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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조회수 | 2,142
작성일 | 07.04.13
몇 해 전의 일이다. 예비신자 교리 중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더니 잠간 침묵이 흐르다가 나온 대답이 충격이었다. “덜 죽었던 게지. 그러니까 다시 일어난 것이지” 평소 교리 공부에 열심이셨던 할머니였다. 내 방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2000년 전 유다 지도자들이 퍼뜨린 소위 ‘부활 사기극설’의 흑색선전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그 속편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얼마 후 풀렸는데 뜻밖에도 비 신앙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갤럽에서 조사를 했는데 천주교 신자 네 명중 한명만이 부활을 확실하게 믿는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반신반의 혹은 신화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주님 부활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예수님 부활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뿌리요, 종착역”이라고 강론하면서도 사실 나는 ‘주님을 한번쯤 뵈었으면, 그분의 오상(五傷)을 내 손으로 만져 봤으면, 그분의 옷자락에라도 한 번 스쳐봤으면 더 확실하게 믿을 텐데…’ 하는 나약한 마음을 품을 때가 많다. 주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는데 나는 기어이 보고야 말겠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영락없는 토마스 신앙이다.

어릴 적부터 토마스는 ‘불신자’,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들었고 그래서 내심으로는 우습게보기 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였다.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하고 따라나섰던 용기 있는 분이 아니던가! 다만 토마스는 부활의 현장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머물지 않았을 뿐이다. 운이 없어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결코 불신자가 아니다. 사실 열한 제자는 모두 ‘보고서야 믿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평화를 주시고 -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6) - 토마스를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는 오히려 선택받은 제자다. 잠시 믿음 자리를 비운 신자나 나 같이 약한 신앙인에게도 평화를 주시려고 주님께서 일부러 선택하신 제자이다.

“토마스를 선택하신 주님, 저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조용히 부활 신앙을 고백하고 묵상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형제로, 마리아님을 어머니로 여기는 것을 의미 합니다 … 당신이 원수를 용서해 주고, 배고픈 이의 굶주림을 덜어 주고, 힘없는 이를 돌보아 줄 때 당신은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기쁘게 일터로 발길을 옮길 때 당신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까를로 까레또)

그렇게 믿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자! (요한 20:31)

▶ 김성수 베네딕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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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 있을 때였습니다. 캄보디아 친구 하나가 저를 캄보디아 점쟁이에게 데려갔습니다. 프놈펜에 있는 메콩 강가를 따라 많은 점쟁이들이 아주 허름한 책상과 의자를 놓고 점을 봐주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먼저 점을 보고는 제게도 보라고 하여 ‘재미'로 봤습니다. 나이 많은 점쟁이 여성은 제 손을 잡고 이리 저리 보고 얼굴도 뚫어져라 보고나서 지그시 눈을 감고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윽고 눈을 뜨더니 제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조만간 결혼하여 두 아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당연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재미로 캄보디아 친구와 맞장구를 쳐준 것이지요.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그러듯이 그 친구도 이 점쟁이들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미신을 믿는다는 생각에 참 바보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뜩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도 캄보디아 친구처럼 바보스러운 짓을 하고 있고 그 친구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 안에는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차 있고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저만의 신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친구보다는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합리적 미신’을 믿는 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근거해서 저의 생각과 행동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복음은 저에게 통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저의 모습이 옳고 합리적이라고 굽히지 않습니다.

토마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과 가치관이 때로는 오만함으로, 편견으로 굳어진 ‘합리적 미신’의 모습을 띤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요.

토마스가 그런 것처럼, 저도 저 자신이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또 합리적으로 만들어 놓은 저만의 틀 속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볼 수 있어야 하고, 만질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는 저의 믿음 체계가 오히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방해할 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토마스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신 것처럼, 토마스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토마스를 무릎 꿇게 한 것처럼, 저에게도 나타나실 것이라고. 그리고 저에게 예수님을 향한 갈망이 있고, 그 갈망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저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딱딱한 거북이 등 같은 껍질에 틈을 내고 그 틈을 뚫고 그분이 저에게로 다시 오실 것임을.

의정부교구 조해인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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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여드레 뒤에”

찬미예수님!!!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음에도,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교회는 자신의 시간을 멈추어가면서 팔일 동안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되새깁니다. 그렇게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 팔일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며 부활 제2주일입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날에 전례력은 복음으로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장면을 봉독합니다.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서운함의 토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토마스 사도는 이미 부활을 목격한 다른 제자들에게 흔히 ‘합리’적 의심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논거들을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직접 목도한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사도의 합리적 의심은 매우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의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어쩌면 토마스 한 사람을 위한 발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합리적 의심을 단번에 사그라뜨릴 수 있는 강렬한 체험이 토마스 사도를 덮치고 맙니다. 그 순간 토마스 사도가 할 수 있는 말은 성경의 표현대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토마스 사도의 합리적 의심은 우리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부활을 맞이했지만,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이 우리의 삶에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만나는 불의와 공포가 아직도 우리를 휘감고 있음을 체험하는 순간들이 너무 잦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그렇게 우리는 부활 후 “여드레”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체험처럼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가 가진 의심들을 말끔하게 치워주시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현재의 경험 때문에 일어나는 의심 속에 “여드레”를 지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고 “여드레” 동안 부활을 만끽할 것인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미 부활을 선택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선택의 힘으로 우리는 세속의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의심들을 접어가며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처럼, 우리도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앞으로 이어질 부활 시기를 기쁨으로 채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여드레”를 미리 우리 삶의 부활로 만끽하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문형균 클라로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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