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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새벽을 사는 사람
조회수 | 2,456
작성일 | 07.07.13
아침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언제나 상쾌하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하는 하루의 새벽은 오늘 그 무슨 좋은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희망으로 우리를 설레이게 한다. 그래서 새벽은 희망이다. 그런데 정말 새벽은 언제인가? 해가 뜨기 바로 전인가? 아니면 해가 뜨고 난 바로 뒤인가? 그래서 누군가가 현자에게 물었다. ‘새벽이 언제 입니까?’ 그러자 현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새벽은 네 주위의 사람이 이웃 형제로 보일 때가 바로 새벽이다.’

새벽을 사는 사람은 많다.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희망을 전달하는 이들이고, 하루의 첫차를 운전하는 마을버스의 기사들은 승객들의 하루를 희망으로 가득 차게 해 준다. 그리고 새벽의 공기를 가르면서 일거리를 찾아 인력 시장에 나오는 이들은 가족들에게 희망을 간직하게 해 준다.(그러나 실업의 문제 때문에 새벽의 인력 시장도 가족들에게 희망 보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의 아침을 준비하는 주부는 가족들에게 희망의 양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 새벽시장은 우리네의 살림에 희망을 먹여 준다. 그리고 수도사들의 새벽 기도는 온 인류에 희망을 울려 퍼지게 한다. 이처럼 새벽을 사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새벽을 사는 사람은 희망을 전해준다.

새벽을 사는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이웃 형제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새벽을 살지 못한다. 매일 늦게 일어나니 말이다. 그래도 새벽을 살고 싶다. 언제나 새벽을 살 수 있을까? 그렇다 바로 주위의 사람이 이웃 형제로 보일 때가 바로 새벽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새벽을 살고 싶다. 우리들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이들이 모두 이웃 형제로 만날 수 없다. 새벽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의 행동이다. 그냥 그렇게 있으면 결코 이웃 형제를 볼 수 없다. 자신이 선한 의지를 갖고, 이웃 형제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이웃의 형제들을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선한 의지를 갖고, 이웃 형제들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벽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새벽을 살 수 있다. 늦게 일어나 한 낮의 태양 아래 살면서도 새벽을 살 수 있다. 아니 잠 못 이루는 어두운 밤에 살면서도 새벽을 살 수 있다. 그것은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래야만 언제 어디서든지 새벽을 살 수 있다. 새벽을 사는 것은 의지의 행동이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새벽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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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호동(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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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쉽게 말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6월 교구의 신부님들이 신학교에 모여 사제연수를 했습니다. 피정이나 연수 때에는 교구의 모든 신부님들이 모여 4박 5일 간 함께 지내게 되는데, 아직은 첫 걸음마(?)를 하고 있는 신부인지라 주교님과 원로 신부님들, 선배 신부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는 왠지 모를 어색함과 가슴 떨림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 안에서 뭉친 한 가족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나와는 대화도 만남도 거의 없었고, 내 이름조차 가물가물 하실 것만 같은 신부님들께서 “어이, 주신부! 잘 지내나? 요즘 영종은 어때? 돈 많이 벌었다며? 성당 지어야겠네.”라는 말씀들을 정답게 하시며 내게 다가오실 때, 또 경험 부족으로 사제로서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아시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시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실 때 한 형제라는 진한 감동을 받으며, “아, 이게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작지만 소중한 관심이 당사자에게는 큰 사랑으로, 큰 힘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체험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신부님들이 모인 그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보좌 신부 시절에 봉성체를 나가게 되면, 꼭 함께 다니며 봉사하시는 자매님이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며 마음 가득히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집에 들어서는 모습을 볼 때, “저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하지만 나와는 동떨어진 것으로만 생각하고,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사치쯤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언제쯤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먼저 모든 이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돈으로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으로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관심에서부터 사랑의 실천이 시작됩니다. 가장 작은 것들 안에서, 또 가장 쉬운 것들 안에서 사랑은 피어납니다. 이런 작은 것들 안에서 주님께서는 너무나 큰 은총과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가슴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 함께 활짝 웃고 서로 사랑하며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인천교구 주현철 라우렌시오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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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율법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서 공동체 안에 힘없는 작은 이들을 향해 항상 열려있는 주님 사랑을 체험합니다. 경직된 율법주의적 사고는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은 율법을 넘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게 인도합니다.
 
어떤 경우에 주님 사랑의 깊이는 너무 커서 우리가 그렇다고 늘 믿어왔던 사고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기도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이런 깊은 생각과 행동은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길에 휩싸여 주님의 뜻을 올바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사제와 레위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길 반대쪽으로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예루살렘은 주님 현존을 상징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에 비해 예리코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똑같은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거기에 맛 들여 우리는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주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주님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를 더 깊은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님에게서 멀어졌든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끼든지,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주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만남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을 거듭거듭 다짐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웃에게서 받은 따뜻함과 친절을 내 안에 묵혀 둔다면 그 또한 빚이 될 것이다. 그리고 뭣보다도 내 괴팍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서운함과 상처를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난 내 삶도 그만큼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무너지게 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과는 무관하고 다른 부류라고 여기던 사람이 오히려 참된 이웃이 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이유에서든 사제와 레위가 방관하고 외면했던 이웃의 고통, 엄격히 말하면 그들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사제와 레위의 여정과는 반대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세상의 죄와 악을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 교사에게 명확하게 요청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교회 공동체는 말만이 난무하는 새로운 천년기의 꿈을 표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실행이 결여된 말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 교사가 답변했던 지식이 그저 말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결국 누가 우리 이웃이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은 누가 우리를 사랑하느냐는 사랑의 실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행동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행동이 없이는 결코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행복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에게 힘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행복과 희망의 빛이 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우리는 바로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초주검이 돼 세상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홍승모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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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인터넷 방송 중에 이러한 글을 하나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팡파르가 울리며 폭죽이 터졌습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데, 백화점 사장과 직원들이 몰려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할머님! 축하드립니다. 저희 백화점 100만 번째 고객님이십니다. 여기 축하금 10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할머니는 엉겁결에 봉투를 받았는데, 백화점 사장이 할머니에게 웃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지요. “그런데 할머니 뭘 사러 오셨나요?”

이 말에 할머니께서는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응! 이 물건 무르러 왔어.”

사실 백화점 사장이 할머니가 무엇을 구매하러 오셨는지 물을 필요는 없었지요. 단지 100만 번째로 백화점에 들어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면서 축하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괜한 질문을 던져서 기분만 안 좋았겠지요.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생활하면서 쓸데없는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인데, 괜한 궁금증으로 인해서 결국 자신의 그 궁금증이 스스로를 곤란함 안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 몰라도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몰라도 되는 것은 꼭 알려고 하고 대신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어리석은 또다른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법칙으로, 우리들이 알아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어떤 분은 이렇게 핀잔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또 지겨운 소리를 하려고 하는군.”

사랑이라는 말이 아주 흔한 말처럼 되어서 그럴까요? 우리들은 사랑이라는 말에 아주 흔한 말, 지겨운 말, 그리고 이제는 듣기 싫은 말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본인의 죽음도 좋고, 다른 이의 죽음도 좋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죽음도 좋고, 미래에 있을 죽음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광경에서 어떤 모습이 좋을까요? 혼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좋은가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이 좋을까요? 바로 죽은 순간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과분한 일생을 살았는가는 얼마만큼 깊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는가로 판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제, 레위인보다도 더 하느님의 마음에 든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배격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임을 말씀하시지요. 즉,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알려고 하고, 무엇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중요한 것 하나뿐. 바로 사랑입니다.

▶ 조명연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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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사람

이솝이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이솝의 주인은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말했습니다. “얘 이솝아, 공동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욕하러 들어가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습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참 한심하지. 어디, 누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 앞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습니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습니다. “웬 돌이 여기 박혀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습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솝은 목욕탕 안에 들어가 사람 수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이솝이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그것 참 잘 됐구나. 너 나하고 목욕이나 하러 가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솝은 주인과 함께 목욕탕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공동탕 안에는 사람이 우글우글,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었습니다. “이 녀석,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고? 너 왜 거짓말을 했느냐?” 주인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솝이 말했습니다. “또 무슨 거짓말을 하려느냐?” “아닙니다, 선생님. 목욕탕 문 앞에 뾰족한 돌부리가 튀어나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다치기도 했는데, 누구 하나 그 돌멩이를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그 돌멩이를 뽑아 치우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오직 그 사람 하나가 보였을 뿐입니다.” “허허, 그래서 그랬구나.” 주인은 훌륭한 학자답게 껄껄 웃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말로만이 아닌 사랑의 실천으로 벗이 되어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결론을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 36)라는 질문을 던져,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루카 10, 37)이라는 답을 얻어냄으로써 마무리지었습니다. 아울러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하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리는 주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을 때 이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 힘이 자라는 데까지 능력껏 도와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이를 몸소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마음만 있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인간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 윤하용 베네딕토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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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청에 들어온 지 벌써 3주가 되어갑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필요한 것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래서 지난 3주 동안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근처 대형 할인 매장을 찾아가 많은 물건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제도 쉬는 날이고 해서, 대형 할인 매장을 찾아갔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힘들게 차를 주차한 뒤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마이크를 대고 인사하는 직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직원은 한 명 한 명 지나갈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어서 오십시오. **마트입니다. 즐거운 쇼핑 되십시오.”라는 말을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정성을 다해 인사하는 그 직원들과는 달리, 인사를 받는 고객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 같이 온 일행과 말하면서 무시하며 지나가는 사람,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 등등.

만약 내가 그 직원의 위치라면 어떨까요? 내가 정성을 다해 인사를 했는데도 그 인사를 무시하면 기분이 과연 좋을까요? 나만이라도 저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큰소리로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이에 그 직원 역시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밝게 웃더군요.

기분이 더 좋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기분 좋은 일은 항상 나로부터 쉽게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좋은 일을 내가 아닌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종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고, 그러한 조건이 채워지지 않음을 운이 없다는 이유로 변명합니다. 이렇게 주변에서만 기분 좋은 일들이 오길 바란다면 아마 평생 동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피해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들이 아니라, 그를 위해 큰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진정으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쉽게 착각에 빠집니다. 외부의 조건들을 채운 사람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라고 힘 있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역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만물 중 으뜸이신 하느님께 돌아가야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 율법교사에게 하신 그 말씀을 이제 우리들에게도 해 주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당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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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마리아인’(루카 10, 33)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공동번역: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루카 10, 30)

어떤 사람이 옷이 벗겨지고 매 맞고 초주검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이웃이 되어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의 가장 비참한 상태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이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그 상태를 저승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예수께서는 옷이 벗겨지고, 매 맞고, 초주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으셨다. 아무런 죄도 없으셨지만 모든 죄인들의 사마리아인이 되시고자, 모든 죽은 이들의 이웃이 되시고자 죽음마저 받아들이셨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가장 처참한 체험마저 마다하지 않으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

저승까지 가시어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죽은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시는 분,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닮을 때 우리는 올바로 사랑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먼저 사랑하셨다.’(1요한 4, 19참조, 나자렛 예수1,베네딕토16세, 305쪽 참조) 그 분만이 참 “사마리아인”(루카 10, 33)이시다!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28. 37).

예수께서는 우리도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사마리아인’,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무책임한 권력자들로 인해 없던 고통이 생기고, 있는 고통은 더 커져가는 사람들, 어떠한 법을 씌워서라도 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지 못하게 하는 권력의 남용자들로부터 핍박받는 사람들, 이웃의 개념이 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사람들에 의해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 어두운 방 안에서 누워 지내는 환자, 말기 암으로 고통이 심해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 안락사를 바라는 사람들, 우울증이 심해서 자살하려는 사람들, 심장이 뛰고 있어도 정신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 살아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 등,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28. 37).”

<인천교구 한의열 요셉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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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성당 친구들을 만났고, 저녁에는 아버지 생신이라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묵상을 하는데, 문득 이렇게 신부로 기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신앙의 모범과 씨앗을 전해주신 부모님, 신앙인의 자세를 잃지 않고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족들, 신앙을 외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성당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고등학교 때의 성당 친구들, 그밖에 주님과 함께 계속 친교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혼자만의 신앙생활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도 그렇지요. 혼자만의 생활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실 하느님도 우리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만들어 주신 것이고, 서로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주 착각 속에 삽니다. 나 혼자만의 삶을 꿈꾸면서 다른 이들은 나를 도와주는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그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개인이 일부가 되어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을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어떤 자매님께서 저에게 오셔서 하소연을 하십니다.

“신부님, 저 ***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더 이상 이 단체에서 활동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신자들이 저래요?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살지 않아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실제로 얼마 뒤에 그 단체에서 탈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일 년 뒤에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신부님, 그래도 그때 단체 활동을 했을 때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 덕분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내가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이웃이 된 사람은 누구였냐고 물으시지요. 먼저 사제와 레위인은 길반대편으로 피해갑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또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요. 바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신분에 상관없이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의 공동체에서 진정한 이웃이 되고 있을까요? 우리는 공동체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님을 잊지 않으면서,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이웃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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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 30장 10절에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라고 명령합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야 할 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복음 말씀에서는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의 답은 율법학자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적힌 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1독서에 나온 모세의 말과 복음에 나온 율법학자의 답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다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겠지요.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세상이 거짓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고 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모든 일이 사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베르나르도 성인께서는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이유이고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사랑합시다. 사랑은 어떠한 커다란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오늘 만나는 이들에게 웃으며 인사 한 번 건네는 것,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 한 번 해주는 것,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것에서 사랑이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 인천교구 서철원 다니엘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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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말씀은 너희 입과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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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때 선물로 받은 책이 있었다. 전 미카엘 신부님이 쓰신 『기상나팔』이라는 책이었다. 간단한 글들과 함께 삽화들이 있었다. 기억하는 그중의 하나. 성당에서 미사가 엄숙히 봉헌되고 있다. 사람들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바깥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엄마한테 말해준다. 그러나 엄마는 미사 중이니까 조용히 하라는 내용의 삽화였다.

남아도는 남한의 쌀과 굶주림에 처한 북한 지원을 두고 논란이 많다. 난민들을 두고도 논란이 많고, 낙태죄를 두고도 논란이 많다. 그 안에는 종교적이고 이념적인 갈등들이 배어있다. 아울러 논란이 있는 일들이 교회 안팎으로도 한 두 가지가 아닐 테다.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왜 ‘이웃’에 관해 물었을까? 그리고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의 믿음 안에서 이웃 사랑에 철저했고, 그러니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부심이 있었던 것일까? 하기야 유대인들도 이웃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이웃의 범주에 끼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이 있다. 복음서들에서는 개나 돼지로 여겨지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개, 돼지와 다를 것이 없는 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는, 초주검이 되어 눈앞에 놓인 한 유대인을 살린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종교, 이념적인 갈등과 증오로 유대인들 역시 원수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조차도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루카 10,37)이라고 하지 않는가? 같은 유대인들이 죽을 위험에 놓인 동족을 외면했던 이유는 같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종교적인 이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음 속의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모든 갈등으로 인한 감정과 이념을 제쳐두고, 그저 가엾은 마음과 연민으로 눈앞에 놓인 그를 살린다.

오늘 복음에서 무조건적인 용서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복음 속 사마리아인에게 반유대 감정과 원한이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저 그 누구라도 불쌍한 처지로 눈앞에 놓인다면, 어떠한 감정과 갈등을 뒤로한 채, 그는 가엾은 연민으로 돌봄을 받아야 할 이웃이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며,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이다.

감정과 이념들을 핑계로 정작 아파하는 처지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시선이, 예수님의 영이 아닌 세상의 잡념들이 우리 안에 자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여전히 영원한 생명의 길이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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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진규 도날드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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