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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활은 새로운 시작
조회수 | 2,247
작성일 | 07.04.21
따사로운 봄 햇살이 싱그럽고 맑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나무에 연초록빛으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이 때에 우리의 마음에도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으면 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시간의 재생을 이루는 기점이 됩니다. 이전까지의 역사적인 시간이 소거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점입니다.

인간에게는 시간을 재생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다 지우고 다시 새롭게 시간을 재생하고자 하는 이 버릇은 세계 어디서든지 연말 연초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매해 연말이 되면 역사적 시간을 소거하기 위해 송년이다, 망년(역사적 시간을 지우고 잊으려는 것)이다 하며 혼란스러운 때를 보내고 새해에 새로운 날을 맞이하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그 혼돈스러운 때에 세상의 질서들이 전복되고 무질서와 혼돈이 횡행한 극단적인 행동들이 일삼아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서적으로 보면 재미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를 성서에서는 혼돈(chaos)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가 행해진 상태를 질서(cosmos)의 상태라고 합니다. 즉 사람들은 매해 연말이 되면 창조 이전의 상태인 혼돈상태로 돌아가서 역사적인 시간들을 모두 지워버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해에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서 창조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성서적으로 창조의 때는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한 때이고,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역사적인 시간들을 모두 소거하고 하느님과 함께 한 원형의 삶이 간직된 창조의 때로 돌아가려는 모습은 너무나도 성서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역사적 시간의 소거와 원형의 삶으로의 회귀는 부활을 기점으로 한 이 시기에 명확히 보여집니다. 신앙인에게 부활은 새롭게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었고, 그 구원을 통해 얻은 우리의 상급은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위해 사순시기 동안 회개의 때를 보냈고, 성찰과 통회를 통해 우리의 역사적인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시간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정화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의 처지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활은 우리의 역사적 시간의 소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삶으로 우리의 삶의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다시금 창조의 때로, 하느님과 함께 살던 원형의 삶을 간직하고 있는 창조의 그 때로 돌아가 새롭게 삶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던 나의 삶의 처신들을 모두 소거하고 다시 하느님과 함께 살았던 시간으로 회귀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고백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 우리가 행하고자 했던 일들은(고기잡는 일, 2-5절)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 일들이 풍성히 이루어졌다고(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6-11절)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 안에는 새로운 창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이별로 인해 큰 상실감과 슬픔에 빠진 제자들에게 세상은 두렵고 무서운 곳이었지만, 그들의 부활 체험이 그들의 처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전의 제자들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게 되었고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은 제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새로운 창조를 이룹니다. 이전까지의 역사적 시간은 소거됩니다. 부활을 기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 삶은 용기있고 희망적인 삶입니다. 그 삶은 새로운 창조의 삶이며,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삶, 즉 구원의 삶입니다.  

인천교구 김학선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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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 저자는 오늘의 복음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티베리아스(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사도들에게 발현하신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에 오는 교회의 시대에 교회가 지녀야 할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잡아 올린 153마리의 물고기와 그물은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공공성)을 암시하는 상징입니다. 153이라는 숫자의 해석에는 예로니모 성인의 해석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해석이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그리스 동물학자들의 견해를 따라 물고기의 종류가 153종이라는 해석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십계명의 10과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恩賜)의 7을 합하면 17이 되고 1에서 17까지의 수를 더하면 153이 된다는 수학적,상징적 해석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더 나아가 3곱하기 50=150이 되고 여기에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을 더하면 153이 된다는 우의적(寓意的)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우의적 해석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100을 많은 이방인으로 해석하고 50을 이스라엘인들로 해석하며 3을 삼위일체로 해석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해석은 그리스 세계에 유포되어 있었던 동물학적 견해를 전제하나 유다인들의 세계에는 생소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수학적,상징적 해석과 우의적 해석은 자의적(恣意的)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사도에게 제기하신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물음과 내 양들을 돌보라는 세 번의 사명부여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는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을 암시하는 상징입니다.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공간적 단일성과 본질적 단일성이라는 두 가지 단일성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공간적 단일성은 각 지역교회가 주교님과 일치되어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통해 교회의 보편성을 가시화(可視化)합니다. 본질적 단일성은 지역교회들이 하느님 말씀의 선포,증거와 성체성사의 공동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교회의 보편성을 가시화합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은 교회의 주교적 구조와 모든 지역교회의 주교님들 상호 간의 일치의 필요성에 근거하며 이 일치의 결정(結晶)을 로마 주교님(교황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선교활동을 통해 발생한 교회의 단일성과 보편성이 그분에게서 유래한다는 진리를 세상에서 실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상호 간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 교회의 조직과 제도를 넘어서는 본질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교회의 참모습을 현시(顯示)하는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인천교구 홍범기 베드로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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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마태 4,18-22)과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마르 6,45-52)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루카 9,10-17)와 최후의 만찬(루카 22,14-20) 등을 차례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처럼 첫 만남에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 후 몇몇 제자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생업이었던 ‘어부’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사실 이들에게선 예수님 부활에 관한 확신보다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하는 모습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떠납니다. 그들은 밤을 새워 열심히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물고기를 잡으려 했던 시간이 ‘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는 그때는 아침이 될 무렵, 즉 어둠과 대비가 되는 ‘밝음’의 순간입니다. 어둠과 밝음의 극적인 대비로 예수님의 등장은 ‘빛으로 다가오시는 분’, 더 나아가 ‘생명의 주님’(요한 1,4 참조)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우리에게 다시금 말하려는 듯합니다.

한편, 이때까지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명확하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에게- 더욱이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고기잡이라면 전문가인 그들에게 자존심 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고 그 결과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고기를 걷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요한은 “주님이십니다.”(요한 21,7)라고 말하면서 정확하게 예수님을 인식합니다. 또한, 요한의 말과 더불어 빵과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습관적으로 판단한 그물의 방향과 사용하였던 고기잡이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고 알려주시는 것을 들으며, 바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할 때, 모든 일이 그분의 뜻대로 풍요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몸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과 그것에서 그들을 일깨워 주시는 그분의 깊은 사랑과 특별한 교육법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그분의 부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재촉하지 않으시고 그들 삶 속에서 깨닫도록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하고 당신의 힘으로 일이 진행될 때, 그 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게 해 주시면서 당신께로 더욱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러한 초대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 인천교구 김상인 필립보 신부 : 2016년 4월 10일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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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찬란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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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의 도는 이처럼 밝으면서 동시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 쉬움으로 치자면 부부간에서도 드러나지만 그 지극한 데 이르러서는 성인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중용(中庸)의 말이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삶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이때 도와 일상이 서로 긴장감을 가지고 교차한다. 도는 일상 안에서 구현돼야 하고 일상을 통해서 드러나지만 그 깊은 의미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찬란하고 초월적이다. 일상과 초월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중용이란 두 점 사이의 중간지점이 아니라 일상과 초월이 만나는 현장이다. 일상이 초월화되고 초월이 일상화되는 찬란한 평범함.

오늘은 부활 제3주일이다. 매년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부활을 맞이하지만 그것은 단지 교회 전례 안에서 일뿐 나의 평범한 삶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성탄은 그에 비하면 조금은 현실적이다. 추운 겨울과 하얀 눈 그리고 산타, 교회에서가 아니더라도 자본과 만난 연말연시의 성탄은 설렘과 기대라는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부활은 초현실적으로 여겨지는 과거의 사건에 한정돼서인지 진정으로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죽음이 있고 나서야 부활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수고스러울 뿐 아니라 나는 사순 시기 죽음을 체험했는가를 되묻다 보면 언제나 제자리인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하게 된다. 탄생이 인간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에 비해 부활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죽음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어렵다.

우리의 체험과 먼 그래서 초월적인 이 부활은 하나의 분열을 낳았다. ‘부활을 기뻐해야 한다’는 강박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의 괴리다. 인간의 감정만큼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것이 없는데 ‘해야 한다’는 당위로 감정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 그럼에도 우리들의 부활은 기뻐해야 한다는 감정의 범주에 어느새 구속돼 버렸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활체험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무엇이 문제일까.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기쁘게 선포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법정 앞에 세웠다. 오늘 독서의 대사제는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느냐”며 제자들을 몰아세운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고 제자들이 일을 꾸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했는데 그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태도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예수보다는 더 찬란해야 하며 더 위대해야 하고, 상상 이상의 존재여야 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초월을 일상과 분리시키고 율법의 준수를 강조해 살아 있고 인격적인 하느님을 살해시켰다. 그들의 일상이란 초월하신 하느님이 빠진 계산적이고 인과적인 삶의 연속이며 그들에게 초월이란 당면한 현실보다 언제나 화려해야 하는 신기루다.

그들에게 살해된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서 새롭게 부활된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묵시 5,12)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이다. 유다의 지도자들, 아니 어쩌면 우리들의 편견으로 매장당한 평범한 일상과 그것에 담겨 있던 초월을 하느님은 다시 일으키셨다. 그 일상이란, 누군가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려야 하는 작지만 위대한 생명, 어린양이다. 초월과 일상이 만나는 지점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초라했던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는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으로 비춰진다.

오늘 복음은 부활에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던 우리에게 또다시 당혹스러움을 안겨 준다. 부활에 관계된 이야기가 너무나도 평범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오늘의 부활 이야기는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과 만났던 기억들을 고스란히 소환해 내고 있다.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여 제자가 되게 했던 만선(滿船)의 추억,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무작정 물로 뛰어든 베드로의 단순함, 5000명을 먹이신 빵과 물고기의 풍요로움, 마지막 만찬 상에서의 기억,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배신 등이 오늘 복음 안에서 오마주 된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적은 평범한 과거의 일상(日常)들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렴풋했던 그분의 신원이 부활 사건으로 명백해지면서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했던 초월적 사건으로 다시금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은 특정 인물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일회적 사건을 지시하거나 죽어야 부활한다는 메마른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평범한 일상, 잿빛 기억으로 소멸해 갈 것 같았던 삶 전체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어린양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했고, 함께했던 매일의 삶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또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과 찬미를 받을 수 있는 초월이며 부활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주신 것은 일상의 소중함인지도 모른다. 그렇고 그런 누군가의 건조한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인 ‘나’로 부활하는 것. 나의 육신뿐 아니라 나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찬란한 의미로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의 기쁨은 그것을 알아차림으로 인해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닐까?

얼마 전 종영했던 한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에 부는 달콤한 바람…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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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 가톨릭신문 2019년 5월 5일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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