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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말씀에 귀 기울여라
조회수 | 2,283
작성일 | 07.04.18
무얼 좀 잡았느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베드로는 예전의 직업이었던 어부로 돌아갈 작정을 합니다. 혼자만이 아니라 동료제자들에게도 선동하며 떠나갑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요한 21, 3).

베드로의 이 말에는 무엇인가 잔뜩 기대를 걸었던 세상사에 실망한 인생살이의 스산함이 묻어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무엇인가 한 자리 차지할 줄 알았는데, 스승 예수님께서 어이없이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어 믿었던 희망이 물거품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참으로 부질없던 세월이라는 한탄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떠납니다. 신앙에 입문하여 자신이 추구하던 세상 복락이 돌아오지 않자 미련 없이 믿음을 떠나버리는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과연 신앙 안에서 우리가 잡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쳤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실망과 허탈함을 가득 안고 뭍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시어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실의에 찬 슬픈 모습을 바라보시게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을 가득 안고 그들에게 또다시 삶의 의욕과 희망을 주시고자 합니다.

쓰러진 우리의 삶에 또다시 생기를 북돋아 주시는 일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우리가 그토록 잡으려 했던 그 모든 것을 얻지 못해도 당신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오늘 묵시록의 저자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묵시 5, 12).

넘치는 풍족함

부활 사건 이후 고기잡이를 떠난 제자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교훈이 있습니다. 분명 제자들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물가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 6)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때야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됩니다. 고기잡이에 이력이 날 정도로 전문 어부였던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쳤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뭍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고기를 잡았냐고 묻더니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라고 합니다. 누가 과연 그물을 던지겠습니까? 십중팔구, “거기도 아까 던져 봤수다.” 조금 더 성질이 괴팍한 어부의 표현이라면, “너 누군데 우리 심기를 건드리냐?”라고 응답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물을 던집니다. 분명 그분이 주님이신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세어 보았더니,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되었다고 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전공이 어부건, 수학이건, 음악이건 각각의 영역에서 반드시 실패 없이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누구에게나 실패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 있다고 생각되던 일들도 벽에 부딪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요리 전문가도 어떤 때에는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며, 아동교육 박사라 할지라도 자기 자식 교육에서는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 나가던 일들이 벽에 부딪쳐 풀리지 않을 때,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주님 말씀에 믿음의 문을 열고 들으라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의 핵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인생살이에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심지어 점쟁이나 무당을 찾는 교우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그깟 물고기만 주시겠습니까? 더 큰 것을 왜 채워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기적을 믿지 못하고, 말씀에 귀 기울지 않았기 때문에 생을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부활은 분명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사건입니다. 가끔 집안에 불화가 있다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성당에 나가 독서와 복음 말씀을 듣거나, 혹은 강론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씀 같다는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씀 같은 것이 아니라, 분명 나 들으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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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153의 의미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두 번씩이나 파견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과 충격 속에 잠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감과 그에 따른 확신을 잃어버리고 다시 과거의 직업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 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요한 21, 3) 예수님의 갑작스런 죽음과 연이은 부활의 사건 속에서 제자들은 혼란 과 좌절, 그리고 의욕상실 속에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 역시, 지난 세 번의 배반은 아직도 그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남아있었고 예수님과의 관계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직접 다가가셔서 말씀 하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제자들처럼 성소의 위기를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소명의식과 삶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 5) 그리고 삶의 방향을 정해주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요한 21, 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다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하시 고 관심을 보이십니다. ‘애들아, 너희는 고기를 잡지 못하지 않았느냐? 왜 그토록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느냐? 방황하지 말고 나에게 와서 나의 지시를 따르도록 해 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바로 주님의 지시를 받는 삶인지 아니면 주님의 지시와 관련 없는 삶을 사는지가 관건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졌더니,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 쉰 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의 의미 는 교부들에 따르면, 그 숫자보다는 제자들이 불확실과 좌절 속에서 새롭게 일어나게 됐다는 것,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것(주님의 지시에 따름), 그리고 그물이 찢어 지지 않았다는 것(교회의 선교사명과 포용력)입니다. 우리나라의 모나미 153볼펜은 주님과의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신자였던 송삼석 회장님이 회사가 도산위기에 있을 때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요한복음 21장 11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고, 결국 MonAmi 153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즉 주님의 지시에 따르면 그만큼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의 지시와 관련이 없다면 허탕할 수밖에 없고, 관련이 있다면 그만큼 열매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춘천교구 민상영 요셉 신부 : 2016년 4월 10일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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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베드로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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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 그런데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마태 26,75 참조). 그래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알아들은 감동적인 응답이 됩니다. 그 사랑은 이미 받은 은총에 더 풍성한 은총을 더해주시는, 오히려 죄 많은 곳에 은총을 풍부히 내려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사랑을 조건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요한 13,6) 하면서 거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충실성에 두게 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내가 이만
큼 내어드리니까”라는 조건적 사랑에 머물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요한 13,37) 라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기도 합니다.

만약 베드로가 조건적 사랑에만 머물렀다면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이후에 수치심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죄의식 속에만 머물지 않고 은총에 은총을 더해주시는 그분께로 향합니다. 그리고 눈물로써 고백합니다. 전에는 내가 충실해서 충실한 만큼 사랑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분께 이제는 눈물로써 진실된 응답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내 방식으로 내 힘으로만 죄를 극복하면 되고, 신앙의 성숙과 성장도 조건적으로 계산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정한 극복과 신앙의 성숙은 조건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성경 속의 주인공이 ‘내’ 가 아닌 ‘주님’ 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교황님 말씀처럼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 대답을 당당하게 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성찰하고, 자신의 죄의식 속에만 갇혀있지 말고 이런 죄 많은 나에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은총에 은총을 더해 주셨는지 들여다보고, 그리고 주님의 그 무한한 사랑에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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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민상영 요셉 신부 : 2019년 5월 5일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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