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7 45.6%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조회수 | 2,176
작성일 | 07.04.13
부활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라도 있다면, 부활을 믿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들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은 이미 신앙의 대상이지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1. 부활장면 찍어 둔 비디오는 없나?

중. 고등부 학생들에게 부활교리를 하던 중이었다. 신부님의 교리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중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는 "신부님, 부활 장면 찍어둔 동영상 같은 것은 없습니까?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라도 있으면 좀 쉽게 믿을 수 있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임마, 그 때 비디오가 어디 있었겠어!" 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점잖게 나무랐다.

오늘 복음의 토마 사도뿐 아니라, 현대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에겐 "예수님은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부활교리를 믿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 부활의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누구나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참으로 죽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 없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고 예수님을 완전히 '죽어버린 자'로 여긴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자만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미 믿음의 대상이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 부활을 증거하는 삶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단순한 지적(知的)인 동의인가? 이것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부활신앙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 (묵시1,17-18)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부활신앙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하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때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상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을 향해 열린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사도들은 현실의 욕심을 뛰어넘어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대로 나누어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사도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철저한 나눔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우리의 삶을 철저히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우리의 삶이 지독히 자기중심적이며, 이 세상이 전부인양 집착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3. 설익은 신앙인?

우리 주변엔 "나는 죽고 난 후의 영원한 생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세상에 살면서 좀더 인간답게, 멋있게 살려는 것뿐이지!"하며 신(新) 세대다운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수도자도 가끔 만난다. 이는 '무신론적인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보면 사춘기적인 순수함이고,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멋있어 보이려고 진한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 할 수 있을까? 멋있어 보이려고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부활에 대한 확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신앙은 성숙한 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복음은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토마 사도가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토마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 발현했을 때, 사도들의 무리 안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리고 믿음이 두터운 형제들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교회를 떠날 때,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이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은 믿음공동체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교회를 떠날 때 믿음도 시든다. 주님 당신 성령을 통해 저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 유영봉 몬시뇰
447 45.6%
부활이 여러분과 함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몸소 체험하신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부활’을 체험합니다.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미운 마음은 한순간에 우리를 무섭게 덮치고, 미운 마음은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자라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어라” 그 말씀은 이유나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용서하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미운 마음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떠나보내라는 것으로 저는 알아듣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모욕하고,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모두 다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누구든 그가 어떤 죄를 지었든 예수님처럼 그냥 ‘용서’할 때 우리는 ‘평화’라는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 받게 됩니다. 평화를 다시 얻은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누구의 죄든 ‘용서’해서 ‘평화’를 선물 받을 것인지, 아니면 미움이란 괴물과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할 것인지, 결국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갈 때 ‘부활’을 체험합니다.

진주에서 <아름다운가게> 문을 연 지가 1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자신이 쓰는 물건 가운데에서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지만 버리기 아까운 물건을 기증받아서 다시 팔고, 그 수익금을 지역에 어려운 단체와 이웃에게 나누는 <아름다운가게>가 진주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1억 원을 넘게 벌었고, 6천만 원을 어려운 단체와 이웃에게 나눠드렸습니다. 1년 동안 지역에서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게에 물품을 기증하시고, 물품을 사셨습니다. 신자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많은 분들이 기꺼이 동참하셨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내어 놓았고, 그 수익으로 많은 분들을 도와드렸습니다. 3만 명의 뜻있는 분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였고, 평화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그분들의 귀한 나눔과 큰 사랑이 어려운 이웃에서 참으로 소중한 선물이 되었고, 그분들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을 드렸습니다. 서로가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서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이 여러분과 함께!

▶ 김종봉(요한) 신부
  | 04.16
447 45.6%
한 마을에 의심이 많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하러 가려고 도끼를 찾으니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마루 밑을 샅샅이 훑고, 광을 뒤지고, 집 뒤편도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노인이가만히 앉아서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불현듯 며칠 전 자기 집 앞을 어슬렁거리던 옆집 젊은이가 떠올랐습니다. 그 젊은이 말고는 없어진 도끼를 훔쳐갈 사람이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섣불리 추궁하다가는 발뺌을 하거나 증거인 도끼를 깊숙한 곳에 숨길 우려가 있습니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꼬투리를 잡기 위해 옆집 젊은이를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젊은이가 걷는 모습이 분명 도끼를 훔쳐간 사람의 걸음걸이였습니다. 하릴없이 빈둥대다가 하품하는 모습 또한 영락없이 도끼를 훔쳐간 사람의 하품질이었습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단서만 잡으면 벼락같이 덮쳐서 도끼를 되찾고 젊은이를 혼내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일 나갔던 마누라가 돌아오는데 도끼를 손에 들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혼자 겸연쩍어 졌습니다. 평소 성실하고 착한 젊은이를 혼자 생각으로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그래 다시 젊은이를 보니 걸음걸이가 당당하고 결백해 보였습니다. 하릴없이 빈둥댄다고 여겼었는데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여유 있는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하품을 한번 해도 아주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노인은 저런 옆집 젊은이를 의심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사건이나 사람도 바라보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물컵에 물이 반 있을 때,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말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 말씀에 토마스 사도가 등장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며 격하게 거부합니다. 왜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던 걸까요. 토마스에게 이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의심입니다. 들리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필터,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눈의 필터, 진실을 진실로,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영혼의 필터, 믿음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신앙의 필터 때문입니다.

왜그럴까? 너무 각박한 시대 상황이 사람을 의심 가득한 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있는 자, 배운 자, 권력을 쥔 자들의 횡포와 로마의 식민지배는 힘없는 서민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놓았기에 불신이 만연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소득의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 빈곤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 일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의 이어지는 자살, 취업난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젊은이들…. 그러나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본 현금 10억 이상을 가졌다는 0.3% 부자들은 아직도 자신은 돈을 더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예수님 시대만큼이나 의심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토마스만이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불신을 지우고 신앙으로 돌아갑시다.

마산교구 정진국 신부
  | 04.07
447 45.6%
[마산] 소외된 토마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살고 싶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는 순간 그들은 살고 싶어 도망을 친 것이다. 그러나 살고 싶어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을 쳤지만 그들은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안팎으로 시달렸다. 스승을 죽인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스승을 배반한데서 오는 회환과 절망의 공포. 그들의 몸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죄, 배반을 언급하거나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셨다. 평화를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너무도 적절한 말씀이었다. 그들에게는 진정 평화가 필요했다. 말 없는 용서를 통해 그들에게 주신 그 평화가 그들에게 다시금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다. 용서에 대한 사명이다. 용서를 받아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

토마스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 날 다른 제자들이 다 함께 모여 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유일한 제자였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지만, 토마스는 운이 나쁘게도 그 자리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주님과 더불어 기쁨을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토마스는 소외되어 외톨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토마스의 주장은 의심 때문이 아니라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소외감에 따른 일종의 투정이었을 것이다.

시인 홍윤숙은 토마스의 심정을 이렇게 헤아린다.

랍비여, 보지 않곤 믿을 수 없다고 외친
토마스의 서럽고 억울한 마음 아시오니까
다른 제자 다 모여 부활하신 주를 뵈었는데
자기만 빠져 버린 듯 분하고 토라진 마음
내가 만일 그날의 토마스였다면 나 또한 분하고 억울하여
당신 가슴 탕탕 치며 통곡했을 것입니다.

(홍윤숙, ‘토마스의 슬픔’, 「내 안의 광야」

그러므로 주님이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외받은 토마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에게도 기쁨을 주기 위함이다. 그 기쁨을 직접 맛본 토마스의 입에서도 주님을 향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주님은 소외된 사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잊혀진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신다. 소외된 토마스만을 위해 주님은 특별히 나타나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지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외되고 버림받을 때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서도 친히 나타나시어 나를 위로하신다. 나 하나만을 위해서 당신의 몸을 만지게 하신다. 이 시대의 수많은 토마스들을 주님은 위로하고 함께하시며 지켜주신다.

▦ 마산교구 최태식 필립보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1
447 45.6%
[마산] 주님의 상처

-------------------------------------------------

“나는 …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하루는 새벽 미사를 앞두고 성전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전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우린 정말 잔인한 사람들이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매달려 있는 주님을 제일 크게 만들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매일 쳐다보고 있으니.” 그러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마음이 무뎌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는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자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바람대로 상처를 마주하게 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이 상처는 토마스에게만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셨던 것도 바로 상처입니다. 이 상처는 세상의 아픔들을 감싸 안기 위해서 감수해야만 했던 상처입니다. 그리고 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물과 피)으로 이 세상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상처는 우리에게 마음 아픈 속죄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지니신 그 상처가 하느님 자비의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상처를 품에 안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모여들 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어놓고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상처입니다. 이 상처로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십자가 위의 주님 상처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 너무도 흔하게 십자가들이 걸려 있습니다. 집에도, 성당 곳곳에도. 지금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그곳에 상처투성이의 주님이 계십니다.

---------------------------------

마산교구 박종선 갈리스토 신부 : 2019년 4월 28일
  | 04.2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19   [의정부] 꿈나무, 땔 나무  [3] 2382
718   [군종] 고통과 역경을 통한 진정한 부활 신앙  [2] 1978
717   [수원] 진실과 증거  [5] 2225
716   [안동]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38
715   [부산]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5] 2273
714   [마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4] 2354
713   [대구] 우리도 함께 가겠소  [4] 2242
712   [인천] 부활은 새로운 시작  [3] 2248
711   [서울]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95
710   [대전] 우리 곁에 살아계신 주님  [1] 1984
709   [청주] 주님과 함께라면  [1] 241
708   [춘천] 말씀에 귀 기울여라  [2] 2284
707   [원주] 일상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130
706   [광주] 증거하는 삶  2196
705   [전주] 일어나시오.  [2] 138
704   (백) 부활 제3주일 독서와 복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2] 1925
703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 2166
702   [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3] 2221
701   [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3] 2316
700   [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38
699   [인천] 사람을 믿어도 행복한데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2] 2195
698   [대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486
697   [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4] 2130
696   [안동] 문제가 없으면 그게 문제  [2] 1988
695   [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3] 2200
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95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76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104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126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36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120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39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84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2004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80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54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28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50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11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83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