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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이웃 사랑은 두 팔로!
조회수 | 2,434
작성일 | 07.07.14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있습니다. 드라마 전원일기로 전 국민의 어머니가 된 배우 김혜자씨가 쓴 책으로, 그녀는 이 책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전쟁과 가난 속에서 고통 받는 세계의 수많은 나라의 아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꽤 인상 깊이 남습니다. 특히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더더욱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를 두 팔로 안고 있는 김혜자씨의 사진들이 떠오르며 ‘사랑은 저렇게 두 팔로 하는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아직까지 머리에만 머물고, 입술에만 맴돌고 있는 사랑뿐인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도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사제와 레위인은 모른 채 지나가 버리고,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은 정성을 다해 사랑을 베풀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결국 사랑은 ‘아는 것,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리 ‘사랑’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잘 이야기 한다하더라도 베풀기 전에는, 두 팔로 옮기기 전에는 그것을 진정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며, ‘당신이 살 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는 길 양옆으로는 너무나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기대에 차서 베드로 사도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베드로 사도가 멈출 기색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 사도는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 앞에 멈춰 서서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이곳이 당신이 살 집입니다.” 그 사람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지나온 길에 아름다운 집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나를 이런 곳에 살게 하는 거죠?”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를 오해하셨군요. 이곳 천국에서는 당신이 지상에 살 때 올려 보낸 재료만을 갖고 집을 짓는답니다.”
  
세례 받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하늘나라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 27)
  
사랑이시며,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던 주님을 닮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복음에 나오는 사제, 레위인과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서로를 안아주라고, 신은 우리에게 두 팔을 주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안아줄 수 있는 두 팔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을 잊지 말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37)
  
형제자매 여러분, 연중 제 15주일 오늘은 또한 농민주일입니다. 외국의 값싼 농산물들에 맞서 건강한 우리네 먹거리들을 지켜나가는 참 농민들을 위한 사랑 역시 잊지 말고 실천하도록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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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김용한(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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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다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파 화가입니다. 그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네 아들도 모두 화가였습니다. 그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루카복음서 10장 25-37절이 그 배경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그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루카 10,37) 그래서 이 성화는 누가 참 이웃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성화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그중 두 사람은 전면에 크게 묘사되어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후면에 작게 뒷모습만 그려져 있습니다. 크게 그려진 두 사람이 바로 중심인물입니다. 한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알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의 머리와 발에는 피가 흐릅니다. 그는 머리에 천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빛을 가장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처 입은 사람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임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처럼 알몸에 수건만 걸치고 있고, 머리에 감은 천의 모양도 가시관 같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부축하는 사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강도를 만난 유다인을 도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라아인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옷 색깔은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색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제자처럼 강도를 당한 사람을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상처 입은 사람을 여관에 모실 작정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허리에는 단검이 있을까요? 그것은 원수관계였던 유다인을 칼이 아닌 사랑으로 대접하는 그의 행동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로써 착한 사마리아인은 참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인 후면의 두 사람은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 두 사람은 가장 거룩해야 할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두루마리 성경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성경만을 품에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제와 레위인은 이슬처럼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옷 색깔 역시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입니다.

그런데 후각이 발달된 개 두 마리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피를 핥고 있고, 노새 한 마리가 그를 실어 나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를 빨아 먹는 개 두 마리가 유다인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노새 한 마리가 사마리아인임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쳐지나간 유다인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이웃이 되어 준 이방인들이 새로운 교회의 주인이 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례 때 쓰이는 기름병이 눈에 띄게 놓여 있습니다. 기름은 상처를 싸매 주기도 하고, 구원을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누가 이웃일까요?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새로운 교회의 주인입니다.

▶ 손용환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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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과 교감

옆에 있는 친구와 방금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 ‘어? 나도 그런 생각했는데. 우리 생각이 똑같네.’ 이런 경우를 동감이라고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를 원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벌써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가 이것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알았어.’ ‘너의 눈빛만 보면 알 수 있지.’ 이런 경우를 교감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동감과 교감 중 어떤 것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앗, 내가 하느님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라는 동감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하느님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행하는 교감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남의 생각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내 생각은 이렇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저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교감을 이루면서 그 분의 생각을 미리 알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약시대 살았던 사람들도 예언자들이나 성경의 글귀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었을 뿐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직접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이 쓰는 언어와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당신의 뜻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행동에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여태껏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어오던 것과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태 율법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말씀을 따르려니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습니다. 나의 명성, 지위, 권력, 재산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씀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하느님과 교감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너무 아깝고 욕심이 나서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행동보다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느님과 교감을 이루어서 그분의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마음이 먼저 비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그만큼 더 쉽습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 장운철(마르첼리노)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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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저는 어떻게 해야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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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은 이웃의 자격이나 조건을 묻는 ‘닫힌 질문’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선택을 받은 ‘내 민족’만이 ‘내 이웃’이 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율법학자는 내 민족의 율법을 잘 지키는 자만 이웃으로 삼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율법주의 유다인들의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옳게 답해야 하는 ‘입국심사’와 같았습니다. 오답은 곧 방출입니다.

그런 살벌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대답하십니다. 이웃이란 내가 세운 ‘조건’과 ‘이해타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편에서의 선택에 따라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달리해야 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동참하여 온정을 베풀 때, 상대방의 참된 이웃으로서 자격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단일민족’을 주장하고,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혹시 율법학자처럼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며 나에게 불편함을 주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이웃목록에서 지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사형수, 노숙자, 장애인들……. 하지만 나도 이 사회에서 언젠가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부당하게 퇴직을 강요받을 수도 있으며, 몸이 약해져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오늘 내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닐까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께서는 내게 알맞은 이웃을 찾기보다 자비와 자선을 베풀어 먼저 이웃이 되라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줄 때 나도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고, 그렇게 이웃이 많은 나는 불안한 세상에서 외롭거나 두려움에 떠는 법 없이 마음 든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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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윤형식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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