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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조회수 | 2,246
작성일 | 07.04.14
오늘 복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고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 복음서는 그것이 안식일 다음 날 저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오늘의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제자들은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나누신 이별의 식사를 기억하고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말씀의 전례에서 만나고, 그 말씀과 실천이 우리 안에도 살아 있게 하려고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면 일주일 후를 뜻합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같은 집회에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본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은 발현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뜻에 맡겨진 용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불어넣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주신 것으로 복음이 말하는 것은 창세기 2장(7절)에서 얻은 발상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 제자들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용서를 믿고 선포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묵시록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유럽 중세 교회가 과제로 안고 있던 문제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게르만족은 난폭하고 그들의 부족 수령에게만 무조건 순종하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도 모르거니와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부족의 수령이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교회가 도입한 것이 개인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기의 잘못을 성찰하여 죄를 찾아내고, 본당 신부에게 와서 그 죄를 고백하는 제도입니다. 고백한 사람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신부의 선포를 듣고, 보속을 받아 행합니다. 보속을 주는 것은 죄인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용서를 얻기 위해 난폭하게 과도한 보속을 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성사가 오늘도 존속하기에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고해를 듣는 신부의 임의에 맡겨진 용서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시대적 여건에서 발생한 개인고백 고해성사를 아직도 강요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한 시대에 필요하였던 법을 다른 시대에도 강요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타납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는 고해성사가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기에 궁여지책으로 교회가 마련한 고해성사인 양 오늘은 엉뚱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버린다고 주장하는 유대교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자비를 은폐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후 100 년경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세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삶을 실천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였어도,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그분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살고 싶은 사람은 그분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통달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배워서 하느님의 일인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받아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었습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그 일을 실천하다가 당신 아버지에게로 가셨습니다.

▶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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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로서,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입었던 흰옷을 벗는다 하여 전통적으로는 ‘사백(卸白)주일’이며, 2001년부터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이라 불리는 날이다. 후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2000년 대희년을 맞아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면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기념하도록 당부하신 데서 시작되었다.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1905~1938)는 가난했으나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 농부 집안의 10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나, 12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가정부로 일하며 동생들의 생계를 도우다 20살에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일찍부터 영적 은총의 삶을 살아왔던 성녀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손으로 붉은색과 흰색의 두 갈래 빛이 비쳐 나오는 자신의 성심을 움켜쥐고, 다른 손을 내밀어 강복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성녀에게 예수 성심을 공경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성녀는 자신의 일기에서 첫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성경이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일깨우고 둘째,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을 실천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셋째, 이 신심운동의 목표는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위한 것이라 요약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하느님 자비의 사도’였던 파우스티나 수녀를 대희년과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는 가톨릭교회를 위한 첫 성인으로 시성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은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고, 빈 무덤은 토마스 사도를 방황하게 하였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토마스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자비의 사도’로 파견하신다. 세상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단죄하였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 세상을 용서하라고, 자비를 베풀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이다.

잠시 각자 자신에게 ‘예수님을 본 적이 없음에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보자.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에 속하며,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가 되었음을 깨닫자. 부활하신 주님은 일찍이 하느님의 첫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된 우리를(창세 2,7 참조) 오늘 다시금 성령의 숨으로 탄생시켜 세상과 이웃을 향한 자비의 사도가 되게 하신다. 단지 일상이 주는 정신적, 물리적 고통과 시련에 맞서지 못하고 쉽게 주저앉아 버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하여 나가자. 내가 먼저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고, 어떤 잘못이든 용서하지 못하는 자와 용서받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용서에 사랑을 더하여 자비를 베푸는 사도가 되자.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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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런 일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율법과 제사가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준해서 행동하며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사는 사람의 행동 양식을 그 시대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사람이 노력하여 얻은 것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가져와서, 그 시선으로 보고,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처리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행위였습니다. 어느 시기부터 율법만 생각하고 제물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과 제사 의례를 만들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고, 율법과 제사를 매개로 사람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하느님은 사라지고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제사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잃었고, 한편에는 존경받아야 하는 지도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실의에 찬 죄인들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현실에 도전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죄의 멍에를 쓴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병은 죄에 대해 내리신 벌이라는 그 시대의 통념을 깨고, 병자를 고쳐서 하느님께서 벌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도자들은 모든 불행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불행과 벌의 출처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였습니다. 자녀들이 불행한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을“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 그러하다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실천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실천이 자비로워야 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실천이 용서라야 합니다.

▦ 부산교구 김태환 요셉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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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

요한의 부활 이야기는 부활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도 집 안으로 들어오시는데, 이는 부활한 몸이 현재의 이 몸과 차원이 다른 몸임을 알려줍니다. 이는 우리 부활과도 직결되는데 부활 때 이 몸이 그대로 부활한다면 우리는 라자로처럼 다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병이 있는 분들은 지병을 지닌 상태로,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은 분은 나이 든 상태로, 어릴 때 죽음을 맞은 이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십자가를 두 번 지게 하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현재의 몸과는 차원이 다른 몸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물론, 부활한 몸이 지금과 차원이 다른 몸이라 해서 우리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부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여기서 부활은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그런 변화된 몸으로 되살아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육신의 부활입니다.

요한이 이야기하는 또 한 가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항상 주간 첫날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주일마다 모여 왔습니다. 물론 승천 사건이 있은 뒤 제자들이 만난 예수님은 승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승천 이후에는 더 이상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보거나 만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시면서, 쪼개어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이야기는 이런 부활 체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쪼개어진 빵의 형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졌으며,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며, 받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됩니다. 하지만 가끔 인간적 생각으로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는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시는 듯 토마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찌 보면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종종 토마스처럼 이야기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오늘도 이야기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을 직접 보고서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은 제자들처럼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음에도 부활을 믿고 십자가를 지고 산다면, 그 믿음은 부활을 보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진정 더 행복한 이들이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나는 과연 쪼개어지는 빵의 형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기꺼이 그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토마스 사도처럼 직접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겠다며 버티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우리의 부활 신앙을 점검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4월 3일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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