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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조회수 | 1,971
작성일 | 07.03.28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부활 대축일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한 주간은 부활 대축일을 향해서 나아가는 성주간으로 그 중에서도 절정인 성삼일은 유다의 배반과 최후의 만찬,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극적인 부활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처형이 있기 이전에 예수님 수난이 시작되는데 오늘이 그 시작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부활이 있기 전에 참혹한 시련인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차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예수님 말씀대로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런 고통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고통을 자초했고 성경은 이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를 잃어버린 이 원죄 상태에서 우리는 분열과 고독, 죄책감 등 불완전한 감각을 얻고 불행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원죄를 극복하고 원죄 이전의 에덴동산으로, 즉 부활의 영광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크고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지고 남들의 십자가는 모두 대수롭지 않은 가벼운 것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는 너무나 무겁고,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는 작다고 하느님께 투덜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 십자가를 바꾸어 주마."

그러고는 그에게 맘에 드는 다른 십자가를 고르라고 하시며 십자가가 가득한 창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좀 가벼워 보여 들어보면 그것도 무겁고, 작다 싶어 지어 봐도 그것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르고 고르다가 그는 번쩍번쩍 금으로 된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가운데에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눈부시게 아름다운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 골랐습니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자기가 고른 보석 십자가를 냉큼 짊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그 십자가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해서 어깨 살갗이 벗겨지고 다리가 저려왔습니다.

"아이고, 주님, 너무 무거워서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그래? 바꾸어 주마."

그는 심사숙고하여 십자가를 골랐지요. 이번에는 아주 가볍고 향기로운 장미화관 같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십자가를 지던 그는 곧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얏! 따가워."

이번 십자가는 향기도 좋고 가벼웠지만 가시들이 사정없이 찔러대었던 것입니다.

"아이고, 주님, 이것도 안 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세요."

그는 들어보고 내려놓고, 들어보고 내려놓고 하며 이거다 싶은 십자가를 하나 골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으로 들고 갔습니다.

"하느님, 드디어 골랐습니다. 가벼운 십자가로 바꿀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웃으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 십자가는 처음에 네가 졌던 바로 그 십자가란다."

그렇습니다. 내 십자가는 무거워 보이고 남의 것은 다 가벼워 보이는 것이 연약한 우리 마음의 속성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거부하고 외면하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외면하고 돈의 유혹에 빠져서 다른 길을 찾아가다가 멸망의 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나의 십자가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분신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주간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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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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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와 사랑

1. 성서이야기

제1독서(이사 50,4-7)는 제2이사야의 중심 주제인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온갖 욕설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는 야훼의 종은 오늘 복음인 수난사화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제2독서(필립 2,6-11)에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이 서로 다투지 말고 일치할 것을 촉구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즐겨 부르던 그리스도 의 겸허한 찬가를 전해 줍니다. 교우들이 서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겸허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두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22,14-23.56)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기록한 예수 수난사입니다. 예수 수난사는 네 복음서 모두에 들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서가 원형이고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의 수난사를 참작하여 나름대로 편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 30년 4월6일 저녁 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어느 이층방에서 마지막 식사를 드신 후 올리브 산기슭에 있는 게쎄마니로 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살고 싶지만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 뜻을 따르겠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스가리옷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어 최고의회에 끌려가 밤새도록 심문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독성죄인으로 처형하기로 의결하고 사형언도와 집행권을 가진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임을 알았지만 군중들의 힘에 의해 할 수 없이 십자가형 언도를 내립니다. 예수님은 30년 4월7일 정오쯤에 골고타로 가서 1시쯤에 처형되고 3시쯤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시편 22장2절의 기도를 바치면서 운명하셨습니다. 4월7일 금요일, 해가 지면서 안식일 겸 과월절 이중축제가 시작되므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총독의 허락을 받아 서둘러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표면적으로는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이 지녔던 위기 의식과 제도권 교회의 붕괴 위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지만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내려져 있어서 오직 대제관만이 일년에 하루, 속죄의 날에 지성소에 들어가 숫송아지와 숫염소의 피를 받아 뿌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휘장은 하느님과 인간, 성스러움과 속됨, 영원과 시간을 가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인 대장의 “이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으로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만백성에게 당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보편성이 열리는 순간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와 사랑의 극치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룩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인간 구원의 원동력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 한 주간을 성주간으로 지킵니다. 우리 모두 성주간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하느님의 베푸심과 용서와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묵상하고 부활을 맞이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2001년 4월 8일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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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을 울리며

예수님의 일생이 정점을 향해 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사람들이 지은 죄의 벌을 대신 뒤집어쓰고 죽으실 시간이 다가옵니다. 구세주의 역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건인 죽음과 부활이 마치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긴박하게 펼쳐지려고 합니다. 이 드라마의 서곡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고, 본론은 십자가형을 당하여 죽으시고 묻히심이며, 결론은 부활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성주간의 첫날인 오늘 교회는 장엄하게 서곡을 울리니, 이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시는데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환영하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철없는 아이들과 단순한 군중은 예수님을 왕처럼 맞이합니다. 며칠 뒤에는 자신들이 돌변하여 죽이라고 외치고 결국 “유다인들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집행을 할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손에 푸른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전례의 복음이 두 개나 된다는 점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입성 기념 예식을 하면서는 이 대목의 복음(루카 19,28-40)을 읽고, 미사를 진행하면서는 예수님께서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숨지고 묻히시는 대목의 수난 복음(루카 22,14-23,56)을 읽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미 서론에서 수난이라는 본론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서곡이란 본래 이렇게 본론의 내용을 담고 있는 법입니다. 며칠 후 목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이별하게 될 것을 아시고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영원한 기념 선물을 주셨는데, 바로 당신의 살과 피로 축성한 빵과 포도주의 성사였습니다. 이 식사 후에 올리브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에 유대인들의 손에 잡히셔서 밤새 고문으로 시달리시고, 금요일 아침에 로마 총독에게 넘겨지셨습니다. 온갖 모함이 난무하는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셨으며, 12시경에 못 박혀 달리셨다가 오후 3시경에 숨지셨습니다. 친지들은 그분을 형장 근처의 돌무덤에 안장하고 로마 총독은 무덤 입구를 봉인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실패한 인생 이야기가 끝나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는 이 사건의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역전극이 부활로써 끝맺어진다는 것을…. 이 역전 때문에 우리는 오늘 전례에서 이 드라마의 서곡을 기쁘게 울립니다.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서곡만 울리고 마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본론을 함께 꾸며 가야 결론도 함께 꾸밀 수 있습니다. 이 주간에 진행되는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에 참여하여 주님의 살과 피의 성사를 함께 나눕시다.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함께 아파합시다.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며 주님의 초상을 치릅시다. 마침내 역전의 기쁨이 용솟음치는 부활을 맞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자, 이제 서곡을 울립시다!

▶ 백남용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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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우리 인간들이 사는 지상으로 파견하셨습니다. 아드님이 부여받은 사명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사해주고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파스카 축제 때 바쳐지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때’가 다가오자 아드님께서는 긴 여정(루카 9,51~19,27 참조)을 마치고 제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혁명을 일으켜 강력한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리라는 제자들의 장밋빛 희망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
을 내쫓으시고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다처럼 적극적으로 처신하기로 마음먹은 제자는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찾던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는 이들의 증오에 찬 시선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대에 예수님께서 과연 부응해주실 수 있을까 하는 제자들의 불안에 찬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또박또박 자기 길, 곧 ‘수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예수님의 확신에 찬 모습과 제자들의 흔들리는 불신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사실 수난의 길을 예수님이라고 마냥 기쁘게 걸어가지는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친 예수님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와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진 예수님의 땀은 예수님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자신의 수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 남기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십자가는 위대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저는 정성과 사랑을 다하여 최상의 지혜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가르침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저는 이 위대한 책을 척도로 삼아 세상의 일들과 지식들을 판단하는 습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보통 희망하는 유쾌하고 유복한 생활과 정반대의 삶을 상징합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자기 삶의 척도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과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기를 십자가는 요구할 테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일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문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주간 동안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을 따라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 신희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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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통 없는 기쁨, 희생 없는 사랑이 있나요?

왜 하느님의 아드님이 고통을 겪으시고, 죽음을 감수하셨을까요? 신적 존재란 죽음도, 고통도 겪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요? 성경은 우리 인간의 고통과 죽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왜 고통과 죽 음이 필연적인 것일까요? 고통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는데 아무런 가책도 아픔도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죽였는데 죽은 사람도, 나도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 닙니다. 자녀가 밤늦게 돌아오는데, 남편이 직장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데, 아내가 병으로 힘들어하는데 나는 아무런 아픔도 걱정도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그들을 사랑한 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만큼 고통을 겪게 되어 있나 봅니다. 우리 사는 인간 세상은.

혹자는 고통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여행을 시키랍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니까요. 사실 훌륭한 인물이란 고통스러운 일을 잘 겪어낸 사람들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고통 속 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 스스로가 잘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연필을 깎다가 실수해서 손을 베이는 아픔을 겪습니다. 운전을 잘못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내가 잘못하든, 다른 사람이 잘못 하든, 그것이 도덕적이든, 물리적이든 그 결과로 고통이 닥칩니다.

나의 잘못도, 다른 사람의 잘못도 아닌데 닥치는 고통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그러고 보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인가 봅니다. 대속의 의미도 있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7-28) 희생의 의미 도 있습니다.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가 말합니다. “이 세상이 살만하다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주 편리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먼 거리를 빨리 갈 수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 휴대폰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의 노력과 피땀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힘들고 불편하다면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죄악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 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희생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의 희생보다 더 큰 아버지 하느님의 희생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무엇보다 우리 인간 세상의 고통이 왜 있냐는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서울대교구 총대리 조규만 주교 : 2016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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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은 죽었다!’

2000년 동안 교회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숨을 거두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인간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 죽음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1. 고통 속에 헐떡거리다 숨이 잦아들어가는 소리

십자가 위에서 꽤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헐떡이던 숨소리도 이제는 많이 잦아들었습니다. 이제 곧 숨을 거두시려나 봅니다. 아무리 봐도 정치범이 아닌데 십자가의 사형수가 된 예수님이 어제 저녁 식사 후 붙들려 와서, 한밤중에 로마제국의 총독으로부터 사형 언도를 받고 이렇게 삽시간에 사형이 집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변호해 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말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군인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길에서 여러 번 쓰러지셨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같이 십자가를 거들어 지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못이 손바닥에 박혔는지, 손목에 박혔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아픕니까? 사람을 한 자리에 오랫동안 가만히 세워둬도 힘들 텐데, 못을 박아 십자가에 몸을 고정하고 죽기를 기다리니 얼마나 잔혹한 사형 방법입니까?

이제는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 울부짖던 울음소리도 사라지고, 헐떡이던 숨소리도 잦아들고 있습니다. 숨을 거둘 때가 됐습니다. 하느님이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2.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왜 정치적 활동도 하지 않은 예수께서 이런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자살은 아니지 않은가? 과연 하느님을 모독하였는가? 모독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그럼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많은 환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내쫓으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의 기적을 이루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 예수님이 아니신가? 그분이 하신 활동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닌가? ‘성령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셨다.’

어찌 된 영문인지 활동 초기부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자꾸 죽이려고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 전적으로 투신한 결과로 이런 몹쓸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와 교회에서 자발적인 섬김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흔히 되돌아오는 결과는 때로는 혹독한 시련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스승님께서 먼저 이런 험한 꼴을 당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그 원죄의 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처럼 되려는 유혹’에 빠져 하느님과 함께 살던 그 행복한 낙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죽음까지 겪으셨기에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이방인을 통해서도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죽으시면서 완전히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 겸손은 인간을 구원하는 겸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려고 할 때,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의 이 겸손은 인간을 구원하는 도구가 됩니다.

4. 오늘도

오늘도 세상 도처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갑니다.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갑니다. 의로운 사람들의 죽음도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느님은 그들의 운명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최선의 방법, 완전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매일 제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피 흘림 없는 십자가의 제사를 바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현장에서 함께 죽어가면서 십자가 제사를 바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님을 믿습니다. 미사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고 주님과 하나가 된 우리도 그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스승님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우리는 이 하느님 죽음에 동참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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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 손에 완전히 내어 맡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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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聖枝) 주일입니다. 이와 함께 시작되는 성주간 동안 수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과 긴밀하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난복음을 읽는 것도 그 자체로 이미 삶의 응답이요 신앙의 행위입니다.

시몬에 관하여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루카 23,26)고 쓰여 있는데, 이는 보통 제자들의 임무를 정의하는 표현입니다. 시몬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루카 9,23)는 가르침을 따르는 모범이 됩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이 행위는 수난기의 끝에서도 반복됩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심지어 백인대장도“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용감한 증거의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개인적 파국 이상의 것으로서, 바로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무서운 단죄를 초래할 것이기에,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단죄는 세상의 모든 악행, 하느님 은총에 대한 거부, 하느님을 적으로 삼는 모든 권력 등에 대한 징벌의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모범을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불의와 고통도 예수님의 사랑을 질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당신의 적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당신 설교의 백미요, 어떻게 그리스도 신자들이 살아가고, 기도하고,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봉헌하는 이런 맥락에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뉘우침과 회개는 하느님께서 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착한 강도는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겼고, 그 믿음은 응답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선 마지막 순간까지 구세주로 남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선 전 생애에 늘 기도하셨는데, 이제 기도로써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시며,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를 발하십니다.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나긴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올해도 예수님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십시다. 그분의 고통과 용서, 순명과 완성의 모든 여정을 우리도 그분과 같이 겪고, 같이 나누어 당신의 더욱 충실한 제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참여한 인물들로부터도 제자 모습을 찾아 배워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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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일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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