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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구원을 얻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조회수 | 2,391
작성일 | 07.07.13
제1독서 신명30,10-14
제2독서 골로1,15-21
복음 루가10,25-30

묵상길잡이 : 구원을 얻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심 없는 관심으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는 것이다.

1. 과잉인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빚에 쪼들려 집나가고, 동생하고 사는 소년가장(중3)은 사람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는 세상. "혼자 사는 노파, 죽은 지 2주만에 시신발견." 이러한 신문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철저히 외롭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들이다. 시내버스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시선은 밝고 반가운 표정보다는 "야!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는 또 뭐 한다고 세상에 나왔냐?"하는 눈초리들이다. 그 뿐이랴. 입학시험장이나 취직시험장에 가보면,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밀어내고 내가 들어간담?"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만, 모여 온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내 행복의 방해꾼'이 되어버린다. 경쟁사회인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따뜻한 관심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게 내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길거리에 쌓여있는 싸구려상품 같은 이른바 '과잉인간'이다. 이렇게 사람을 귀하게 느끼기가 힘든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이러한 각박함은 한층 더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진정한 관심이 아쉬운 실정이다.

2.사랑은 관심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 반대되는 것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잘 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래도 나에게 어떤 관심이 있지만,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미워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벽 하나가 천리(千里)'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벽 하나를 두고 바로 옆집에  살지만 누가 죽는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이사온 이웃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다 보면 잘못하다가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출퇴근길에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실려 가는 시내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 '익명성(匿名性)에서 때로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를 알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까지 다 알고 있던 고향에서는 행동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자유스러웠던가? 그러나 '익명성(匿名性)에서 오는 해방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도록 괴로워도 누구 하나 찾아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모두가 철저하게 외롭고, 뭔가에 쫓기며, 두려움에 떨고 있음이 사실이다. 모두가 마음 깊은 데서부터 기쁨과 어려움, 걱정과 희망을 나눌 진정한 관심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그 사랑은 곧 관심임을 알아야 한다.

3.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묻는 율법교사에게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혹시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 때문이었을까?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쳐버린다. 그러나 이단자로 취급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에게 갖은 정성을 다 기울이며 관심을 쏟는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셨다. 지상 생애동안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나병환자도 태생소경도 앉은뱅이도 중풍병자도 하혈하던 부인도 치유를 받았고, 율법학자도 백인대장도 혁명당원도 어부도 강도도 세리도 창녀도 배척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겐 하나같이 큰  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끝내는 당신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리고 오늘도 성체성사로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마음 속 깊은데서 갈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기 보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라, 밥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웃으로 다가갈 때, 모든 이는 내게 이웃으로  다가올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나 자신 좋은 친구 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법정의 '오두막 편지' 중에서)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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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가꾼 마음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구약 성서 신명기 6장5절과 레위기 19장18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시면서,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모두 착한 사마리아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예수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만 우리가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모상(模像)을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고, 가장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가장 가깝게 닮았다는 것입니까?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은 가장 하느님을 가깝게 닳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고 또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처음 하느님께서 남자를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동물들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후에 아담 앞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아담이 어떻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다 지었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아주 시큰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동물들을 지배할 수는 있지만, 동물들과 어울려 살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동물들이란 인간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와라는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이 하와와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더불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냥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지, 머리를 굴려서 모사와 계략을 꾸미고 배불리 먹고 마시고, 집어먹고 집어삼키고 싸우고 죽이고 지배하는 능력을 받았다 해서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짐승들도 이런 짓은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들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7-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압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의 비유 말씀을 보면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은 사람을 두고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는데, 첫번째 사람은 사제이고 두번째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동족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정말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고, 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제와 레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왜 강도 만난 동족을 보고도 피해 가 버렸습니까? 사제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성직자 혹은 신부쯤 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 사제도 저처럼 입으로는 사랑하라고 지껄이면서도 정작 행동으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랑이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입으로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제는 성전에서 설교를 할 때는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정작 죽어 가는 동족을 못 본 체하고 지나쳤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 사제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참으로 역설적입니다만, 그 사제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처지인데 피 흘리는 사람을 만짐으로써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사제의 핑계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사랑이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핑계로 사랑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깨끗한 손을 지닌 그 사제의 제사를 즐겨 받으시겠습니까? 문제는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손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슴입니다. 아무리 손이 깨끗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은 그 사제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제의 가슴 한구석에서는 강도 만나서 사경을 헤매는 동족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 소리를 묵살하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만 것이지요. 아마 그 사제가 성전에서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바친다해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성전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웃 안에 계시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최후 심판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유다인들 중에서 레위인들은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역시 사제와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 성전에서 봉사하고 성전에서 녹을 받아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레위 사람 역시 강도 만난 동족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도 역시 사제처럼 하느님을 핑계삼아 죽어 가는 동족을 외면했습니다. 부정한 손으로 성전에서 봉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그 레위인이 성경을 모를 리 없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생각, 괜한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이 발동하여 죽어 가는 동족을 도와 주라는 사랑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레위인이 아무리 깨끗한 손으로 성전에서 봉사한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사랑을 외면한 핑계들이 묘하게도 하느님을 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모두가 사랑을 외면했기에 하느님마저도 외면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유다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죽어가는 유다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자신의 돈을 들여 그를 치료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유다인들로부터 경멸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마리아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마리아 사람도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가슴속에는 하느님의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고 가꾸는 사람, 즉 예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느님을 닮게 되고 하느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온갖 군더더기와 쓰레기로 덮어 빛나지 못하도록 더럽히는 사람은 차츰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잃고 짐승으로 변하게 됩니다. “내가사제인데 부정을 탈수는 없지. 내가 레위인인데 성전에서 봉사할 손으로 저 피 흘리는 자를 만질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신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사장인데 체통이 있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 내가 전문가인데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내가 이 사회에서는 명사인데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돈깨나 있는 부자인데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나?” 이런 식으로 온갖 구실을 대면서 사랑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합니다.

지위와 명예, 재물과 권력, 안일과 향락이 인간을 인간답게 곧 하느님의 모상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빛을 발하면서 밖으로 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답게 되는 것입니다.

지모(智謀)와 계략(計略)에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머리 회전이 빨라서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없어서 축재(蓄財)와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그가 따뜻한 가슴을 지니지 못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탐욕에 빠져서 안일과 향락을 누린다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도 인간이 아닙니다.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 그리고 향락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이 차지하고 많이 누리는 것이 자기를 성취시키고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과 재물로, 권세와 명예로, 전문 지식과 학식으로, 안일과 향락으로 자신을 가꾸고 꾸미려고 애를 씁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꾸미는 동안 사랑의 마음은 더욱더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게 되고 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자신을 잃게 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사회에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하는 인간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지위와 명예를 내세우고 돈과 재물로 자신을 치장하고, 전문 지식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차디찬 가슴의 짐승들만 우글거리면서, 서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 앞에 내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이며,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얼마나 사랑이신 하느님을 닳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 스스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죽어 가는 이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꾸고 키웁시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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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PE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의지적 사랑’(아가페)을 강조하여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고 난 뒤,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를 맡기려 하십니다. 그러나 ‘감성적 사랑’(필리아)에 입각하여 주님의 질문을 이해한 베드로는 ‘나를 잘 믿지 않으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슬픔에 빠져듭니다.

베드로와 같이 ‘감성적 사랑’에 익숙한 우리는, 오늘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이 나와 거리가 먼 동화 속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일부의 사람은 바보 같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중심이 ‘나’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고 싶을 때, 내 처지에 맞추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도 내가 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예화의 내용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에게서만이 아닌 모든 조직체에서 공통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일관되게 ‘의지적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하여도, 하여도 비길 수 없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 그 사랑을 인정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 믿음의 사람이라면 감성적 사랑을 뛰어 넘어 의지적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지적 사랑’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곧 마태 5,38-48과 루카 6,27-28.32-36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실천은 루카 23,34에 나오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난 뒤“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고 기도하시는 부분입니다.

내가 내 친구를 도와주는 것 보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도와 줄 때, ‘의지적 사랑’을 더 잘 실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보다 원수를 사랑할 때 ‘의지적 사랑’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감성적 사랑’으로 우리를 자꾸 내몹니다. 그러기에 신앙 여정은 일생을 통하여 본성을 거스르는, 마치 용수철을 일직선의 철사로 펴나가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하였습니다. 조금만 힘을 늦추어도 용수철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사랑에 머물지 못하면, ‘의지적 사랑’은 금방이라도 불가능 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트남 중부 에안 빈교구의 장애인시설건립을 통하여 ‘의지적 사랑’에 충만한 많은 분들을 보았습니다. 신문기사를 보고 국내 뿐 아니라, 국외 멀리, 아프리카에서까지 적게는 일만 원 많게는 일천만원까지 성금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분들에게서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으로 의지적 사랑을 실천하며 사시는 분들이 많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앎은 저와 저의 동료들이 ‘감성적 사랑’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의지적 사랑’으로 계속해 갈 수 있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사랑은 놀랍습니다.

▶ 이성렬 요셉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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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강도 만난 사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예루살렘 성전 참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예리코 가까이 갔을 때, 내 앞에 두 사람이 가고 있었다. 예리코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은 강도들이 출몰하는 악명 높은 길이다. 위험한 길을 혼자 걷는 것이 두려웠는데, 마침 동족 두 사람을 만나서 길동무를 하게 되어 한결 마음이 놓였다.

평온은 잠시뿐, 함께 길을 걷던 두 사람이 갑자기 강도로 돌변했다. 그들은 무자비했다. 재물과 돈에 눈먼 그들은 나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내가 가진 것을 남김없이 빼앗아 달아났다. 속옷까지 빼앗긴 나는 벌거벗은 피투성이로 길가에 엎어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사제를 보았다. 나는 사제의 자비심에 나의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사제는 내가 사나운 맹수라도 되는 양, 뛰다시피 도망쳐 가버렸다. 나는 고통과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었다. 잠시 후 레위인 몇몇이 가까이 다가왔다. 율법에 충실하고 하느님 성전에서 봉사하는 믿음 깊은 그들은 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들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내가 징그러운 뱀이나 되는 듯 침을 뱉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해가 지자 기온도 빠르게 떨어졌다. 과다출혈과 저체온으로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사마리아 상인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나는 평소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돼지보다 더 싫어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틀림없이 저 사마리아인은 내 목을 눌러 할딱이는 숨통을 끊어놓고 달아날 것이다. 나는 차라리 원수 같은 사마리아 사람의 손에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목을 조르기는커녕 포도주로 내 상처를 씻고 기름을 발라 싸매주었다. 겉옷을 벗어 추위에 떨고 있는 내 몸을 감싸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나를 돌보아 주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건너가게 해준 사마리아 사람에게 축복 있으라.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그에게 영원한 행복 있으라.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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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거짓 자비 조심하기

3년 전 그라츠교구 신부님 한 분이 책 한 권을 보내 오셨습니다. 제가 작은 선물을 보내드린 것에 대한 그분의 답례였습니다. 그 때 받았던 책이 발터 카스퍼 추기경님의 『자비Barmherzigkeit』입니다. 이 책은 지난해 자비의 희년이 선포된 후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3년 먼지를 털어내고 몇 달 전에 그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비교하며 읽어볼까 하여 번역본도 한 권 구입했습니다. 읽기를 미루다 며칠 전에서야 첫 장을 펼쳤는데 어제는 이런 내용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거짓 자비Pseudobarmherzigkeit 조심하기.

행복에 참 행복과 거짓 행복이 있는 것처럼, 자비에도 참 자비와 거짓 자비가 있습니다. 이를 구분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혼란이 생기고 잘못 사용되거나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카스퍼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 자비의 한 형태는, 부당한 일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보다는 오히려 가해자를 더 보호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 그러한 입장은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 자비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나무라는 일 없이 모든 행동을 너그럽게 봐주는 자유방임주의와 같은 태도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부모가 자비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자녀의 부탁을 모두 들어준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태도는, 부모가 자녀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아 주는 대신 못 본 척하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자비는 때때로 아픔을 줍니다. 그 아픔은 수술할 때 우리가 겪는 아픔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수술할 때의 아픔은 우리를 해치려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치유하려는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거짓 자비의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의 태도에서 보는 것처럼, 머리로는 자비를 추구하고 입으로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정작 삶으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누군가를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늘 제 안에 거짓 자비가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더 절실해지는 오늘입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아멘.

▮▮ 마산교구 최문성 마르코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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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찢어져 열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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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을 이야기한 율법교사에게 이웃 사랑의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유로써 말씀해 주신다. 그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비유 말씀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등장인물인 사제와 레위인과 달랐다.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갔을 만큼 완전히 멀어졌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가엾은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치유해 줄 뿐만 아니라 초주검이 된 사람이 여관에 머물러 쉴 수 있도록 돕는다.

사마리아 사람이 초주검이 된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 번역된 희랍어는 σπλαγχνζομαι(스플랑니조마이)로, ‘동정하다’, ‘연민을 느끼다’는 의미도 있지만 ‘속이 쓰리다’는 의미도 있다.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속이 쓰릴 만큼 아팠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사람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그의 마음이 찢어져 열렸기 때문에, 초주검이 된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이웃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며 묻거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찢어져 열리게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니, 지난 2014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을 마치며 하신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이 리본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교황은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에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찢어져 이미 함께 머물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를 보고 속이 쓰릴 만큼 아프고, 마음이 찢어져 열리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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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승태 마티아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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