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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가 10, 29)
조회수 | 2,323
작성일 | 07.07.13
형제, 자매 여러분, 연중 15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듣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루가 19, 27)

오늘 복음에서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는 예수께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우리도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누가 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는가?” 우리의 일상을 찬찬히 살펴봅시다.

이른 아침, 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 지쳐 잠이 모자란 아이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짜증을 내는 아이가 나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스러운 아이를 한 번 꼭 안아주며 ‘일어나야지!’하고 속삭이는 일 그것이 이웃이 되어주는 일이 아닐까요?

아침밥상에 여러 가지 나물 반찬을 만들어 올리는 아내의 손을 보았습니다. 깡촌으로 시집와서 평생 논밭에서 고생한 아내가 나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힘들지? 고생 시켜서 미안하구만!” 쑥스러워하면서 따뜻하게 건네주는 이런 말을 바라고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논매러 가는 길에 자식들 객지에 다 보내고 노부부 둘만 사시는 옆집 어르신을 만납니다. 꼬부라진 허리에 삽자루를 걸치고 논으로 나가는 그 어르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가끔씩이라도 식사는 잘하고 계시는지 먹을 거리를 들고 찾아뵙는 일, 한 참 일손이 부족할 때 어르신의 일을 먼저 도와 주는 일, 그것이 이웃되어 주는 일이 아닐까요?

점심 먹고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뉴스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해 보도합니다. 우리나라 민간인 김선일씨가 무참히 참수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아이들과 이라크 주민들의 모습, 미국 군인의 모습, 우리나라 의료부대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밤이 되어 아이들과 손을 잡고 저녁기도를 바칩니다. 몇 일 전에 장마비로 우리 논에 옆 논둑이 무너져 내린 일도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윗마을 젊은 사람이 안하무인격으로 덤벼들어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도 이웃입니다. 귀농해서 어렵게 농사를 시작한 그 젊은이인데 대견하게 생각하고 한 번 격려의 말을 해주는 것이 이웃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내가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이웃으로 느끼고, 이웃으로 여기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도,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도,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도 모두 이웃입니다. 나의 도움을 언제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피해서” (31, 32절) 지나간 사제나 레위 사람처럼 말고, “가까이 가서” (34절)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발자국만 “가까이”가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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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이재학 레오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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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 사람”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은 종교인이 아니라도 실천해야 하는 도덕률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제로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제관에 도움을 청하고자 찾아오시는 분들입니다. 물론 대부분 용돈을 어느 정도 요구하시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간혹 좀 더 많이 얻고자(?) 이야기를 지어내시는 분들 때문에 곤욕입니다. 차라리 그냥 좀 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사연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듣는 저는 거짓말인줄 알면서 진심으로 믿어주어야 하니 참 난감합니다. 혹여 의심이라도 하는 눈치를 주면 “어떻게 신부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열을 올리시니 속으로 늘 “그래 혹시 진짜일 수도 있잖아. 100명중에 1명만이 진짜라도 정말 그 어려운 처지의 사람 도와야지.”라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도와주고 나면 99.9%는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신부님들 모임에서 이러이러한 사람 왔었다고 하면 꼭 다른 신부님들께서 “우리도 왔었는데!”라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한번 두 번 자꾸 겪다보니 신부가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고도 의심부터 일어나고 또 의심부터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마음의 상처를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도와주었다가 어려움을 오히려 당하기도 합니다. 교통사고 당하신 어른을 도와주었다가 도리어 가해자로 몰린 경우도 생기고 좋은 일한다고 사람을 승용차에 태웠다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힘들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빨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며 지켜보고 이것저것 계산하고 따지다보면 도와주어야할 때를 놓치는 경우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와주어야할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가 온전히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에 있거나 강 건너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기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를 꺼린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가까이 두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이웃 사랑의 실천을 외면하고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허울만 쓴 가식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제2독서 콜로새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온 인류와 화해가 되도록 하셨듯이 우리 역시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역시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이겠다는 용기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늘 살아가는 실천을 통해서 오늘날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정도영 베드로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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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사랑하며 사는 사람

오늘 연중 제15주일에 듣는 복음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어떤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되는 예루살렘은 해발 750m높이이고, 예리코는 해발 250m의 낮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이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약 27Km정도인데, 이 지역의 특성은 경사가 많고 바위와 돌들이 많은 사막지역입니다. 게다가 강도의 출현이 빈번한 곳이었습니다.

복음의 ‘어떤 사람’은 강도를 당해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기고, 복음 말씀대로 초주검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을 보게 된 첫 번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오던 사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못 본 체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이었는데 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임을 알면서도 못 본 체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냥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되어있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손수 간호를 하며 봉사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자신의 돈을 들여 그를 치료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두 취했습니다.

이웃이 되어 주는 것,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은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예상하거나, 어려움을 미리 짐작하고, 나중에 생길 문제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면 우리는 사랑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따지고, 이익이 되는지를 계산한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람을 살릴 수 없으며, 다른 이들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여비서가 늦도록 일을 하다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고 칼에 찔리는 폭행을 당하면서 이 여인은 계속해서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를 향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조금 후에 이 집, 저 집 불이 켜지고 몇 사람이 창문을 내다봤지만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이 여인은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조사를 한 결과 38명의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이 목격자들은 다른 사람이 도와 줄 것 같아서, 괜히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귀찮아서 등의 이유를 대면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에 법원은 이 38명의 목격자들에 대해 벌금형을 부과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여러 나라에서는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지 않아도 징역이나 벌금에 처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는 제도가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실천적인 사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거나 재정적인 여유가 있을 때 사랑하고 봉사하겠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사랑할 기회가 있을 때, 다른 이들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 줄 기회가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고,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았는지를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아무 조건 없이 실천할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안동교구 차호철 세례자 요한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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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15주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랑은 사람살이에 있어서 핵심관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람과 사람살이에 있어서 모든 책임과 의무 또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종종 간과하는 것 같다.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사랑은 그저 허무하기 그지없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와 주님 사이의 질의응답이 사뭇 가슴을 찌른다. 율법교사는 주님을 시험해보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애매하게 질문한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총인데, 이 과정 안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주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하고 되물으신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루카 10,27)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나라 사랑, 친구 사랑, 일 사랑, 부모자식 사랑, 이웃 사랑, 가족 사랑, 하느님 사랑, 이성 간의 사랑 등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드러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은 결국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그 자체로 무한성과 영원성을 담보로 하는 지워질 수 없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일지라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진실한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며, 자유로운 내적충동으로 말미암은 참된 고백이기에 그 자체로 숭고하고 거룩하게 된다. 누가 만일 사랑한다고 약속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진실을 쉽게 왜곡하는 사기꾼이 된다.

사랑의 형태는 삶의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드러날 수 있지만, 모든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듯 사랑도 근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1요한 4,16)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는 것"(1요한 4,21)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그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고, 그 믿음은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정의와 평화를 낳고, 정의와 평화는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는 원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5)로 사랑의 삶을 사는 이들 삶의 태도를 가르쳐주신다. 사랑이신 분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의 삶은 이웃, 그중에서도 특히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리고 사랑의 삶은 이웃에 대해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도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도 않는 삶이다. 또 사랑의 삶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삶이다(1코린 13,4-7).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와의 대화에서 평소 성경을 통해 주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삶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들려주신다. 율법교사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주님의 물으심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고 말씀하신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리를 보고 기뻐"(1코린 13,6)하는가? 진리 혹은 진실이 없다면 사랑은 단순히 즉흥적 감상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진리 안의 사랑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는 것이고, 당신 계획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진리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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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어떤 젊은이가 길 가던 어르신께 물었습니다. ‘어르신, 이 동네 사람들의 인심이 어떠합니까? 저는 타지방 사람인데 이 곳에 살고 싶어 왔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전에 있던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어떠했소?’, 젊은이가 대답했다. ‘인색하고 인정이 없고, 남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남을 잘 도와주지도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도 전에 있던 마을과 다르지 않을 것이요. 중요한 것은 이웃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그 이웃에게 다가가려는 젊은이의 마음이 아니겠소?’

오늘 복음에 어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0,25)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이 무엇이냐고 되물으시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다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중부 지방(팔레스티나)을 가리키던 말로 기원전 721년에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자 유다인들은 강제 이주 당하였는데 그곳 사람들은 거기에 남아 타민족과 혼혈을 이루며 살았고 이들이 곧 사마리아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몹시 경멸하고 이방인 취급을 하였습니다.(1열왕 16장)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이는 사제나 레위인이 아니라 바로 원수로 생각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예루살렘과 예리코 까지는 27km(60여리) 밖에 되지 않으나 해발 차이는 무척 컸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m인 산악지대인 반면, 예리코는 해저 250m의 저지대로 해발차이가 무려 1000m나 되었고 그래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던 중이었던 것입니다.

예리코는 전통적으로 사제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그래서 사제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예리코에 있는 자기 집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사제가 지나가 버린 것은 자기도 강도를 만날까봐 겁이 났던 것이고 또 강도를 만난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율법에 죽은 이를 만진다는 것이 부정을 타는 일이었기에 자기 역시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길 반대편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는데, 레위인은 사제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특권층에 속하는 이들로 성전 관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준비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런 레위인 역시 율법 규정이 생각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지나쳐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율법의 규정에 사로잡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인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없는 사제의 제사 봉헌이나 자비가 없는 레위인의 제사 준비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이 이방인 취급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런 감정의 벽을 넘어서 자비를 실천했던 것인데,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돌보면서 그의 이웃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사제나 레위인들은 상대방 입장보다는 자기 입장을 먼저 생각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기 입장을 벗어나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만이 참된 이웃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말하자면 “너도 가서 그런 이웃이 되어주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고 또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가서 참 이웃이 되기를 다짐해 봅시다.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 이웃이 되어준다면 우리는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37)

▮▮ 안동교구 권상목 세례자요한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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