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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조회수 | 1,937
작성일 | 07.03.30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은 것이다.

제1독서: 이사 50,4-7: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제1독서는 ‘야훼의 고통 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주님의 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당해야할 고통에 대해 예고하고 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6절). 즉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표현의 일부가 여기서 이미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7절).

복음: 루카 22,14-23,56 - 주님의 수난

루가복음에서는 수난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절대적 ‘지배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계시다. 루가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신의 생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9,51-19,27)과 일치시키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금화의 비유), 그리고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들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빠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22,15절). 이 빠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여졌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22,19-20절).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생나무가 이런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오죽하겠느냐?”(23,28.31절).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절;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음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굽히지 않고 더욱 열렬하게 기도하셨다. 그러는 동안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 때 참으로 신성(神性)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수난기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만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나는,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을 하러 나왔던 군중도 이 모든 광경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23,48). “이 모든 광경을 보고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사람이야말로 죄없는 사람이었구나!’하고 말하였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로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백인대장의 이 고백은 그 고백자체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직관할 수 있는 그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 쪽 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께 대한 조롱에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하고 대답하셨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제2독서: 필립 2,6-11: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6-8절) 그리스도의 낮추심에 대한 훌륭한 묵상이며 찬가라고 하겠다. 그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9-11절). 이렇게 빠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루가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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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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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수난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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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기는 주님께서 수난과 십자가 고통을 스스로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처럼 예수님께서 받으신 모욕과 십자가 고통의 참혹함에만 마음을 두고 아파하기에,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는 간과하곤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그리스도 수난의 과정 안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 그리고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라고 환호했던 제자들,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모습, 분명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팔아넘긴 유다, 잡혀 있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군중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비아냥거리던 죄수의 모습 또한, 이 세상 온갖 유혹과 위협 앞에서 쉽게 신앙을 외면하곤 하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수난기를 통해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가슴 아파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비겁함과 나약한 모습을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불안과 두려움 앞에 굴복하거나 또는 비겁하게 숨는 인간을 위해 몸소 십자가 앞에 당당히 나섰습니다. 제 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기에 이 세상의 고통과 수치는 결코 두려워할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보듯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수난과 고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승리’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용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를 마무리하며 하느님께 대한 끝없는 겸손과 순종으로 우리도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용기 내어 고백하도록 합시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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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상협(그레고리오) 신부
  |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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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가난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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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오늘 1독서인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6-7). 예수님께서 박해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고 챙기신 단 하나는, 당신을 도와주시는 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참 하느님이신 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람들의 손에 내맡기시어 가장 가난한 자가 되셨는데, 사람들은 특히 빌라도와 헤로데,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한껏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신 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만, 그분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선심쓰듯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내기도 하고, 백성들의 요구에는 죄 없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내줍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업신여기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 하나도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도망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이 가난한 분 안에서 하느님의 위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통곡하는 여자들을 위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또 다른 죄수 하나에게는 천국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위로는 당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신 그 눈빛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셨을까요? 책망의 눈빛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그리 슬피 울었을까요?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의 힘과 능력, 열의 때문에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베드로는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지금 이 순간, 베드로의 인간적인 노력은 물거품이 됐지만 주님의 사랑은 극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그 사랑을 미처 몰랐던 죄송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이 당신의 수난에 함께 하고 싶어하는 제자에게 주신 위로의 선물이 아닐까요?

자, 가난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갑시다.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 말고,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주님과 함께,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갑시다. 우리가 가난해지는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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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규하 요한 세례자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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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주님께서 걸으신 사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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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함께 우리의 사순시기는 절정에 다다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오른 우리는 이제 그분께서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을 함께 걸어갈 준비를 합니다.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마지막 날을 함께 지내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신의 구원 계획에 전혀 없었던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육화로써 실현되고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에서 드러난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의 종결점입니다. 인간의 비천한 삶의 무게를 함께 지고 가시기 위해 인간의 나약한 몸을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버림받고 상처 입은 이들에게 다가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들의 병고를 떠맡고 질병을 짊어지시어(마태 8,17 참조)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인간을 죽음의 그늘에서 구하시기 위해 당신 친히 인간의 죽을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고자 하십니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에게 진정어린 마음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진정한 사랑을 향한 갈망을 찾도록 하며, 주님에게서 그 대상을 발견하도록 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힘으로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에서가 아닌 나약한 모습으로 상처 입고 돌아가신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권능을 알아보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3-25)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실패한 사랑, 철저히 외면당한 사랑이 아닌, 죄와 죽음을 이긴 놀라운 사랑의 힘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인간의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시며, 인간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의 전부를,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참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우리는 시련과 환난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내야 하는 이유와 그럴 수 있는 힘을 발견합니다. 지금 괴롭고 힘들 때, 슬프고 외로울 때,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어가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그분께서 이미 겪으셨음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어떠한 환난도 시련도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난과 시련이 끊임없이 닥치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버텨내기를, 그리하여 인내와 수양을 쌓으며 희망을 찾아가기를 바라십니다.(로마 5,3-5 참조) 내가 지금 이 고통으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기를, 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번 성주간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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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민택 신부 : 평화신문 2014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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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흐르게 하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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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그 종이를 주워오도록 한 다음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남아 있는 향기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부처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자 이번엔 길가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새끼줄을 주워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이 “그것은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줄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원래는 깨끗하였지만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지만,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찾아 들게 마련이다.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는 것이고, 새끼줄은 생선을 만나 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사람도 이처럼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의해 물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향기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로부터 나는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중간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수준을 높여주러 오셨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귀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만 천상천하의 왕께서 타고 다니시기는 좀 겸손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왕께서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귀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려는 사람들과의 중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향기를 내게 되니 사람들의 겉옷을 밟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사고가 나서 머리에 피가 고였을 때 그 피를 빼어주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를 흘리는 것이 그 피가 머릿속에서 응고되는 것보다 낫습니다. 피는 흘러야합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기 위해서는 어떤 곳이 찢어져야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 것을 흘려주지 않으려고 찢어져야 할 곳을 막았습니다. 그래야 더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피는 많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막힌 혈을 뚫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전은 그 뚫린 곳으로 흐르는 피 때문에 살게 됩니다. 피는 흘러야하고 그 흐르는 심장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한국전쟁 때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얼어 죽었습니다. 아기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미군에 의해 발견되어 미국에서 자란 이 아이는 청년이 되어 어머니 산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겉옷을 벗어 어머니 산소를 덮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의 옷 벗음이 청년을 옷 벗게 했습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이 나를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피 흘릴 수 있을 때 모기에서 예수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기는 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예수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가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내어줄 줄도 모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께서 나귀 위에 타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빨리 불쌍한 이웃들을 만나 사랑을 전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선 나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면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도 나의 향기를 맡고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선 그분으로 내가 흘러야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팔마가지를 흔들었고 자신의 겉옷을 그분이 오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겉옷은 당시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반드시 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향을 싼 종이는 향내를 내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은 생선비린내를 풍깁니다. 이 냄새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이 다를 수 있습니다. 향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종이로 모여오고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새끼줄 쪽으로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같은 향을 풍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을 흘려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에제키엘 47장에 보면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난다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우리 메마른 땅에 들어와 우리를 다시 생명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해처럼 꽉 막혀있던 우리도 이젠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른쪽 옆구리가 터지며 우리 물을 이웃에게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웃이 우리가 뿌리는 물로 살아납니다. 그러면 그들도 흐르게 됩니다.

내 겉옷을 벗어 그분께서 들어오실 길 위에 깝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도 뚫리게 되어 성령이 흐르는 성전을 친구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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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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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3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 2159
702   [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3] 2212
701   [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3] 2299
700   [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25
699   [인천] 사람을 믿어도 행복한데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2] 2182
698   [대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477
697   [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4] 2117
696   [안동] 문제가 없으면 그게 문제  [2] 1980
695   [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3] 2186
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87
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1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99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4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5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7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2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5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1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3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6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1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1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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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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