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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조회수 | 2,620
작성일 | 07.07.13
어느날 어떤 율법교사 하나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여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율법서에 담긴 내용과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올바른 대답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예수님 말씀에 딴죽을 걸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웃사랑을 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분명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의 물음은 그 의도가 불순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이미 정해놓은 이웃의 범주,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만이 자신의 이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정관념에 예수님도 동의하시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물음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정해놓은 이웃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올 때에만 비로소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강도를 만나 가진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반쯤 죽어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사제와 레위 사람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괜히 도와주려고 만졌다가 그가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져 부정을 타게 된다’는 율법규정에 따라 결국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 이웃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길을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응급처치를 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간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돈을 써가며 누군지도 모르는 그를 돌봐달라고 청하며 떠났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 이웃이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언제든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분이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을 갈망하는 온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증오와 멸시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온 인류를 멸망으로 잡아끄는 죄에서 해방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매일의 미사 안에서 성체성사를 통하여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 그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신명 30, 14 참조).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여쭈었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 아니겠습니까?

전주교구 염태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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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있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 장마가 계속되는 여름, 한낮의 햇볕이 우리의 마음을 짜증나게 하고 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그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빙과류와 에어컨 바람에 의지하고 여름 휴가를 기다립니다. 보양식이라도 먹으려고 차를 타고 전주를 벗어나면 시원한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을 느낄 수 있게 펼쳐진 들판은 정말 끝이 없이 넓습니다. 작년에 강원도에서 손님이 왔는데 그 들판들을 보면서 우리 나라에도 이렇게 넓은 들판이 있다니, 쌀이 여기서 다 나오나봐요 하는 말이 귓가에 울립니다.

하지만 간간히 그 들판 사이로 보이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어깨엔 그 시원한 들판은 보이지 않나 봅니다. 모를 내기위해 땅을 갈아 엎어도, 비가 많이 오면 잠길까 물꼬를 틀 때도, 병충해를 입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도, 그리고 수확을 할 때에도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한숨뿐인가 봅니다. 이제 어렸을 때의 풍성하고 포근한 고향은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에 있지도 않고, 바다 건너에 있지도 않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가까이, 내 마음에 있고, 내 입에 있고, 그래서 실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젊은이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곧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사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큰 대의명분 속에 많은 이웃을 잃어 갑니다. 경제가 발전해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경제가 발전해도 고향의 집들은 비어만 가고, 무엇하나 제 꼴을 갖추지 못한,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옷도 벗겨지고, 매를 맞아 아무렇게나 버려진 강도 당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제 이웃을 찾습니다. 아주 멀리 가버린 우리의 고향의 이웃을 찾습니다. 경제발전이라는 강도에게 처참히 맞아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우리 농촌의 이웃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고, 우리 입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멘.

전주교구 이태신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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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제와 현자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들은 임금님의 명령을 들어 줄 수가 없는데, 들에서 막 돌아온 양치기가 사제와 현자에게 맡겨진 문제를 풀겠다고 자청 했습니다. 먼저 양치기는 임금님의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지 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양치기에게 간청 했습니다.

양치기는 그 질문에 대답 하려면 “우리가 옷을 서로 바꿔 입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임금님은 주저하면서도 답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양치기에게 자신의 왕실 예복을 주고 자신은 양치기의 남루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양치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거룩한 바꿈을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아 주님과 같아지도록 우리의 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으로 땅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어떤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낙인 찍히어 거리감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을 돌보아 주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쓰러져 있는 사람과 옷을 갈아 입지는 못해도 그것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면서 세상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 시키지 맙시다. 아니 쓰러져 있는 그곳으로 나의 발길을 돌려 봅시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와 바꿈을 하시고 강도를 만나 어려움에 처한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 안철문 이냐시오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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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그렇게 하라!


어느날 예수님은 율법교사로부터 공개적인 질문울 받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고, 그 대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답을 알면서도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는 율법교사(선생)였습니다. 이런 문제의 전문가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꾸로 질문을 받은 율법교사는 이미 알고 있던 답을 말씀드립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 하는것”이라고. 예수님은 옳은 대답이라고 하시면서,“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아는데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율법교사는 다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웃입니까?”이 질문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구체적이고도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누가 이웃인지를…그리고 다시 한번“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한 정답을 몰라서, 알려고 예수님께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알면서도 물었고 예수님은 질문자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스스로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알고 있는 그대로 행하라고 하십니다.“그렇게 하라” 그렇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뭐가 뭔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삶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결국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거듭거듭 말이나 머리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수없이 듣도 또 듣고 그래서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가장 먼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리셨다”고. 당신도 그러셨다고.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다고.

물론 겸손하신 표현의 말씀이셨지만, 아는 것을 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30센티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평생이 걸려도 못 가는 먼 거리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오늘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믿음은 결국 머리나 입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전주교구 정천봉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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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떤 율법학자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그에게 물으십니다(루카 10,36).
그 율법학자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라고 반문하시고,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라는 계명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계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웃으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계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이웃은 모든 사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인 사람과 이웃이 아닌 사람을 구분해 놓고서
이웃에게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 5,45-4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를 당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선인인지, 악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해서 초주검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관심 갖지 않습니다.
당장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에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라고 되어 있는데(루카 10,33),
'가엾은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냥 가버린 사제나 레위인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가엾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가엾은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실천했는가?'입니다.
가엾게 여기기만 하고 행동으로 옳기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강도당한 그 사람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자기가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다면
이 이야기는 사랑의 씨가 더 많은 사랑으로 열매를 맺은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원래 의도일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의 뒷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강도들이 강도짓을 멈추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다 죽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착한 사람들이 되어서 평생 보속한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도 나중에라도 뉘우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변함없이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들도 심판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관 주인은?
만일에 여관 주인이 자기의 직업에만 충실해서
받아야 할 돈을 다 받아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사제나 레위인과 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반대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과 친절에 동참한다면
그도 역시 또 한 사람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고,
남을 도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만일에 "나는 한 번도 남의 도움이 필요했던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남을 돕기만 했다. 나는 언제나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았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교만죄를 짓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자기가 한 일을 생색내거나 잘난 체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나는 처지가 어려워서 남을 도울 수가 없다." 라는 생각도 옳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각자의 처지에 맞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기만 해도 되는 사람도 없고,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너의 이웃이다.'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여라.'는
'모든 사람이 너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받은 사랑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사랑을 잘 줄 수 있는 법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자기는 사랑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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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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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판문점은 이제 분열과 대결의 장소가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장소가 되었다.”(조선 중앙 TV 메인 앵커)

“부자란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신 것은 그 달란트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멀리 있는 친척도 이웃만은 못해요”입니다. 항상 가까이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평소 왕래가 적은 먼 친척보다 더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선배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 신부~ 어떤 사제를 신자 분들이 제일 좋아하는지 아나?” “경건하게 미사 봉헌하고, 강론도 잘하는 사제요?” “친절하고, 웃으며 인사도 잘하는 사제요?”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재밌는 사제요?”“다 아니라네. 성덕도 아니고 겸손이나 친절, 유머감각이 아니라 나에게 특별히 잘 대해 주는 사제를 신자 분들은 제일 좋아한다네.” 사제를 평가하는 기준이 상대방의 언행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코린 13,1 참조)는 성경의 말씀처럼, 아무리 성덕이 뛰어나고 겸손하고 재밌어도 나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사제라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나 멀리 있는 친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도와준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그토록 존경하고 의지했던 사제도 레위인도 아니라 평소에 멸시하고 조롱하던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 착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참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참된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 웃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형제, 내 자녀, 내 이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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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신원철 안토니오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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