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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너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라!
조회수 | 2,314
작성일 | 07.07.13
나는 하느님을 믿는 신자(信者)로서 어떻게 하면 신앙의 기쁨과 보람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진정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삶은 어떠한 것일까? 이 물음들은 오늘날 빠듯한 세상살이에 몸과 마음이 매여 주일미사에만 겨우 참례하거나,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해버리는 우리들의 삶을 다시금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를 통해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제시해주고 있다. <율법학자의 첫 번째 질문> :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율법에 박식한 사람답게 그는 신앙인이 지향해야 할 본질적인 목적이 ‘영원한 생명’임을 명시하면서, 이를 얻기 위해 지켜야 할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을 거침없이 열거한다. <예수님의 응답> :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루가 10,28) 예수께서는 먼저 십계명(출애 20,1-17)의 근본 내용인 ‘사랑의 이중계명’이야말로 신앙인이 살아야 할 근본적인 삶의 규범임을 인정하신다(마르 12,29-31). ‘신앙인’이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보아주시며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을 온 존재로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사람인 것이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옳게 알고 있는 것을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우쭐해진 <율법학자의 두 번째 질문> :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이웃 사랑의 대상에 대해 묻고 있는 율법학자의 이 말에는 선민사상에 따른 편협하고 경직된 관점이 배어 있다. <예수님의 응답> : 오히려 예수께서는 예화를 통해 이웃 사랑의 주체, 이웃 사랑의 실천에 대해 말씀하신다. 강도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다. 외지고 험하며 황량한 광야로 둘러싸인 그 곳은 위험할 뿐 아니라 사람의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곳에 강도를 만났던 사람이 쓰러져 있다. 종교지도자로서 앞서 율법학자가 지체없이 읊어댔던 이웃 사랑의 계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를 애써 외면하고 지나쳐 가버린다. 그러나 당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 정성을 다해 돌보아 준다. 종교나 인종, 혈연이나 지연을 떠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사랑을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참된 이웃으로 제시되고 있다.

실상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시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나병환자도 율법학자도 세리나 창녀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다가가신 예수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운명에 내버려져 있던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목숨까지도 내어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이웃이시다(골로 1,20). 이제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루가 10,37). 우리 스스로가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참된 이웃이 될 때 진정 하느님의 사랑, 신앙의 기쁨과 보람을 체험하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구대교구 송재준(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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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십시오.

성모당에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모당에 오는 이들 중에는 어렵거나 힘들거나 아니면 성모님을 사랑하여 기도하러 오신 이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신 분들도 있고, 여럿이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기도하는 모습은 참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우리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님은 특별히 강복한 지방에 가서 기도하면 은혜를 더 쉽고 많이 받는다고 하셨고, 또 우리 교구민들 모두가 성모당을 참배하기를 권면하셨습니다.(1918년 10월 13일) 그리하여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하거나, 은혜를 구하거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성모당에 옵니다. 이들은 성모당에 와서 가장 먼저 성모님을 찾습니다.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와서 기도를 드립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성모당에 오는 이들이 모두 기도하러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당을 구경하러 오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오거나 답사를 오신 분들 중에서 기도는 하지 않고 사진만 찍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당을 지름길로 생각하여 지나쳐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구청 정문으로 들어와 성모당을 가로질러 교구청 후문으로 빠져 나가는 이들이 종종 눈에 뜨입니다. 그 외에도 구걸을 하러 오는 사람,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 데이트 하러 오는 사람들도 가끔씩 있습니다. 이들은 성모당에 오기는 하지만 성모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성모님을 지나가 버립니다. 이들은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강도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강도당한 사람 앞에 사제와 레위인과 사마리아인이 오는데, 그들 중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지나가 버리지만(άντιπαρέρχομαν)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다가가서(προαεδρενω) 강도당한 이를 돌보아 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율법학자에게 이르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서 너도 가까이 다가가서 자비를 베풀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는 성모님께 가까이 다가와 기도하지만,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성모님을 지나가 버리고 자기 일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주님을 제대로 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주님을 지나가 버리고, 자기 일만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는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함께 하고 도와주고 자비를 베풉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이웃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자신만 보살피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만 하려 합니다.

이웃을 만들려면 먼저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이웃을 만들기 위해 자비를 베풀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은 힘든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라, …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 너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 서준홍 마티아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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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웃’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011년, 우리는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 시대의 복음화’를 실천할 것을 다짐하며, 주님의 이 말씀을 함께 기억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주님의 모습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한 이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라는 주님의 간절한 부르심이었고, 우리 모든 교구민들은 그 부르심에 기꺼이 실천하는 삶으로 응답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웃’의 사전적 의미는 ‘가까이 있는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킵니다. ‘이웃’의 복음적 의미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렇듯, ‘이웃’은 ‘가까이 가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가까이 가는사람’입니다.

“그를 보고서는, 그에게 다가가, 돌보아 주었다.”

강도 만난 이를 지나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돌보아’준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아니었지만, 그는 ‘가까이 다가감’으로서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되었고, ‘자비’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은 가까이 다가감에서 시작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서로 ‘이웃’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교정(矯正), ‘뒤틀린 것을 바로잡다.’

오늘날, 마 음과 삶을 나 눌 기회가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사회는 양심이 뒤틀리고, 마음이 뒤틀리고, 가정생활이 뒤틀리고, 사회생활이 뒤틀리고, 관계가 뒤틀린 이들로 인해 점점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정사목은 이렇게 ‘뒤틀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이웃’에 대한 ‘이웃’의 관심을 촉구합니다. 회개하는 ‘이웃’의 죄까지도 은총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그 ‘이웃’의 죄로 인해 깊은 아픔 속에 살아가는 또 다른 ‘이웃’의 상처를 하느님께서 치유해 주시리라 믿기에, ‘뒤틀린 것을 바로잡는’ 하느님의 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누구라도 먼저 ‘다가가야’ 서로 ‘이웃’이 될 수 있고, 누구라도 먼저 ‘다가가면’ 서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한 이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교정사목과 함께 ‘이웃’의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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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착한 사마리아인 되기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동네에 거지들이 많았고, 때가 되면 동냥하러 오는 걸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 가끔씩 식사 때가 되면 동냥을 하러 오는 걸인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그 사람에게 식사를 차려 주시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남의 집 한 곁에서 셋방살이 하는 우리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비단 우리 어머니만이 아니라 그 무렵 어렵게 살던 모든 서민들이 또한 그렇게 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고 있는 그들에게 밥 한 끼 챙겨주는 것이 거창한 나눔이니, 사랑의 실천이니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인정상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던 대부분의 서민들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오늘날 오히려 어머니 세대 때 같은 사마리아인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보다 정이 없어서라든지 사랑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모두가 이런저런 것들을 염두에 두며 망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형편이 어려워서’, ‘시간이 없어서’, 혹은 ‘돕는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볼지’ 등의 망설임이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보고 느낀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망설이지 말고 그렇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사랑의 실천은 입으로만 해서도 안 되고, 가슴의 느낌으로 끝나서도 안되며, 실천하는데 망설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용기를 주님께 청하며, 우리 모두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김성일 모세 : 2016년 7월 10일
  |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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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새로운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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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사이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나를,우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시선에서 오늘 말씀이 새로운 삶으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음에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복음을 세상 안에서나-너-우리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과정을 지나간 결과, 삶의 자리로서의 공동체의 무한한 풍요로운 열매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와 우리를 위한 하늘 나라의 초대에 이웃이 되어줘야 할 고통받는 이들을 보내주신 주님의 성심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늘 나라의 진정한 표지를 그 안에서 보고 발견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새로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 사이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말씀은 일상생활에서 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성경의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충실함과 변화를 위한 우리의 역량을 확인하는 기점이며 핵심
적인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재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사회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그들의 삶이나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혹시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 앞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자신의 갈 길을 가기 위해 자주 침묵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런데 침묵의 시간 중에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질문이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를 통해 알지도 못하는 한 부상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형제’와 ‘적’을 구별 못하는 현명치 못한 처세로 취급되지는 않았습니까? 어쩌면 이러한 소박한 관심은 오히려 응답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이해를 받지 못하며 심지어 비난받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나-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더욱 복음에 희망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마치 앞을 볼 수 없는 장님 이었다면, 불을 켜는 일과같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나려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나-너-우리 공동체는 울타리 – 스스로 만들어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떤 울타리, 곧 자기 자신이나 가족 아니면 공동체 또는 민족일 수도 있는 울타리 - 를 열고, 밖으로 나가 고통받는 자매 형제들에게 가까운 사람, 곧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셨고, 당신의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지 않습니까!)

이렇듯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열고 나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창조해 주신 세상을 마음껏 숨 쉬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삶, 바로 ‘하느님 사랑’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이르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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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진수 시메온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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