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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조회수 | 2,252
작성일 | 07.04.13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보아서 이해가 되어야만 믿는 존재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이성적인 인물인 토마 사도를 만나볼 수 있다. 3년간 굳게 믿고 따랐던 분, 영원한 구원과 자비하신 하느님을 전해주셨던 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기적들을 행하신 분이 돌아가신 것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 이상 희망도, 용기도 없었던 토마 사도의 마음을 우리도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토마 사도의 모습을 ‘불신앙의 대표’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불신앙인 아닌가?

인간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시각에서 토마 사도를 살펴보면 그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는 부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신비’는 ‘상식’이 되기 때문이다. 토마 사도는 인간 이성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신비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아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토마 사도는 직접 주님을 뵙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면 어찌하겠는가? 혹시 다른 제자들을 미쳤다고 비웃지는 않을까?

여기서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토마 사도의 이러한 언행 때문에 그의 이성이 신앙 안에서 붕괴되어졌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한 그의 언행이 주님을 뵌 뒤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확신에 찬 신앙 고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어리석음이 깨어지면서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신앙으로 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고 또한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확실하고 충격적인 체험을 통한 신앙, 우리가 간절히 바라던 기적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들. 하지만 주님은 항상 우리를 초월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성과 체험을 통한 신앙 보다는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행복을 원하고 계시다. 보고 믿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자. 보고 믿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직접 보지 않고서도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즉 우리의 이성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성의 공백이 아닌 신앙 안에 이성적 삶의 변화이다. 주님의 말씀과 애덕의 삶에 우리의 이성이 전적인 동의를 한다면 우리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확실한 충격을 주실 것이다.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는 행복이다.

수원교구 정진성(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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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 믿는 것

오늘은 부활8부가 끝나는 날로 부활의 기쁨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날이었다. 부활은 이제 단순히 지내는 어떤 기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연장되며 새로운 의미를 주고 선포되는 그런 날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제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의 수효가 날로 늘어났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시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여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갔으면 했다”(사도 5,12-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기적들과 놀라운 일들을’(12절) 이루심으로써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고 계심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사도 2,36 참조).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고 현존하시게끔 하여야 하는 삶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때에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 묵시 1,9-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있다

묵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곱 등경 가운데 서 계신 분’(13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18절). 그분은 이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사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 분을 증거하여야 한다.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복음: 요한 20,19-31: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두 장면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선교사명’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죄권’이 부여되는 장면과(19-23절), 둘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토마의 불신앙이다(24-29절).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현재에도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부활은 항상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됨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가득 차있다. 예수께서는 잠겨있는데도 드나드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통치에 대한 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선교사명’, 그리고 ‘사죄권’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절)이라는 표현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 이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의 해방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리고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는 ‘선교사명’이다. 이 파견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것이며 구원의 행위를 채워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의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 행위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창세 2,7; 에제 37,9 참조)을 의미한다.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마 사도가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은 토마 개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개개인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 못하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분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토마의 정신자세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신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생명의 절대적 ‘주님’이 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때에 진정 그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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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토마스만 믿지 않았나요?

복음서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번 나타나십니다. 순서를 정하지 않고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토마스가 없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그리고 토마스가 함께 자리한 곳에 나타나시어 토마스에게 믿음이 없다며 질책하실 때, 고기잡이 하고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또 예리고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은 토마스가 없는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 이를 믿지 못하는 토마스의 불신앙, 그리고 토마스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시어 토마스를 믿음이 없다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내용을 접하면서 하나같이 우리들은 토마스 사도가 믿음이 없다고,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한술 더 떠 토마스에게 핀잔을 줍니다. 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며, 그리고 우리들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웬 사내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막달라 마리아도 직접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또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자 다들 안 믿었습니다. 토마스는 물론 이구요. 예리고로 가는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첫째 공통점은 바로 '들었지만 안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공통점은 듣고도 믿지 못한 제자들이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보고 나니' 믿었다 라는 점입니다.

평소 늘 예수님이 '난 부활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던 제자들조차 이 모양(?)입니다. 듣고서는 믿지 못했고 다만 '봄'으로써 믿었다는 점이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묵상 거리를 줍니다.

우리들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신부님의 강론과 교리, 그리고 영성가들의 서적을 통해 그렇게 알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남들로부터 들은 것만으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살았던 제자들도 듣고서는 안 믿었는데 말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토마스의 불신앙을 비판하지만 어쩌면 토마스처럼 '보고 만져보아야' 믿는 다는 불신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제자들도, 토마스도 그랬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보지 않고서는 그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어디서 만나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태 28,7) 우리는 예수님을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척박하고 가난한 그 곳, 예수님이 살아생전 늘 함께 하셨던 그 갈릴래아에서 말입니다.

우리들의 갈릴래아, 나의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찾아보는 부활시기,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원주교구 최종복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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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개심(開心)과 개안(開眼)이 빚어낸 신앙고백

사제로 살면서 마음에 홀로 새긴 영혼의 기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도도 있습니다.

“우리 생이 다하는 날, 우리는 ‘사랑’에 대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 마태오 복음 25장(31-46절)을 묵상하다가 하느님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였는가.’라는 사랑 실천의 여부에 있다는 확신에서 마치 좌우명처럼 새겼던 나만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미 수백 년 전 십자가의 성 요한도 이 마음 속 고백과 비슷한 표현을 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생명의 저녁,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으리라.”

말마디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나만의 고백이요 기도라고 자족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제가 성인의 영성을 어설프게 모방하며 뒤늦게 헛물만 들이킨 것 같아 당시 실망이 적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느님께 드릴 나만의 고유한 신앙고백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성경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아도 근사하고 신심 깊은 고백들은 이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발설되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성모 마리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베드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백인대장).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시메온).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예리코의 소경).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토마스) 등.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뵙고 드렸던 토마스의 간결하지만 매우 인상 깊은 신앙고백의 장면(요한20,24-29)에서부터였습니다. 먼저 다가오신 주님을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우리가 제대로 알아 뵐 때까지는 요지부동 굳게 잠겨 있던 문(요한 20,19. 26)처럼 얼마나 많은 악전고투의 영적 과정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초대(“평화가 너희와 함께!”)에 의해 두려움과 슬픔으로 얼룩진 굳은 마음이 풀리고 열리면(開心) 비로소 영적인 눈도 함께 열려(開眼) 그분 앞에 ‘자연스러운’ 신앙고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제까지 주님을 만났던 성경 속 인물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한때 남과 다른 근사한고백과 기도에 전전긍긍했던 어리석은 제 모습을 성찰하며 오히려 개심과 개안의 자세로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토마스 사도와 같은 가슴 벅찬 뜨거움으로 만나 뵙기를 희망합니다.

▦ 수원교구 밧현창 베드로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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