셨다고 소리지르던 군중들의 함성도 이제는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절대 당신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던 베드로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도 이제는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삭막한 땅, 썰렁한 찬바람만 몰아치는 골고타 언덕에는 힘없이 축 늘어진 처절한 당신의 모습만 있을 뿐입니다. 희망도 사라지고 꿈도 사라지고 기쁨도 끊어진 채 해골산 마루턱에 십자가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십자가는 사랑이요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과 죄 많은 우리 인간이 하나되는 자리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모아진 곳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봅니다. 인간의 한 운명을 봅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산고의 고통이 있어야 하고, 한 인간이 성장하고 철이 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을 맛보아야 함을 압니다. 그래서 고통과 좌절 속에서 고독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아버지를 불러 본 사람만이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야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압니다.

삭막한 언덕 위에 걸쳐있는 두 개의 나무가 교차하는 곳에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짐을 봅니다. 거기에 영원한 사랑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남편의 고통 속에서도 아내의 이해가 있는 곳에, 아내의 고통 안에서도 남편의 이해가 있는 곳에, 자식들의 고통 속에서도 부모의 이해가 있는 곳에는 화해가 있고 사랑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 이제사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임을, '당신을 위하여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주님! 언제나 자기를 방어하고 사소한 일에도
누구에게나 지려고 하지 않고
승자의 오만 위에 곤두서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죽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자아에 죽지 않으면
불사신의 사랑에 소생될 수 없음을
예수여! 우리에게는 당신의 굳셈보다는 약함이
무한한 약함이 필요합니다.
저주를 당해도 항거치 않고
넘어뜨림 당해도 비난치 않고
죽임 당해도 원망치 않는
사랑에 찬 약함이 필요합니다.
지옥의 죽음도 이길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약함이
이웃에게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늘 머리를 쳐드는 나의 오만을
당신의 약함으로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 김시영 베드로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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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정의롭고 자비하게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종로의 시전에서 위세 높은 상인과 시비가 벌어져도 아무소리 못하다가 한강의 난전에 가서 힘없는 상인에게 화풀이한다는 뜻입니다. 분노해야 할 대상 앞에서는 저항하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 앞에서는 호통을 치는 모습,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면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사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런 세상의 불의, 세상의 죄로 인해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음을 묵상해보게 됩니다.

수석사제, 율법학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최고의회는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소합니다. 그분이 백성을 선동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루카 23,2)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가던 로마제국에게 자신들의 동족인 예수님을 죄인으로 고소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행여나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을 받을까 두려워 그토록 미워하던 로마 제국의 총독에게 충성스럽게 나가 외세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특별한 죄목을 찾지 못한 빌라도는 갈릴래아 출신인 예수님을 당시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궁금해하던 헤로데는 호기심으로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12)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던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주며 동료가 된 것입니다. 악에 물들면 또 다른 악과는 쉽게 타협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타협을 하여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 힘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권력을 다지는 일에만 관심을 쏟을 뿐입니다.

빌라도는 여전히 사형을 내릴 만한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풀어주려고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군중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제는 증오와 분노에 넘치는 성난 군중들의 목소리만 남았습니다. 정작 자신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온갖 율법의 굴레로 죄인으로 만든 지도자들, 하느님 신앙을 저버리고 외세의 힘에 기대어 백성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를 했지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예수님께 온갖 분노가 쏟아집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힘없이 처형되셨습니다.

세상살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과 감사할 일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과 화가 나는 일도 경험합니다. 권력과 재물의 탐욕에 물든 세상의 악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흐려 놓곤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중요한 가치들을 저버리게 하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삶을 왜곡시킵니다. 소비적이고 자극적인 일들에 관심을 쏟게 하며 이해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할 곳에 갈등과 분노를 조장하곤 합니다. 정작 분노해야 할 일 앞에서는 침묵하게 하고, 환호해야 할 일 앞에서는 분노하도록 만들어갑니다.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정의를 말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올바른 식별력을 가진 현명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악을 하느님의 정의로움으로, 사람들의 분노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정의롭게 살아가며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입니다.

▦ 안동교구 안영배 요한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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