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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조회수 | 2,196
작성일 | 07.03.30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에로 내 모는데는 빌라도와 유대지도자들과 제자들과 유다스와 군중들이 각자 자신들의 몫을 하였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비겁함과 죄악이 예수님을 죽음에로 내몰았다. 그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1. 죽음을 향한 예루살렘 입성.

오늘은 사순절(빠스카 준비시기)이 막바지에 이르고, 죽음을 통해 생명에로 건너가는 빠스카 신비가 그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의 수난 성지(聖枝)주일이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며 환호하던 군중들은 현세적 부귀영화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메시아를 향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며 외치고 있다.

2.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에 공모한 사람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시에 성혈을 축성하시면서 "너희와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흘릴 피"라고 하셨다. 이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한 마리의 속죄 양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을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교회는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한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수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둘러싼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예수의 죽음에 일조(一助)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옛날의 1회 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동참으로 역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마태26,15): 예수님의 처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마태26,3-4)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선전 정화」(마태21,12-17)에서 보듯이 성전 세와 장사꾼들에게서 받는 수입원(收入源)을 깡그리 없앨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어둠은 빛을 거부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눈의 가시'였다.

스승님 안녕하십니까?(마태26,49):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마태26,15) 유다는 스승을 당시 노예 하나 값인 은돈 서른 닢에 팔아 넘겼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을 눈멀게 한다. 황금만능 풍조에 찌들은 많은 이들에게는 '돈이 바로 하느님이기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밀고와 배신과 청부살인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항상 있는 지 모른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태26,56):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예견하고 하나같이 도망쳤다. 신앙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신자들은 지금도 많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4)하며 세 번이나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무기력한 우리의 모습이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태27,23):"군중을 움직이는데는 복잡하고 깊은 철학보다 한 두 마디 선동적인 구호가 더 효과적이다."는 말이 있다. 매스컴의 암시에 따라 덩달아 춤을 추는 여론재판과 관제데모, 어용 NGO 등은 요즘도 흔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때로는 진상(眞相)을 잘 모르면서도 선입견이나 남의 말을 듣고 '죽일 놈', '몹쓸 사람'으로 단죄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마태27,24)

예수의 죄 없음을 알고있던 빌라도 총독은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마태27,14)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여라."하며 예수를 넘겨주고 만다. 유다 지도자들은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요한19,12)하며 예수님을 카이사르의 정적(政敵)으로 부각시킨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동향보고」라도 올라간다면 출세는 끝장이 아닌가? 예수님은 갑자기 정치범이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해서는 무죄한 줄 알지만 몇 명 아니 몇 천명쯤 죽이는 것은 정치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3. 우리도 예수의 죽음에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수호와, 돈 욕심과, 비겁함과, 정치적 출세를 위해 공모한 합작 품이었다. 예수 사건(Christ-event)은 2천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또 다른 예수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의문사 '진상규명'활동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도 그런 일에 때때로 동참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악과 하느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만난 사건이었다.

이 성주간에 작은 결점이라도 고치며 회개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 사는 길을 찾자. 아무도 "나는 예수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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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오늘 전례는 ‘호산나!’로 시작해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으로 절정을 이룬다. ‘승리와 축제의 성격’을 띤 이 성지 주일에 왜 우리는 주님의 수난기를 들을까? 그것은 부활의 영광, 그래서 승리의 축제는 ‘십자가상에서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신비의 핵심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유다인인가 아니면 로마인인가? 물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당시의 유다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다른 책임자’를 찾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이 많다. :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정(否定), 빌라도의 발뺌(손 씻음), 바랍바, 두 강도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일하고도 가장 큰 사실’을 표상할 뿐이다. :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당신 십자가 위에 짊어지셨고, 우리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옛날 다윗 왕을 향해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라고 선언했던 나탄 예언자의 말씀은, 오늘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자를 묻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선언되어야 한다. :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다! 배반한 유다, 예수님을 부정(否定)한 베드로, 유다의 지도자들, 손을 씻은 빌라도, 수군거리는 군중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았던 군인들, 강도들, 그들만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각자의 모습 뒤에는 우리도 함께 서 있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다 들었다. 그리고 이제 성경을 덮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재판과 수난이 계속되고 있는가? 첫째,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서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둘째, 죄악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그가 아니라 바랍바를 놓아 달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관여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곁에 서서 어깨를 맞대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무게를 나누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모습으로, 또는 예수님을 따르며 울부짖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혹은 자기 가슴을 치는 백부장의 모습으로, 또는 십자가 아래서 숨죽이며 앉아 있는 마리아의 모습으로, 아니면 유다, 베드로, 빌라도, 혹은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를 ‘멀리서 지켜보는 군중’의 모습으로 참여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 김순곤 비오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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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전쟁의 시작

애증의 도성 예루살렘. 그곳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예수님은 어린 나귀에 몸을 맡긴 채 오늘 적진 한가운데로 진군한다.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면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생각은 어디에 있었을까? 인간이 지은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속죄를 위해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고자 했을까? 자신의 목숨을 내어던져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고 싶었을까?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아버지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변혁이라고도,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전과는 다른 모습, 다른 생각, 다른 삶을 요구하고 있다. 도성 입구에 늘어서서 옷을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본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한 욕망이다. 식민지 이스라엘의 해방이든 먹을 것 걱정 없는 경제 문제의 해결이든 혹은 무병장수하는 것이든, 자식의 출세를 바라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런 욕망을 본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할 것을 안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며 고함을 지른다. 예수님은 칼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경제를 살리거나 명예를 통해서 혹은 권력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유혹은 이미 이겨낸 예수님이다. 거대한 어둠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예루살렘. 식민지 이스라엘, 외국의 군대와 그에 빌붙은 권력, 폭력과 음모, 질시와 앙심, 성전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탐욕, 은밀한 거래와 배신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 그 깊은 어둠 속으로 예수님은 몸을 던진다. 칠흑 같은 어둠도 빛을 가둘 수 없다. 거대한 어둠의 힘은 예수님을 가두지 못했다. 그분의 말과 행동은 세상 구석까지 전파될 것이다. 어둠의 힘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예루살렘 입성은 전쟁의 시작이다. 세상의 어둠과 한판승부. 어떤 이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신앙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신앙은 전쟁이다. 어둠의 힘과 싸워 이겼을 때 평화가 올 수 있다. 끝없는 미움이 마음에 자리 잡을 때, 원망과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

그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안고 가는 어둠이고 그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에게 평화는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오신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 어둠의 힘과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패배는 너무나 확실하다. 여전히 미워하고 용서가 안 되고,보기 싫고, 깎아내리기 바쁘고, 모욕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하고 있다면 우린 어둠의 힘에 발목 잡힌 사람들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지 못하며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갈라놓는 어둠의 힘에 앞잡이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이미 당신이 보여준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서. 예루살렘 입성은 거룩한 전쟁의 선포이자 승리를 향한 진군이다. 그 길에 함께 나서는 자.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자 가 될 것이다.

▦ 마산교구 신호철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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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평화의 임금님이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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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전례시기 중 가장 거룩한 시기, 성주간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교회의 전례 안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이 거룩한 주간의 시작은 당신의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행진과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앞길에 자기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예언처럼 평화를 가져오는 겸손한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행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이 행진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찬미와 기쁨,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표현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들려오는 기쁨과 환희에 마음이 흔들려 교만해질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셨고’, ‘낮추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으셨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당신 자신을 오히려 낮추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는 왕이 아닌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비우시고’, ‘낮추시는’ 저 모습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우시고, 낮추셨기 때문에 죄인의 신분으로 사람들에게 넘겨져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시면서도 참아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아버지의 버려두심을 경험하지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시면서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무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비워내시고, 낮추신 그 자리를 부활이라는 선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께 의지하면서 당신 자신을 비워내고, 낮추는 그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영광, 즉 부활이 채워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행진에 함께 동참할 것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기심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비우심과 낮추심의 절정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자신을 향해 걸어 나아가는 길을 이 성주간의 시간 안에서는 잠깐 멈추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행진하면서 우리 자신을 비워내고, 낮추면서 ‘섬김의 길’, ‘내어줌의 길’,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잊는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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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장성근 에단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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