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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꿈나무, 땔 나무
조회수 | 2,418
작성일 | 07.04.18
완연한 봄기운이 무르익는 4월이 오면 저는 88년의 봄이 떠오릅니다. 88년은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올림픽이 열렸던 해입니다. 그런 까닭에 88학번은 소위 ‘꿈나무’ 학번이라 불렸습니다. 저는 꿈나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꿈을 머금은 나무, 혹은 꿈을 실현하는 나무 등등 희망이 가득한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고서 새로운 말을 들었습니다. ‘88 땔 나무’라는... 한 동안 ‘땔 나무’라는 말이 마음속에 불안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사도들의 확신에 찬 진술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 받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기뻐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모욕조차 기쁨이 되는 신앙, 그것이 부활에 기초한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수에 나타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고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을 향한 애틋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모습에서는 가슴이 저미도록 아프기도 합니다. 이어서 “나를 따라라”하시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헤아릴 수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사실 저는 아직도 그 부활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겪지 못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내면적인 욕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창한 희생이나 자선. 눈에 보이는 봉사. 그것만이 부활을 위한 죽음은 아닐 것입니다. 일상의 안에서 작지만 필요한 곳에서의 봉사.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오직 주님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소박한 희생이 곧 죽음이며 부활의 길일 것입니다.

꿈나무에서 땔나무로의 추락은 이제와 생각하니 참으로 필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언제나 꿈나무일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땔나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불살라 다른 이들에게 따스함을 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곧 죽음이요, 부활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저런 말보다 먼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라라.”

의정부교구 이종현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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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 말에는 사랑을 뜻하는 말이 세 개가 있습니다. 이는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육적인 남녀의 사랑을 말하고, 필리아는 친구 사이의 우정, 우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가페는 신적인 무조건적 사랑을 뜻 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아가페) 하느냐?”베드로가 대답합니다.“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는‘아가페’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베드로가 대답할 때는‘필리아’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아가페’로 물으시고, 베드로는‘필리아’로 답합니다. 다만 세 번째 예수님의 질문에서는‘필리아’라는 단어가 쓰이고, 베드로의 대답 역시‘필리아’가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아가페’수준의 사랑을 물어보셨는데, 베드로는‘필리아’ 수준의 사랑으로 대답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세 번째 물으실 때는 예수님도‘아가페’로 하시지 않고‘필리아’로 말씀하십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베드로를 생각해 주심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계속‘아가페’로 물으시는데, 대답은‘필리아’에 머무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 사랑은 차원이 다른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랑 고백을 세 번이나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양들을 잘 돌보라고 세 번이나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양들을 돌볼 권한을 베드로 사도에게 확실히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권한을 가진 사람은 또한 많은 사랑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아가페)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이승익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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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라는 시몬 베드로의 말과 그를 따라가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 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늘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결정도 아무런 고심도 할 필요 없이 그냥 맹목적으로 그분을 따라가면 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스승이 부활하셨다고는 하지만 예전처럼 늘 함께 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간혹 불현듯 한 번씩 찾아와 주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아직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단지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것은 죽음 이전에 예수님처럼 자신들이 느낄 수 있는 그 자리에 자신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신 분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들이 원하는 그 자리에 늘 함께하고 계신 분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홀로서기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것은 바로 자신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측면의 눈에 보이는 위치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바로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살아생전의 그 모습처럼 늘 함께하고 계심을 그들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독서인 사도행전의 말씀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하셨던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늘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바로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 곧 제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 안에서의 자신감이며 삶의 원동력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아멘.

▦ 의정부교구 정재웅 마티아 신부 : 2016년 4월 10일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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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사랑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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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세상의 끊임없는 조건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도 산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과 세상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면서 예수님께 사랑의 고백을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도 물으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에 선뜻 “예수님,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라고 베드로처럼 대답할 수 없다. 주저하고, 외면하고, 모른척한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세상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과 다르다. 우리에게 조건을 제시하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얼굴이 이쁘고 잘 생기면, 공부를 잘하면, 돈이 많으면,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권력이 높으면 우리를 사랑하겠다고 말하면서 조건을 제시한다. 세상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조건들을 채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쫓으며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을 얻는 길임을 믿기에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 궁극적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구하며 살아간다. 궁극적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길은 무엇일까? 기도이다. 기도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과 대면하는 것이다. 기도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과 대면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의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부터 기도는 시작된다. 그리고 나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예수님 앞에 내어드리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대답하기 위해서 예수님과의 추억,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해도 괜찮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시간을 내어드렸고, 몸과 마음과 정신을 봉헌하였으며,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연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수님을 향한 나의 기도가 많이 미약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기는 한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괜찮으니 기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묻는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의 대답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다. 왜냐하면 기도,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노력과 연습은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실질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실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도는 사랑의 연습이다. 사랑은 매일 연습하고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계속되는 시행착오를 통해서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처럼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대답하고 싶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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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명식 요한 사도 신부 : 2019년 5월 5일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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