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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조회수 | 2,115
작성일 | 07.03.28
오늘은 주님의 성지주일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2000하고도 한 번째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준비운동에 들어가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부가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장난치신다고 꾸중하실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매 년 하는 행사의 하루를 지나고 있는 듯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게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순 제4주일 때에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강론을 이런 대화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잠시 재현해 보겠습니다.
  
"얘들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지가 얼마나 되셨지?" "2000년요". "그런데 어제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매달려 있으시기 힘드시다고 내려오고 싶으시데드라". 아이들 묵묵부답.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시려면, 누가 대신 매달려야 하는데, 매달릴 사람?" 묵묵부답. "그럼 내가 매달릴까?" 아이들 전체가 큰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예!!!" 그 대답을 듣는 순간의 아연함이란 말입니다. 저 녀석들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서도 그렇게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과 솔직히는 일말의 서운함도 함께 들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건을 계기로 저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신자도 아닌 아가씨들의 악세사리의 일종으로 자리잡고 있는 십자가. 그 가녀린 목이나 귀에 달랑거리고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저 아가씨가 저 의미를 알면 십자가 목걸이, 귀걸이는 다시는 안할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점점 커져가는 교회의 첨탑과 그 안을 장식한 화려하고 커다란 십자가를 볼 때도 과연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저토록 크고 화려한 십자가로 계속해서 성전을 꾸미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우리는 공부 잘 못하고 말썽부리는 아이의 부모들이나, 술로 날을 지새우는 남편이나, 늘 잔소리 심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볼 때, '아이구 내 팔자야!'를 속으로 되뇌면서 그래도 이게 내 십자가라면 지어야지 라고 말하곤 합니다. 언제부터 팔자가 십자가가 되었는지 그 유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질 각오'라는 구호가 생긴 유래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 당시, 힘으로써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젤롯당'(열성당원)들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이는 로마 집권자들의 손에 정치범으로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당시 로마정권이 반로마 항쟁가들만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곁에서 함께 처형된 소위 '강도들'은 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집권자들에 대한 항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은 언제나 안정을 희구하고 새 것을 싫어하며, 어떤 형태로나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상을 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함'은 죽기를 각오로 하라는 지상명령에 진군나팔로도 읽혀집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 새 가치관, 새 윤리관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데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 정필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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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오늘 들은 루가복음서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하는 일이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인하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최후만찬에서 유언을 남기십니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또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 잔은 그대들을 위해 쏟는 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탁에서 서로 다툽니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툽니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부터 줄곧 다투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남을 지배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런 강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그대들 가운데 시중드는 사람처럼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 자녀의 처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곳에는 폭력과 좌절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곳에는 사랑과 희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지배하지 않고 섬겨서 생명이 자라게 합니다. 효도, 부부애, 우정, 이런 것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모두 섬겨서 생명을 보살피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돈 몇 푼을 받기로 하고 스승을 잡아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스승을 모른다고 공언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쉽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이 소중하여 이웃을 배신하고 버립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찾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영달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이 지닌 이중성을 신물 나게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는 일을 예사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던 이교도 지배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는 로마총독만이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란 선동죄로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우리고 보니 이자가 우리 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 하였습니다.’ 유다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거슬려 선동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런 고발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정치범이 되었습니다. 점령하고 통치하는 로마 총독이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반동분자입니다. 식민지 유다의 지도자들은 오늘 점령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제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그 생명을 없애 버리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민족적 자존심마저 버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 판단하고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은 죄인을 미워하고 벌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사랑하고 자비하신 분이었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준 제도였습니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다반사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맞서는 자들을 미워하고 짓밟고 죽입니다. 미움은 남을 먼저 죽이고, 자기 자신도 영원히 죽는 악마적 힘입니다.

루가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낸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어서 복음서는 말합니다. ‘전에는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 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 헤로데는 젊었을 때 로마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총독인 빌라도는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날 예수님을 결박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제삼자를 함께 미워하고 짓밟으면서 쉽게 동료 의식을 갖습니다. 흔히 제삼자에 대한 우리의 입방아는 우리끼리 동료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군중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빠를 택합니다. 바라빠는 폭동과 살인죄로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은 폭동과 살인을 범한 자보다 더 괘씸한 죄인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권좌에 앉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분노를 느낍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고 벌하고 죽이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시면, 그들 안에 소용돌이치는, 미워하고 죽이는 힘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라고 확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과연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을 넘어서 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라고 기도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살리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살리셨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재물과 권위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소중히 지키는 수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자비와 미움의 힘을 동원합니다. 섬김과 용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여 행하는 성찬은 이 섬김과 용서를 인류역사 안에 살아 흐르게 합니다. 그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섬김과 용서를 몸짓으로 역사 안에 현실로 살아있게 합니다.

▶ 서공석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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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오늘 전례에서는 영광과 수난, 찬미와 배신이라는 상반되는 두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찬미 받으시고, 군중들은 임금님께 드리는 환호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은 결박당하고 매 맞고 고문당하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처절한 모습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던 예루살렘 군중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부추김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무서운 군중으로 변합니다.

본당에서 수난 복음을 봉독할 때 신자들이 목청껏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을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던 적이 있습니다. 좀 전에 구세주가 오신다고 열광하던 바로 그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나 봅니다. 그러나 저를 더욱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 배신과 고발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외침은 당장 오늘날의 외침으로 변합니다. 남들은 잘도 살더니만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는데 나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침묵하고 계신 예수님을 나는 고발하게 됩니다. 이런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는 힘없는 예수님은 하느님도 아니니 십자가형에나 처하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첫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에 관하여 매질하는 자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기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둘째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신분이면서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나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잔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발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신 길을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이 들고 고통스럽게 여겨질 때 신세 한탄이나 하느님을 원망하고만 있다면 2000년 전의 예루살렘 군중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방식 즉 십자가의 길을 이해할 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고 이때 우리의 참된 신앙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까?

▶ 이장환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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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정녕 의로운 분이셨다

오늘 전례의 성대한 입당식에 나오는 복음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하게 환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지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미사의 복음에 가서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기인데 여기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것입니다. 인간의 변덕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돋보이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로마군대의 백인대장이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정녕 의로운 분이셨다.”라고 말합니다. 백인대장의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던 율법학자와 경건하다는 바리사이들과 대립하여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던 예수님을 사람들은 결코 곱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고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와중에서 예수님의 의로움을 고백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도 백인대장과 함께 예수님을 의로운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로움을 보고 있는지요? 우리 사회에는 정부의 불의를 고발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 재개발이라는 것 때문에 박탈당한 생존권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다 죽어간 사람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고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과 복직을 위해 단식하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의롭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의로움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의로움을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때 인간의 그 변덕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의롭게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바로 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다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로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김두완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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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과 인간의 마음이 다름

교회는 오늘부터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 신자들이 거룩하게 지내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여정을 준비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예식에는 환희와 비애가 동시에 섞여 있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복음에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제자와 군중들의 호위와 환호를 받으면서도, 한편 곧 당하셔야 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비애가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깊이 느끼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의 마음과 뜻이 하느님과는 너무도 다름을 묵상합니다.

사람들은 메시아이시며 왕이신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 38)

그러나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영광과 환영받으심을 크게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군중을 선동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군중 속의‘나’도 감정 변화가 심합니다. 배운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주님을 배신하고, 비유적이긴 하지만 군중과 군중 속의‘나’도 예루살렘 입성 때 외쳤던 환호와 기쁨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비아냥거리고 저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뿐 아니라“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며 날뛰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다가오면‘주님을 모른다’고 말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묵상해보면 하느님은 구원의 약속에 충실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불변하신 분이고, 그분은 항상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오직 인간 구원을 위해서 어떠한 유혹에도 걸려 넘어지시는 분이 아니시며, 십자가를 지시고 극심한 고통 중에도‘나 때문에 울지 말라’고 위로해주시는 분이시며,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어도 오직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통해서 인류의 죄악을 씻어주셨고 죄의 용서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군중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성지 주일의 상징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영원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전례를 통해서 나뭇가지만 손에 들고 환영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부활을 준비합시다.

▦ 부산교구 김두유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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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십자가 위에 우리 구원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 종종 겟세마니를 들르곤 했습니다. 지금도 큰 덩치의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는데 올리브 나무가 대략 1000년 정도까지는 산다고 하니 이 나무들 부모님 대쯤 예수님이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올리브 산을 넘어 베타니아로 도망가지 않으셨을까?’

겟세마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타니아는 예수님이 사랑하던 마리아, 마르타, 라자로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베타니아에 머물며 예루살렘을 오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날 밤에도 베타니아까지만 물러나셨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마치 베타니아로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씀처럼 들리곤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 모습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겨내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십자가를 선택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일찌감치 예수님을 배반했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도망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구약의 예언에 따라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셔야 할 어린양이었음을 깨달은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죄수 한 사람만이 예수님이 무죄하신 분임을 고백하며 구원을 청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모습, 구원자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외면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무죄하심을 고백한 죄수도 인간적인 눈, 이성적인 판단으로 고백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고백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이끄심 없이는 그 누구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에게서 우리의 구원이 나온다고 고백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1코린 12,3).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죽기 직전 예수님께 구원을 청한 죄수는 정말로 복된 인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죄수 이야기를 통해 수난기를 읽는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해도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하느님 나라, 곧 낙원에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지금 주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며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주님이심을 더욱 굳건하게 믿고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유다나 다른 제자들처럼 배반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 죄수처럼 주님께 구원해 주십사 매달리는 겸손한 용기를 청합시다. 십자가 위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음을 기억하며, 올해도 부활절을 잘 준비합시다. 이렇게 매년 성주간을 충실히 지내며 살아가다 보면, 죄인인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각자가 지고 있는 삶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은 뒤 그분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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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87
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1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98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4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5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7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2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5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1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5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1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1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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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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