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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조회수 | 2,129
작성일 | 07.04.14
어느 날 부자 한 사람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대형 유람선을 타고 유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승객이 많아 그는 누군가와 함께 방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지내게 된 사람이 도둑 같아 보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어요. 부자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귀중품을 챙겨 들고 아래 선실로 내려가서 그 배의 사무장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좀 맡기고 싶습니다."

"손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맡아드리지요. 그 분도 벌써 맡기고 갔는걸요."

그런 사람들을 한 방에 묶어 놓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불신이 깊을수록 불행도 깊습니다. 의처증, 의부증 환자들은 끊임없이 아내를 의심하고 남편을 의심해 별의별 트집을 잡아 닦달하는가 하면 정도가 심하면 외출도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지옥이지요.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 자꾸 따지고 들면 의심이 커지고, 반대로 믿으려고 노력하면 믿음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는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신이 확신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시고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오늘 가장 행복한 사람은 토마스 사도일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가 의심의 사도로 알려져 있지만 토마스 사도는 의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토마스의 의도는 믿음에 있었지요. 예수님 부활을 확신하고 싶었기에 의심했던 것입니다. 토마스의 의심은 의심하고 싶어서의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믿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굳게 믿으며 확신에 차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느 병원 부원장으로 계시는 의사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마취과 의사인 이 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 인사라고 합니다. 이 분은 마취에 들어가기 전에 환자에게 꼭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이 있으십니까?"

환자가 특별한 신앙이 없다고 대답하면 그는 정중하고도 친근하게 다시 물어 봅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기도해 드려도 좋겠습니까?"

사실 마취를 한다는 것은 환자들에게 있어서 여간 불안하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 더구나 의사인 그가 기도를 해 준다고 하니 환자들로서는 참으로 위안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환자가 이렇게 인사를 하면 그는 환자 손을 잡고 진심에 찬 기도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의 손길과 기도로 환자의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고 불안과 두려움은 슬며시 가라앉게 되지요. 이렇게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회복이 되면 제일 먼저 이 분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을 환자의 치유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쓰는 이 분은 믿는 바를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더 행복합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해 초조하고 불안했을 토마스 사도는 오늘 복음에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온전한 믿음과 사랑의 울림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 사도의 행복한 고백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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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하느님

외모로 볼 때 한 평범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일까 추측과 억측들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도 하고 엘리아라고도 하고 혹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베드로를 필두로 한 사도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 정도면 되었을까요?

요한 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 생애의 거의 끝에서 예수님 정체에 대한 유다인들의 실언 하나가 언뜻 스쳐갑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다고 해서, 유다인들은 신성모독의 죄명으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변하십니다. 그 때 그들은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 하고 얼떨결에 말합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정도가 아니고 바로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 자기 내면의 소리에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 말씀은 같은 요한 복음의 20장에서 발췌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당일, 토마스를 뺀 나머지 사도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는 자기가 직접 보지 않았으니 부활을 믿을 수 없노라고 버텼습니다. 그 다음 주일인 바로 오늘, 토마스도 같이 있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당신의 심장을 찔렀던 창구멍과 손발에 있던 못 자국을 만져 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역전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이 의심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위대한 진리 하나를 계시하시니, 토마스는 만져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1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증거를 보지 않고도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만, 주님은 사람들의 의심을 통해서도 위대한 진리를 알려 주시는 참으로 자비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이 진리는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우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시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마치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 주신 것을 큰사랑으로 알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셨다는 구원의 사랑은 창조의 사랑보다 더 큽니다. 이 사실에 우리는 더욱 크게 감사합니다. 마치도 부모님께서 우리의 불치병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장기를 떼어 주시고 당신은 돌아가셨다는 것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 황송한 진리가 오늘 토마스 사도의 고백으로써 밝혀진 셈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까지 바치신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 백남용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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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초대 신자 공동체에서 사도들은 ‘많은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면서 주님을 전합니다.(제1독서) 이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났기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으로, ‘부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새롭게 변화됩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후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 가운데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하고 인사하시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크게 기뻐합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아서 동료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도 마다했던 것 같습니다.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려고 유다 땅으로 가시려 할 때, 스승을 기꺼이 따라나섰던 제자가 바로 토마스였습니다. 그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면서 머뭇거리던 다른 제자들을 독려했습니다. 이렇게 토마스는 스승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충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더 크게 상심하여 두문불출했던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스승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남다른 충정 때문에 크게 상심한 제자를 남다른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던 대로 해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믿음의 걸림돌을 치워주십니다. 동시에 그의 믿음이 한층 더 굳건하게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의심을 극복한 토마스는 주님을 증거하는 데에 일생을 바칩니다.

우리 역시 토마스처럼 하느님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혹은 너무 원통한 일을 당하게 되면 ‘하느님이 정말 계신가?’하고 의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풀어줄 수 있는 증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징표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징표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존재하신다면 과연 선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의심이 들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께, ‘죽었었지만,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분’(제2독서)께 간절히 청하면 좋겠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태양이 비치지 않을 적에도 태양을 믿게 하소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적에도 사랑을 믿게 하소서.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적에도 하느님을 믿게 하소서.”

서울대교구 손희송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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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화창한 봄날의 기운이 무르익으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몸도 마음도 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하는 고민이 어디로 가느냐 입니다. 목적지가 정해져야 어떻게 갈지, 무엇을 할지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그릇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면 갈수록 목적지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목적지는 자비하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주는 신앙 여정의 올바른 등대, 북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일러주는 삶의 나침반은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요한 20,31)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 한 20,28)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가는 여정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과 영원한 일치를 이루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어떤 길을 선택하여 달려가야 할까요?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엿봅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사도 5,15) 이제 병자들을 포함하여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모여 옵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에게서 예수님 자비의 얼굴을 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 자비의 얼굴, 예수님 자비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아니 보여주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생활에서 핵심이 되는 세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 기도,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는 가운데, 하느님 의 자비로운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 떠올려지는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자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의 전령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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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늘도 두려워하면서 맞이하는 부활

1. 부활을 노래하는 예수의 제자들은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아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예수님 부활을 맞이한 사람들의 특징이 두려움인가요? 그래서 오늘도 교회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문을 모조리 닫아놓고 있는 것인가요?

오늘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또한 교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교회 문이 꽁꽁 닫혀 있으니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온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목청 높여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만, 정작 성당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으니까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나병 환자들인가요?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피해서 다닙니다.

2. 가난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교회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할 곳인가? 본당은 신자들에게 소공동체에 참여하라고 독려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많은 이가 평일에도 일하지만, 주말에도 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가난한 사람들은 노예와 같이 살아갑니다. 소공동체 운동마저도 그들을 맞이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는 사실 교회에서 사라진 지 꽤 됐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정직하게 말하려고 하면 눈치를 봐야 합니다. 아직도 죽음의 세계에 사로잡혀서 숨죽이고 있는 교회인가요?

가난한 사람들은 죽음의 세계에 사로잡혀서 소리도 못 내고 있고, 교회 언론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 부자들이 항의한다고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가지각색의 고통을 겪으면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성당에서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귀를 막고 그 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곳으로 더 깊이 도망간 교회인가요?

3.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도 무덤에 묻혀 버린 교회인가?

정통성을 강조하는 거룩한 가톨릭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곳이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서로 나누고 희망을 찾아서 나설 수 있는 곳이 못 되니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문을 모조리 닫아버린 교회란 말입니까?

서울 대방동 일대는 중국 교포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실제로 주민의 20%가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말이면 신자들로 미어터지는 성당에서 외국인이나 중국 교포들을 찾아보긴 어렵습니다.

반면 그들은 우리가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예배당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4. 오늘의 토마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우리의 손을 보여 주고, 창에 찔렸던 우리의 옆구리에 손을 넣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선포하고 나서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우리라고 떳떳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도 죽었다가 죽음을 이겨낸 부활의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만이 하느님께 회개하도록 촉구받는 때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기뻐하고 소리쳐 외치면서 부활 찬송가를 부르는 우리도 부활을 진실하게 맞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숨어있던 곳을 박차고 나섭시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오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이겨냈노라고 생생하게 외쳐야 하겠습니다.

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부활의 기쁨을 선사하셨듯이, 오늘 교회도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박물관과 같은 죽은 교회에서 미라 같은 부활 예수상만 바라보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죽음의 흐느끼는 소리가 말없이 울려 퍼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손과 옆구리에 아직도 십자가의 흔적이 선명하게 살아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참으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부활의 알렐루야를 흥겹게 노래합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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