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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진실과 증거
조회수 | 2,227
작성일 | 07.04.21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진실과 증거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이 증언은 이미 분노와 미움을 초래하였었다. 회개를 위하여 외치는 진실의 소리가 다른 이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21,1-19: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만나 고기잡이 기적을 이루는 장면(요한 21,1-14)과 그리스도의 모든 양떼에 관한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장면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고 보고하고 있다(요한 21,1.14). 그리고 고기잡이 기적이든, 수위권 부여든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고기잡이는 교회론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밤새도록 애썼으나 헛수고만 하여 포기한 제자들(3절)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풍성한 고기잡이를 이룬 것(7절), 153마리의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11절), 고기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11절)이다.

고기잡이 기적은 선교사명을 암시한다(루가 5,1-11 참조). 그 유사점을 보면, 어부들이 밤새껏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상황이 바뀐다. 그물을 가득히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사도적 활동의 결실을 이룬다. 오늘의 고기잡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없이 하는 공동체의 노력(헛수고)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노력(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만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는 ‘신비스러운 완성’을 뜻하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현존’하심으로 결실이 비롯된다. 비록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조직하는 임무가 있지만(3절) 그들의 성공은 그리스도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이렇게 제자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는 베드로의 사목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고기잡이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어린양들과 양떼들을 돌볼 직무를 맡기시고(15-17절)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으로서 교회의 구원의 모든 활동에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신다. 베드로가 갖는 권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권위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빠스카 선물’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봉사직은 사랑의 능력에서 비롯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사랑 안에 성장하게 되어있다.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목직과 봉사직은 더 큰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16.17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목직을 부여하시면서 그의 순교에 대해서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18절)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19절).

베드로의 봉사직 사목직과 목숨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자기의 뜻을 중요시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데서 완전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W. Marxen). 베드로의 직무와 다른 모든 직무는 오직 예수께서 하신 바와 같이 먼저 고통과 십자가상의 죽음의 직무가 되어야 부활의 직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직무가 되리라는 것이다.

제2독서: 묵시 5,11-14: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묵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모든 만물이 경배를 드리는 천상전례를 묘사하고 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12절). 이 어린양은 흠숭을 받으시는 분으로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옥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께서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토록 받으소서”(13절). 그러므로 오늘도 영원한 빠스카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을 취하심으로써’ ‘주님’이 되신다(필립 2,7-11참조). 바로 이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제1독서: 사도 5,2732.40-41: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통하여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들과 같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진실을 전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하지 않겠습니까?”(29절)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일지, 시련의 길일지 모르나 아마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청하면서 우리도 진리를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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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

우리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면서 동시에 가장 하기 힘든 말은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사랑한다’라는 말을 너무 남용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연인으로 시작할 땐 서로 첫눈에 반해 매순간 생각나고, 떨어져 있으면 항상 같이 있고 싶어하며, 같이 있으면 너무나 행복해 한다. 그래서 “나 너 사랑해” 하고 고백하고 혼인을 한다. 하지만 막상 함께 살아보니 혼인 전의 그 사랑이란 느낌이 점점 퇴색되어져만 간다. 그리고 ‘성격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헤어짐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과연 전에 고백한 ‘사랑해’ 라는 고백은 무엇인가? 아마도 순간적으로 눈에 씌워진 ‘콩깍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춘기 시절에 하늘을 보며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명확한 답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 다. 인간적인 사랑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그 답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 계시다.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셨기 때문이다.

‘사랑해’ 라고 고백한 사람은 ‘내 심장보다 네가 더 소중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 아낌없이 버릴 수 있음을 다짐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목숨을 내 놓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전에는 주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였기에 세 번이나 배반했지만,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그 사랑을 증거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큰 계명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지키고 증거하기 위해 목숨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우리에게 물으신다. “나를 사랑하느냐?”

▶ 정진성(아우구스티노) 신부
  |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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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순명을 통한 하느님 사랑에의 결합”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지 벌써 두 주일이나 흘렀습니다. 그때 환호하던 기쁨과 설렘이 아직 남아 심장을 뛰게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느새 부활의 기쁨을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고 계십니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느덧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기쁨에 환호하던 모습을 잃고 공허함과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것, 생업에라도 몰두하여 그 비어버린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밤새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이 빈 손질은 어떤 노력으로도 자신들의 빈 마음을 채우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헛손질로 헛수고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따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진 제자들은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의 명에 따른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이 순종을 통하여 자신들의 빈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시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부활의 기쁨과 설렘을 되찾아 주는 것도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으며, 언제나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찬 그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이 만남을 통하여 제자들이 더는 이전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과 새로운 삶으로 초대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새로운 삶은 예수님께서 이룩하신 부활의 삶으로, 말씀에 대한 순명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에 결합하는 삶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우리를 위한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과 마음을 드러내시며, 당신의 부활이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지 않고 그들의 삶이 되어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살며 그 기쁨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뜻대로 부활의 기쁨은 살아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순명하여 주님 사랑에 결합한다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고, 우리가 만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언제나 사라지지도 꺼지지도 않는 기쁨과 설렘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건희(안드레아)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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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삶의 직업터였던 호숫가로 직접 찾아가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다”(요한 21, 3). 제자들은 주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항상같은 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원래 자리라고 여겼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곳에 숯불과 물고기, 빵도 준비하십니다(요한 21,9).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이 사건은 현실적인 안부를 묻는 동시에 사도 베드로를 대표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와 같은 물음과 대답을 3번 오고 가면서 예수님은 앞으로 당신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베드로에게 닥쳐올 시련까지도 걱정하며 측은해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은 교회가 앞으로 베드로를 중심으로 특별한 권한을 행사할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권한은 베드로에게 교회를 다스릴 권한인 모든 ‘매고 푸는’ 권한이며 죄를 용서하고 교의에 관한판단을 선포하며, 교회의 규율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가리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3항 참조). 이사제직은 희생을 요구하는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봉사에 숨겨진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부활에서 그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남기는 이유는 세상에 드러날 교회가 앞으로 어떠한 목적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그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목자들에게 맡기신저 임무는 참 섬김이다”([교회 헌장]24항)라는 말씀입니다.

섬김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고 가장 낮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떼를 보살피는 것이 당신께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551항 참조).

오늘 복음에서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일상 안에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부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증거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세상과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인 “나를 따라라”(요한 21, 19)라는 말씀에 동참합시다.

수원교구 최변재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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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첫 마음을 찾는 부활 신앙--”

“어느 날 마트에 간 마리아 자매는 본당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생 레지나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마리아의 기억 속에 레지나는 세례 받는 날 매우 기뻐했었고, 세례 받고 얼마 되지 않은 날부터 본당 여러 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열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레지나의 그런 모습이 마리아는 너무나 부러웠고, 그런 자매와 친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봉사를 한 지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부터 레지나의 모습이 본당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함께 봉사하던 자매에게 물어보았더니, 경제적인이유로 모든 봉사직을 그만 두었고, 봉사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신앙생활까지 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때 그토록 기뻐했고, 그 기쁨으로 열심히 봉사하던 모습이 생생한데, 첫 마음을 잊어버리고 신앙생활까지 쉬고 있는 레지나의 지금상황을 보면서, 마리아는 헤어지는 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녀를 위해 화살기도를 바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앞의 이야기처럼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던 교우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쉬는 교우가 되거나, 혹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변하면서 힘들게 간신히 주일 미사만을 의무로 생각하고 참례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또한, 우리자신 역시 때때로 신앙의 삶보다는 세속적인 삶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는 나약한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부활 시기는 세례 때 다짐했던 열정적인 신앙의 삶을 점점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우리를 다시 부활의 은총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묵상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제자들도 더는 어떠한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의 삶은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잊고 싶은 듯, 옛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그러자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전 어부의 삶을 살았던 대다수의 제자도 베드로와 함께하기로 하고 따라 나섭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절망과 좌절의 마음으로는 어떠한 수확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요한 21,3 참조).

그러나 그러한 절망과 좌절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의 빛을 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첫 마음! 곧 그들이 주님으로 부터부름을 받았던 희망과 기쁨의 순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요한 21,6 참조). 그리고 그 체험을 한 제자들은 그때서야 바로 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봅니다(요한 21,7.12. 참조). 첫 마음을 찾은 제자들의 모습에 더는 절망과 좌절의 마음이 없습니다.거기에는 이제 희망과 기쁨의 축복만이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 신앙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하는 희망이고 축복입니다. 이러한 부활 시기를 통해 우리는 각자 자신의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내 신앙의 삶에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시기 동안 우리는 복음말씀이 전하는 부활체험의 증언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 나의부활 신앙으로 승화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주십니다(요한 21,9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증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사도 5,32 참조). 그리고 자신의 부활 신앙으로 찾은 첫 마음을 통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 안에서 올바른 삶의 기쁨과 희망을 찾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사도 5,41 참조).

▦ 수원교구 이재현 요셉 신부 : 2016년 4월 10일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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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한 베드로 사도는 다시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주님을 허무하게 떠나보내고 딱히 할 일도 없이 넋 놓고 있자니, 마음이 더욱 심란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고기라도 잡으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겠지요. 다른 제자들도 얼른 따라나섭니다. 오랜만에 해보는 그물질이라서 그런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동은 터오는데 허탕만 치고 있으니 은근히 부아가 치밉니다.

그런데 저만치 물가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라 무심결에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밤새 한 마리도 걸리지 않던 고기가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지경으로 잡혔습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릅니다. ‘저분은…’ 베드로 사도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주님이십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드로 사도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분명 놀랍고도 기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에게는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죄스러워서 마음이 괴로운데 막상 그분이 눈앞에 나타나셨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주님이 차려주신 아침을 먹는 내내 베드로 사도는 죄송한 마음에 주님과 눈길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이 친히 다가오셔서 똑같은 방법으로 용서와 위로를 건네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은 마치 베드로 사도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하게 오갑니다. 그리고 당연한 듯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주님은 용서와 위로의 말씀으로 베드로 사도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오래전 베드로 사도를 처음 부르실 때처럼 그렇게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죄스러운 마음에 어둡던 베드로 사도의 얼굴이 이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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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2019년 5월 5일
  |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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