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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제3의 시선
조회수 | 1,918
작성일 | 07.03.28
체코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평온한 삶을 살던 한 개인이, 그가 속한 공동체, 집단,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곡해되어지고 소외되어지다가 결국 제거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그의 저서 <변신>이라는 소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레고르라는 젊은이, 그의 할 일은 가난한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이 거대한 벌레가 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너무도 당혹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가족들이 그런 벌레가 된 자신을 애써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면서 자신이 그레고르라고 항변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애절한 몸짓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인한 침묵으로 외면합니다. 결국 벌레로 변한 자신을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을 외면하는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미미한 슬픔을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이쯤해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단지 ‘사람이 벌레로 변했다’ 황당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의미를 되씹어보면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주간을 여는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깊은 일대 드라마틱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 역사의 현장에서 난무하는 수많은 말과 댓글, 여론에 의해 짓눌려서 그 책임의 소재를 물을 길 없이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수난기를 낭독하면서, ‘결코 나라면 그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라며 ‘그들의 시선’이 아닌 ‘제 3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과연 그럴까?

눈에 보여 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말이나 댓글, 때로 눈빛으로라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 죽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한 개인의 삶을, 한 집단이나 민족의 삶을 잔인하게 짓밟고 유린하면서도 ‘이것이 바로 세상이다’로 여기게끔 하는 분위기와 여건 속에 우리는 실제로 당하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때로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때로 침묵하는 방관자의 모습으로 서있는 건 아닐까?

성주간을 시작하며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몸이 머물러야 할 곳,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제 3의 장소, 제 3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바로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며, 신앙인의 눈으로 우리 모두 거듭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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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서석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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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바라보라

유대 백성들은 개선장군이나 임금님을 환영할 때 하듯이 손에 빨마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성지주일(聖枝主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던 유대 백성들이 며칠 새에 돌변하여,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오늘을 수난주일(受難主日)이라고도 합니다.

수난 주일을 맞는 오늘 복음은 빨마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이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뺨을 때리며 온갖 조롱을 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도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도 떠나고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들마저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던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제자들에게는 그런 의리마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실패로 보였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마저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겠노라고 서약하고, 그분을 기꺼이 “주님”이라 부르지만 막상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형제들과 불편한 관계가 생겼을 때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고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때로는 고통이 마치 믿음의 탓인 양 그래서 주님을 외면했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순절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곧잘 바쳐왔지만 매일 매일 삶 안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주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외면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뜻하지 아니하는 불행스런 일들과 고통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몇 번씩이나 넘어지게 됩니다. 주님도 세 번씩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우리도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솔직히 겸손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예수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 한기호 세례자 요한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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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당신의 선택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다. 전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도 상반되고 극명한 이 이야기들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쩜 이토록 쉽게 돌아서고 다른 모습을 보이는가? 라고 묻게 된다.

약자의 편에 서서 외쳤고, 병자들을 치유했으며, 나아가 빵으로 배를 채워주셨던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자신들의 해방과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금방이라도 커다란 일이 일어날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다름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왕,곧 자신들의 궁핍한 현실과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이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힘없이 잡혀가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고, 자신들이 처했던 현실적 어려움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무능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을 향한 원망이고, 여전히 그대로인 고단하고 험난한 세상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준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분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를 버려야 할 것인가?, 또 비록 힘겹지만 하느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하는가? 아님 비겁하지만 잔인한 현실에 타협하고 교활하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그들은 둘 중 하 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들이 무엇을 선택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고 있다.

얼마 전 아침 불법 영양주사에 대한 내용을 다룬 방송을 보았다. 방송은 전직 간호사가 개인이나 가정에 찾아다니며 영양주사를 놓는 내용으로 자칫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조금은 평범한 보도였다. 그러나 방송에서 마지막 인터뷰는 몇 가지 생각할 꺼리를 주었다. 보도 말미에 기자가 불법 의료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시는 것 불법이지 않나요?” 그러자 그 사람은 당연하듯 “요즘 세상에 법을 지키며 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어려워진 세상이다. 먹고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구나! 라는 생각에 한편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라면 법도양심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씁쓸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정의, 올바름, 양심에 따른 행동보다는 현실적 생존이 더 우선시되는 세상임을,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지극히 당연시 되어가는 세상임을 말이다.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때이다.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힘겹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쫓아 살아갈 것인가? 아님 비겁하지만 현실에 타협하고 교활하게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보내며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전주교구 성현상 스테파노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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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성주간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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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면 참 많은 집회를 만납니다. 주장도 다양하고 또 다양한 만큼 집회를 해야 하는 이유도 많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반드시 뜯어고쳐야 할 것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제도에 분노하기도 하고, 불의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이유로 집회를 합니다. 국회의원도 시위를 하는 세상이니 시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그 많은 집회를 바라보다 보면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있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 표현들이 강하고 더 나아가 살벌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집회에서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텔레비전을 보는 분들의 얼굴과 표정을 보면, 그리고 그분들의 표현을 보면 굉장히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 많은 것 같습니다.

화가 나 있습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화가 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소식을 접하다 보면 언제나 긴장이고, 전쟁이고, 경쟁이고, 위기이고, 사태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는 거의 모든 정보들이 그러합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제 기준에 옳은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 전하는 정보도 화가 나게 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가끔이 아닌 자주 일어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사고들이 왜 이리 자주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유도 없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폭행해 숨지게 하고, 길거리 가다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싸움이 벌어지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웃었다고 욕설을 하고, 그냥 기분이 나빠 칼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을 찌르고… 나름 전문가들이 이런 현상을 분석하고 해석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정치를 한다는 분들도 국민들을 화나게 하고, 종교인도 학식을 갖춘 학자들도…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어서, 또 없으면 없어서 화가 나 있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걱정되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이 글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고, 그래서 그 생각 때문에 결국 화가 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염려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예수님이 오늘 들어가시는 예루살렘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지는 않았을까?’입니다. 그곳이 화려하면 할수록 또 많은 사람이 모여 살
아야만 하는 곳이고 그렇게 중요한 장소였다면, 그곳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무척 화가 나있지 않았을까요? 그 도시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조차도 화가 나 있는 세상… 그 도시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이 선택하신 해결책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이 없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지, 오히려 그렇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고 화풀이할지.

가장 힘없는 분이 선택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그 길을 따라 걷는 한 주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에게 부활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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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영태 토마스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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