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26.8%
[부산]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조회수 | 2,345
작성일 | 07.07.06
루가 10, 1-9 <또는 10, 1-12. 17-20>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는 세 개의 공관복음서들 안에 모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들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는 루가복음서에만 나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다(9,1-6)고 말한 다음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세워 보내셨다.”(9,51-52)고 말했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하여 먼 길을 가신 것으로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초기교회의 발전이 열두 사도들만이 한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이 별도로 일흔 두 사람을 더 파견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 외에 일흔두 제자도 파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십자가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사도행전의 전편입니다. 루가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사도행전을 그 후편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파견하신 제자들의 활동 상황과 그리스도 신앙이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알립니다.

루가복음서는 일흔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를 하면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실 때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 것이며,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지역을 떠나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이 파견에 나오는 말씀들은 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초기 신앙인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그 시대 상류층 사람이나 귀족이 여행하듯이 많은 짐을 가지고 호사스레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안락한 생활보다 선포하는 복음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는 말씀은 대우가 더 나은 집을 찾아다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은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의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중동 사람들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온갖 안부를 다 묻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 지체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통속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예의범절보다 선포할 복음이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환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에 이어폰 꽂고, 목에 무선 전화기 걸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로지 복음말씀만을 소중히 모시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복음 선포라는 말입니다. 기원 후 85 년을 전후해서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원 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과격파들이 로마 정권을 거슬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전쟁이라 불리는 독립 전쟁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식민지인 팔레스티나까지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전세(戰勢)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하였습니다. 그러자 과격파가 아닌 유대인들도 이 전쟁에 대거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이 전쟁을 외면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이 파견한 병력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어 전쟁은 유대아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기원 후 70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민족을 배반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런 해석은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하였고, 그들은 유대 민족이 증오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 한편 로마제국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로마 황제를 숭배하라고 강요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악조건에서 오늘 복음은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생명이 위협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선교는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에게 병은 육체적 고통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종교적 절망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불행이 닥치면 하느님 혹은 하늘이 벌하신 것이라고 쉽게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의 원인을 하느님 안에서 찾는 착각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고, 죄에 대한 대가로 불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살리며 사랑하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이 열두 사도의 파견과 별도로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의 노력으로 이룩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비정부 기구로서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기여하여, 발생하고 유지되는 유연한 조직체입니다. 유럽의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직자 위주의 경직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극소수의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의 무식한 사람들을 지배하던 중세 사회였습니다. 교계제도에 몸담은 사람들이 교회의 모든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신분의 서열 따라 복장을 달리하던 중세 사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그런 경직된 유산들을 지니고 삽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신분 서열을 만들지 말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스리고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면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경직된 과거의 유산을 털어버리고 섬김을 실천하는 유연한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451 26.8%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어 빛이 충만한 낮에는 모든 사물들을 정확히 볼 수 있어 우리가 가야할 길을 잘 갈 수 있지만 빛이 부족한 밤이 되면 어두움으로 인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대로 가기가 어려워집니다. 자연의 이러한 현상처럼 우리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삶에 있어서 기쁨을 느낄 때에는 낮처럼 삶이 환하게 보여 하느님을 찾기가 쉬워 보이지만 슬픔을 느낄 때는 삶이 밤처럼 어둡게 보여 하느님을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찾기 더욱 어려운 것은 인생에 있어 밤이 낮보다 길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환한 대낮에는 태양을 바로 볼 수 없지만 어두운 밤 속에서는 그 어두움을 밝히는 달을 볼 수 있듯이 어두운 고통 속에서 우리를 비추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더 정확히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도 그 고통의 의미를 알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희망의 꽃을 피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고통의 의미를 모른다면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없기에 추수할 열매를 맺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세상에 고통과 어둠이 많이 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추수할 것이 많이 있기에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는 것입니다. 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리 떼 가운데 어린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세상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매이게 되면 세상의 어두움에 물들게 되어 어둠을 밝히는 하느님의 자비를 제대로 못 보게 되기에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악령들을 복종시켰다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는 우리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추수하실 것이 많은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세상적인 어떤 결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하고 어둠을 밝히시는 하느님 자비에 감사드리는 삶이라고 보아집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세상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셨기에 세상의 어둠과 고통 중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세상에 묶여 있던 과거의 삶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삶의 어둠과 고통 중에서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세상과 우리를 밝히시고 추수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이상일 다두 신부
  | 07.06
451 26.8%
루가 10, 1-9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는 세 개의 공관복음서들 안에 모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들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가 복음서에만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다(9,1-6)고 말한 다음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세워 보내셨다”(9,51-52)고 말했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의 십자가를 향하여 긴 여정을 가신 것으로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초기 교회의 발전이 열두 사도만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행보를 이야기하면서 별도로 일흔 두 사람을 더 파견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 외에 일흔두 제자를 더 파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십자가를 통해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사도행전의 전편입니다. 루가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사도행전을 그 후편으로 기록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내려오시자 예수님이 파견하신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신앙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아, 사마리아, 시리아, 그리스를 거쳐서 그 시대 세계의 중심인 로마까지 전파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일흔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말씀은 열두 사도의 파견 때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 것이며,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지역을 떠나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이 파견에 나오는 말씀들은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가 이미 실천하고 있던 바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상류층 사람들이나 귀족이 여행하듯이 많은 짐을 가지고 호사스레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포하는 복음이 중요하지 그들 자신의 안락한 생활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는 것은 대우가 나은 집을 찾아다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은 그 시대 그 지방 사람들의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온갖 안부를 다 묻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 지체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예의범절보다는 선포할 복음에 충실하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환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람은 귀에 이어폰 꽂고, 목에 무선 전화기 걸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로지 복음만을 소중히 모시고 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이 제자들을 파견한다는 말씀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복음 선포라는 말입니다. 기원 후 85 년을 전후해서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원 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과격파들이 로마 정권을 거슬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전쟁이라 불리는 독립 전쟁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식민지인 팔레스티나까지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전세(戰勢)는 유대인들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러자 과격파가 아닌 유대인들도 이 전쟁에 대거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피신하고 이 전쟁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로마 정권이 파견한 병력이 도착하자 기원 후 70년 전쟁은 유대아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의 배신자로 미움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를 하느님이 유대교로부터 고개를 돌리신 징표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신앙의 참다운 상속자라는 자각을 더 깊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로마 정권으로부터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불충하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악조건에서 오늘 복음은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려운 그 시대 선교 행각이었습니다.

선교는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들을 고쳐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말로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에게 병은 육체적 고통이기도 했지만 또한 종교적 절망이기도 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인간은 병을 비롯한 불행이 닥치면 자기 잘못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시는 것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이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복음화는 우리가 겪는 불행의 원인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복음이 열두 사도의 파견과 별도로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말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의 노력으로 이룩한 교회 선교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일종의 비정부 기구와 같이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기여하는 유연한 조직체였습니다. 유럽의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교회는 지극히 제한된 성직자 위주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극소수의 지식인과 대부분의 문맹으로 된 중세 사회였습니다. 교계제도에 몸담은 사람들에만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교회였습니다. 신분의 서열 따라 복장을 달리하는 사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그런 것들의 유적(遺跡)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분 서열을 따지는 높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유스런 기여로 교회가 운영될 것을 원하셨습니다. 다스리고 억누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셔서”, 과거 신분 서열의 경직된 유적들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는 빌어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7.06
451 26.8%
무소유(無所有)하고 무인연(無因緣)하라

배우는 사람을 구분하면 학생과 제자가 있습니다. 학생은 선생의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스승의 지식과 기능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과 제자는 구분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예수 학생은 많은데 예수 제자는 더물다’고 누군가가 한탄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참 제자의 정신과 몸가짐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첫째로 ‘무소유(無所有)하라’고 했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 한 마디로 무소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지닌다는 것은 번뇌의 시작입니다. 무소유-그것은 곧 자유입니다. 무소유-그것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늘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 철저히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감싸고 소유한 진정한 하늘이십니다.

둘째로 ‘무인연(無因緣)하라’ 했습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한마디로 무인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인연 역시 번뇌의 시작이 됩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옳지 못한 일인 줄을 알면서도 혈연과 학연과 지연에 묶여서 편을 들 때가 있습니다. 동업자는 동업자끼리, 동창은 동창끼리, 종씨는 종씨끼리 모여서 서로 족쇄를 채웁니다. 그래서 이 인연이 번뇌의 싹이 되는 것입니다. 고향도 부모 친척도 버리고 출가하신 예수님은 그 어떤 인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물질의 소유도 이웃과의 인사도 거절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비인간적인 요구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인연을 끊음으로 외톨박이가 되라는 말도 아니고, 세상 것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무능한 이상론자가 되라는 말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참 제자의 길은 소유와 인연으로부터의 자유와 아낌없는 헌신의 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유를 포기 못해서, 인연을 끊지 못해서 고뇌하는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초라하고 부끄럽습니다. 주님 그렇더라도 사랑해 주시고 받아주소서. 아멘.

부산교구 김창대 신부
  | 07.06
451 26.8%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우리는 매일 주님의 성전에 나아가 묵은 자신을, 집착의 자신을, 갈등의 자신을 끊어버리고자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고통, 부활을 통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사제의 권고 말씀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 같은 주님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할 것을 또한 약속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처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며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인 우리들을 뽑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의 평화'를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아니 우리 신앙인들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를 부르짖는 교회와 절간이 날로 많아져 가고,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만, 우리가 바라고 부르짖는 평화보다는 불화와 불신이 팽배한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오늘의 현실은 이렇게 암울하기만 한 것일까요! 정치적 신념없이 오직 권력을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혼탁한 정치인들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의 축적에만 정열을 쏟는 그릇된 기업가들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제종교가 그릇된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과연 무엇이 오늘의 현실을 이렇듯 암울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평화를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화를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이가 어떻게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평화를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알지 못한, 체험하지 못한 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그들이 전하는 평화는 헛된 것입니다. 평화를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오늘의 현실을 만든 당사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찾고자 하는 평화는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하느님의 평화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평화입니까! 성서의 세상과 실제 세상사는 다르다고 하면서 재물과 명예, 지위와 권세를 찾고 쫓는, 이로 인해 울고 웃는 우리 자신이지는 않습니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 것이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시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평화의 사도로서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며, "당신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놓습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평화를 구한다고 하면서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가 잠깐 동안의 안식과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며 잠시뿐이나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한 안식과 위안, 평화를 가져 줄 수 있습니다.

평화를 구하고자, 평화 속에 머물고자하는 여러분! 평화를 빌어주기에 앞서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됩시다.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 자신 안에 평화가 함께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그가 바로 평화의 사도입니다.

▶ 경훈모 신부
  | 07.03
451 26.8%
선교임무의 핵심: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가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가복음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가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가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가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하셨음을 보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셔야 할 곳으로 또 한번의 제자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가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 파견(루가 9,1-6) 때와 똑같은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딱 두 가지이다.(9절)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이는 곧 성사(聖事)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는 그 곳에서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사람이나 병이 들어 마음과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이리떼와도 같은 백성들을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교화하여 그 나라의 어린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을 없다.

파견된 제자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한 동네가 연대(連帶)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거부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버리고 가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선교사의 거부는 곧 복음의 거부이고, 복음의 거부는 하느님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거부하는 동네 전체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12절)이다. 소돔이 어떤 곳인가? 도시 전체의 엄청난 죄상이 야훼의 분노를 싸게 되어 아브라함의 애끓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인(義人) 열명이 없어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멸망당한 도시가 아니었던가?(창세 19,24-28)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는 소돔보다도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일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선포는 그저 이리떼 속에 보내어지는 어린양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와 두 가지 임무, 즉 성사집행과 말씀선포를 준수해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복음을 선포하거나, 세속적인 특혜와 지위확보나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수용하는 작금(昨今)의 선교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대 신부
  | 07.0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83   [수도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  [8] 3443
782   [서울] 진정한 왕직은 봉사직  [5] 2949
781   [인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입니다.  [3] 3368
780   [수원] "천국 왕의 고난과 죽음"  [6] 2954
779   [춘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3] 3038
778   [대구] 왕이신 예수님과 부활  [2] 2873
777   [마산] 왕이신 그리스도  [4] 3054
776   [안동] 봉사의 삶  [4] 2846
775   [부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의 의미  [6] 3440
774   [광주] 예수, 왕중의 왕  3098
773   [전주] 예수님은 왕이신가?  99
772   [대전] 우리의 왕은 이렇다.  [2] 3087
771   [청주] 감사의 생활  [1] 82
770   [원주]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3] 2860
769   [의정부] 감동을 주시는 왕  [1] 77
768   [군종] 왕 - 섬기는 사람  [1] 81
767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4] 2660
766   [수원] 정해진 시간과 일들 안에서  [4] 2526
765   [대구] “희망의 징조"  [3] 2026
764   [의정부] “예수님 한 분만 이상하다”  [3] 673
763   [인천] “예수님은 ‘보스(boss)’인가 ‘리더(leader)’인가?”  [5] 2553
762   [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10] 2879
761   [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4] 2764
760   [마산]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3] 2514
759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  [3] 2345
758   [안동]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1] 1192
757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159
756   [춘천] 신념  [3] 2334
755   [원주] 재난의 시작  70
754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1] 2649
753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72
752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78
751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33
750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512
749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70
748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20
747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95
746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19
745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52
744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99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