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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조회수 | 2,320
작성일 | 07.04.13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내적인 정신세계를 사랑해 왔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비록 보고 만질 수는 없더라도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아름다운 가치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요즈음 어느새 우리의 경험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좁아져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가 변한 것입니다.

꽤 적지 않은 교우들이 냉담 상태에 있습니다. 신앙상의 위기일까요? 위기의 뿌리는 '의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의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이 우리네 각장의 삷을 섭리하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의심 말입니다. 기도란 성령을 체험하는 구원의 시간임을 느끼지 못하고, 영성체를 해도 뜨거움이 없고, 영원한 생명엔 전혀 관심없이 철저히 현세의 실리 위주로만 살려는 태도 모두 하느님께 대한 의심에서 나옵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나 자신의 눈으로 내가 직접 보는 것만이 다른 사람한테 백번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는 경험이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신학생 때 배운 백민관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부님께서는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이라는 예지를 주셨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제일 위험한 적은 의심입니다. 의심은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을 다 약화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믿음과 확신은 우리네 생각과 말, 행동을 한없이 힘차게 해주며 계속 인간을 새롭게 창조해 줍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믿음이란 하느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신기한 일을 눈으로 보았기 땜누에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적 신심은 더욱 아닙니다. 항구한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쌓아 올려지는 탑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상 안에서 만나는 큰 체험 만이 의심을 제거합니다. 악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무감각하여 회개하고 일어나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안에 의심은 뿌리 깊게 자리 잡습니다. 우리가 어린이처럼 마음 낮추어 기도하고 의심을 없애면 외롭고 고단한 지상 순례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로 인도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보하다"(요한 20,29).

▶ 이수영 다미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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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부활을 살자

▶ 인간의 한계

과학자들은 우주를 ‘소우주’와 ‘대우주’로 나눈다고 합니다. 소우주에 관하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모든 물질의 기본 단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한 이래 현대의 과학자들이 분자, 원자, 소립자를 비롯하여 ‘쿼크’와 ‘렙톤’ 까지를 발견합니다.

이 렙톤을 1mm 세우기 위해서는 1초에 10개씩 하루 종일 세운다 하더라도 무려 317만 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때문에 소우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떻게 이 작은 것들이 생겨났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적당히 어우러져 이 세상을 이루는지 경이로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든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풀 수 없는 신비 덩어리입니다.

대우주인 은하계 역시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현재까지 천문학이 발견한 우주의 범위를 ‘초초 은하단’이라고 천문학에서는 부릅니다.

그런데 이 초초 은하단 안에 있는 별의 숫자를 다 헤아리자면 1초에 100개씩 셀 수 있는 컴퓨터로 24시간 쉬지 않고 세어도 약 2조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생존하고 있는 모든 인류가 저마다 별을 수십 억 개씩 갖는다 하여도 다 가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세어야 하는 숫자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대우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가장 위대한 존재이지만, 또한 가장 미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조물주 하느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보거나 만져봐서 알 수 있는 우주의 신비는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경우처럼 보고 만져지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우리는 분명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 모든 형체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시작부터 순수한 믿음,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며 투신하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오만이며 교만인 것입니다. 때문에 ‘봄’과 ‘만짐’이 아닌, 그분 말씀에 온전한 믿음을 두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 의심을 버리고

대화를 나눌 때마다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쌍둥이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다릅니다. 손가락 지문을 보면, 그 작은 면적의 문양이 모두 다르다는 모습에 우리는 분명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며,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부활 하셔야만 하고, 분명 부활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역사이래 가슴 아프게 숨져간 모든 의인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나기 때문에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역사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모든 이들의 죽음 역시 헛된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부활 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 이래 인간이 흘렸던 모든 눈물과 통곡의 절규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희망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은 진정 새 창조이며, 하느님 권능의 모습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해 주어야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지상에서 흘리게 될 땀과 눈물의 희생이 의미 있게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우리 인간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며, 이 질곡의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인간에게 끝까지 들려주고자 하는 당신 사랑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부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부활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리고, 이 지상에서부터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입니다.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다 깨우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넘실대는 세상을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의 세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아집의 닫힌 무덤을 열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부활로 걸어 나와야 하고 서로에게도 그 생명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평화의 손길을 뻗을 때, 상처로 얼룩져 죽어있는 형제를 용서의 부활로 일으켜 세울 때, 논리적인 부활의 설명보다 더 큰 부활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 부활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배광하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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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을 거행하며,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 자비의 주일’ 로 지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만이 참된 희망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자비의 사도인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를 통해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믿고 선포하며 살아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삼덕송 중 망덕송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또한 하느님 자비의 5단 기도에서도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특히 이 자비의 기도는 임종하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니 제자들이 기뻐하였다고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셨지만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우리의 죄로 인하여 받으신 당신의 다섯 상처를 보여주시며 우리가 당신의 성혈로 구원되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자비롭지 못하다면 그만큼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자살율과 저출산율은 그 사회가 그만큼 힘들고 희망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 복음적 삶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 이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하고 죄 사함의 권한을 교회와 사도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 자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안에 우리를 위한 당신의 무한한 은총의 선물을 담아 놓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죄인들이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할 때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생명의 양식임을 깨달아 알고 믿게 하십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하느님 자비의 상본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당신께 의탁하나이다.’ 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과연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의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악의 세력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만들고 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자비를 깨우쳐알게 해 주시고 그 사랑에 온전히 의탁하여 새로운 삶, 즉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큰 은총을 입은 사람임을 알고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자비로운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춘천교구 이지철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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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에서 “예수 그리 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아버지의 자비는 나자렛 예수 님 안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 비는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드러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드러나신 모습 안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제자들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과 그분을 배반했다는 죄책감과 무엇보다도 그들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에 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인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죄로 말미암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에 안정을 주는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인사 속에서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금 기쁨과 평화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 즉 그분을 배반해서 도망치고 믿음이 약해서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실망하지도 꾸중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주시고 그들에게 당장에 필요한 마음의 평화를 자비롭게도 베푸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는 다른 장면에서 자비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그 자비란 부활의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토마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포용하시고 더 나가서 믿도록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포용과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제외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드러내는 하느님 자비의 절정은 사랑의 포용과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생활 안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끊임없이 소외된 이와 죄인을 포용해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모습이었고 부활하셔서도 토마스에게 그러한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교황님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한 이유는 ‘우리가 특별히 주님의 자비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 자신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뚜렷한 표지가 되도록 부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바로 오늘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듯이 예수님의 자비는 그리스도인 즉 우리를 통해 드러난다면 얼마나 좋고 행복하겠습니까!

▦ 춘천교구 안기민 사도 요한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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