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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착한 사마리아 사람 : 그리스도
조회수 | 2,629
작성일 | 07.07.13
제1독서: 신명 30,10-14

하느님의 법전은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킬 것과 항상 하느님께 나아오고 그분 안에 남아 있으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 그 법은 우리와 항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이 드러남을 말하고 있다. 즉 이웃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법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셨다(요한 12,1-8: 향유를 부은 마리아).

복음: 루가 10,25-37: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웃 사랑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강조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시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 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여기에 율법학자는 그러면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사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잃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오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생명을 되찾게 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인지를 묵상해 보기로 하자.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지나쳐 갔던 사제와 레위인의 부정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들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율법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일을 맡아 하는 자들로서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피를 만지고 부정을 탄다는 것은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그가 죽었다면, 시체를 대하는 것 자체도 부정을 타기 때문에 성전에서 자기들의 일을 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다는 율법에 매인 형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한 그에게 달려가서 즉시 응급 처치를 하고 끝까지 보살펴 주는 자선을 베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 각자가 강도를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강도일 수도 있고, 사제나, 레위인일 수 있고, 착한 사마리아인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중에서 과연 누구일까?

제2독서: 골로 1,15-20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나왔다가 그분을 통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그러기에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고 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로 평화를 이룩하시었다고 바울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죄로 잃었던 그 형상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한 그 형상을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는 닮아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다면, 인간의 모습도 사랑이어야 할 것이며, 이 사랑으로 우리는 이 모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과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즉 사마리아인과 같은 정신을 삶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랑을 실천하는데 인간적 사고나 기준에 얽매여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척도로 재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영원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든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했으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며, 그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 만물은 새로이 변화되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청하도록 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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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하면서 가장 가치를 두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사랑하고 있나요?

사람들은 실수든 아니면 고의로 그랬든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숨기고 싶어하고, 만일 그것이 드러나면 자신의 행동에 변명하거나 합리화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실천에서도 이런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들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분을 닮은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변명하거나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비유는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머릿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고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사제와 레위인과 다른 점은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실천 여부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어려운 사람을 보자 피해서 가버렸지만,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재산을 털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인은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 뒤에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에 눈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바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 사랑의 장님일 때가 많습니다. 자주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의 실천에 변명하고 합리화한다면, 우리는 아직 사랑에 눈이 뜨지 못한 장님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봅시다. 나는 과연 사랑에 눈을 떴는지 살펴봅시다. 나의 모습은 사제, 레위인, 착한 사마리아인 중에 누구의 모습입니까? 우리는 과연 지금 하느님을 닮은 자녀로서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수원교구 백경태(요한보스코)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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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 질문에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쓰여 있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율법만큼은 확실히 꿰차고 있었기에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하느님과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라고 그를 칭찬하시며 만족해하십니다. 하지만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이 칭찬에도 성이 차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럼 저도 예수님처럼 여러분께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진정 누가 우리들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율법교사와 같은 우리 모두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화를 들려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도 지나친 사제와 레위인과는 달리, 사마리아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자신의 노새에 태워 근처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돌보아 줍니다. 다음날 그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하숙비를 지불해주고, 주인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또한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다는 말까지 덧붙인 뒤, 홀연히 자신의 볼일을 보러 떠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무엇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상세히 들려주시며, 우리에게 골똘히 ‘생각할 거리’를 안겨 주십니다. 이어 처음 율법교사가 던진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물음에 현답을 얻기를 바라시며 되돌려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다저렇다 길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깊은 의미가 함축된 표현으로 당부하시며 끝을 맺으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일찍이 모세는 백성들에게, 주님을 향한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하늘에 있지도 않다고 전합니다. 또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으며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들을 실천할 수 있다는 간단한 지름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아주 가까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 이광휘(미카엘)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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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머리와가슴사이의거리

머리와 가슴은 아주 가까운 거리이지만, 머리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가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것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아는 것을 살라’고 요청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고, 마음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면, 너희가 살 것이다”(신명 30,16참조).

복음에서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는 이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예수님께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학자가 누가 내 이웃인지를 따지는 순간은 ‘앎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편견, 선입관, 의지부족, 두려움, 익숙함 따위가 앎이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방해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누가 이웃인지를 알려주는 대신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즉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28)하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러면 생명이 너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콜로새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은 바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진정한 앎이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백윤현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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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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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주제에 대해 답을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에 대해 철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중에서 중국 전국시대에 활동했던 맹자(孟子. BC 372-289)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근본적인 특성을 ‘차마 참지 못하는 마음’인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보았습니다.

‘불인인지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동물에게는 상대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배고픔을 면하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그냥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최소한의 도의(道義)나 양심을 지키려고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연민의 정이나 자비심을 갖고 대합니다. 인간의 착한 본성은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보게 되면 나타납니다. 그래서 맹자는 ‘불인인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바로 맹자가 이야기한 ‘불인인지심’의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불행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착한 심성을 갖고 있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금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가 동물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어둡고 탁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지 도저히 그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점점 더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무관심하기 시작했고, 불의를 보고도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나서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들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때에 과연 ‘불인인지심’을 가진 ‘착한 사람’은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의문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가 말한 인간의 착한 본성은 어쩌면 정답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고 말했던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순자(荀子. BC 300-230)의 말이 더 맞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요? 이 현실의 답답함을나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로 포기하고 있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해야 합니까? 아니면 현실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다고 인정해야 합니까? 어떤 답이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제1독서인 신명기의 말씀을 보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참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도움의 손길을 주저하지 않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임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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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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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가 적개심을 품고 바라볼 수 있는 이웃에 대한 온갖 편견과 그릇된 상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어렵겠지만 우리가 고정된 사고방식을 벗어버리면, 내가 증오하던 이웃이 오히려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은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율법 교사의 질문인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먼저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아마도 그들은 죽은 듯 보이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면서, 시체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다는 규정(이스라엘 법 전승인 미쉬나 규정)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부정을 피해 정결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고 결국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반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무너지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경계와 한계를 넘어섭니다. 증오하던 적이 참된 이웃이 되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늘 믿어 왔던 사고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누구를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느냐 하는 사랑의 경계와 한계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야말로 행동과 실천을 비추어 주는 핵심 요소임을, 사랑은 경계와 한계를 모른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교회의 큰 어른으로,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생전에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 …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겸손한 말씀이지만, 아는 것을 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지만, 누구에게는 평생이 걸려도 못 가는 먼 거리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오늘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참된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지? 지금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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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환 루카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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