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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조회수 | 2,453
작성일 | 07.07.20
제1독서와 복음은 묘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근동지방에서 손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은 왕이다’는 정신으로 낯선 손님들을 모셨고, 이 신비로운 손님들은 그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 마르타는 조상들의 이러한 환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신의 집에 들르신 예수님의 시중을 드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한편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참다 못한 마르타가 주님께 마리아를 부엌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하시며 이 얄미운 동생의 손을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한 기적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요한 2,1-12). 또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마태 11,19)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것을 마련하느라 바쁜 우리의 일상을 결코 하찮게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해 명확히 짚어 주십니다.

당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마르 10,45)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밥을 짓고 마실 것을 내드리는 일은 분명 보람된 일이며, 칭찬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22,27) 하신 주님의 속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기에 앞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우리를 섬기고 싶어 하십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게 해 드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가장 잘 섬기는 길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는 참된 섬김의 순서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 하는 권고로 시작하는 구약의 전통을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의 땀과 희생이 담긴 수고와 활동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요소입니다. 사랑의 봉사가 결여된 신앙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한편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하는 복음환호송의 외침처럼 올바른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모든 활동은 주님의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귀 기울여 들은 하느님 말씀의 열매인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이듯 활동과 관상은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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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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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

신앙 생활에서 일이 우선인가 아니면 기도가 우선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흔히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복음 말씀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전승에 따르면, 마르타의 행동에서 실천적 삶을 보게 되고 마리아의 행동에서 관상의 삶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둘 중에 비중이 있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행위는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마리아가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는 마르타의 동생이며,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베다니아 마을에 사는 나자로의 동생이기도 합니다(요한 11,1-2 참조). 또한 마리아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리고 입 맞추며 값진 향유를 발라 드린 죄 많은 여인과 동일 인물이기도 합니다(루가 7,36-50; 요한 12,1-8 참조). 행실이 좋지 않았던 마리아는 이러한 신앙 체험 속에서 주님의 현존과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집에 초대된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았고, 그분 발치에 앉아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진정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어떤 것도 행하거나 말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는 마리아의 내적 침묵은, 그분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속뜻을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가 10,41-42). 사실 마르타는 동생인 마리아가 자기의 일을 거들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타의 부탁과는 달리,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이것에 대해 명확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그렇다면 시중드는 일, 곧 봉사하는 데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의 행동은 부차적인 것일까요? 예수께서도 봉사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0,28 참조).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신 의도는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봉사)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적 마음 자세입니다. 마르타는 손님을 위해 기쁘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일의 성취를 위해 그 일에 빠져서 염려하고 불안해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한 일이 오히려 나의 만족과 성취를 위한 일로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성숙한 인간으로 하느님 앞에 서도록”(골로 1,28) 하기 위해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무엇인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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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발치에 앉아서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한 산골마을로 피정 겸 소풍을 갔을 때 일입니다.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바빠지는 제 천성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이나 되는 일정이어서 준비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에도 떠나기 전날 오후에야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시장도 봐야 했고, 장거리를 뛰기 위해 차도 점검해야 했습니다. 밤 11시가 돼서야 피정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니 벌써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쳤지요. 소형버스에 아이들을 빼곡히 태우고 시동을 거니 마음이 다 뿌듯해졌습니다. 정체가 심한 시내를 빠져나와 막 속도를 내려는 순간, 미사도구를 챙겨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지요. 차에서 내린 저는 다급한 마음에 수도원 소성당 문을 박차고 제의방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소성당으로 뛰어든 순간, 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성당에는 저희 주방 자매님께서 홀로 앉아계셨습니다. 평화롭게 성체조배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 마음에서는 '쿵' 하는 소리가 다 들려왔습니다.

아이들 먹여 살린다는 핑계로 늘 나돌아만 다녔기에 주님 앞에 차분히 앉아본 적이 벌써 오래 전 일이었습니다. 말만 수도자(修道者)지 수도(修道)를 위해 거의 시간을 내지 않은 제 모습, 세상사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주님께 나아가는 주방 자매님의 영적 삶과 일 중독에 빠져 잠시도 주님 발치에 앉지 못하는 제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 극명하게 교차되면서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로 말만 수도자지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공동체 기도를 빼먹지 않는 것만 해도 정말 다행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도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가끔씩 피정 강의라도 하러 갈 때면 눈을 반짝이며 앉아 계시는 신자들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는 지극한 정성으로 온 몸을 바쳐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이었습니다. 마르타는 단순하고 소박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자잘한 일상사 안에서 구체적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의복은 대체로 마르타의 손을 거쳐 세탁되었고 다림질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예수님 건강을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소꼬리 곰탕을 끓여다 날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 봉사로 예수님을 섬기던 마르타, 온 몸을 다해 예수님을 추종하던 열렬한 팬 마르타보다는 그저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곤 하던 마리아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십니다. 마리아는 마르타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독특한 팬클럽 회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과 행적, 인품에 완전히 매료된 마리아에게 이제 예수님은 삶의 최종적 의미요, 존재 이유가 되었습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 생각이었습니다. 적당히 하면 좋은데 때로 너무 지나치다 보니 언니 마르타에게서 자주 질타와 견제를 받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으셨을 때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르타는 즉시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을 위한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었지요. 예수님과 제자 일행의 수효가 상당했기에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손님접대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그것만이 지상과제였습니다.

오늘 마리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예수님의 발치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지극히 예언적 모습입니다. 그분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좋기에, 그분 말씀이 꿀보다 더 달기에 마리아에게는 그분 발치에 앉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음식 준비나 접대, 갖은 세상살이보다는 그분 앞에 앉는 것, 그분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파악한 마리아였기에 다른 모든 부차적인 것을 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분 발치에 앉습니다.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과 단 일초라도 더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2004년 7월 18일 평화신문
  |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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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본당신부로서 가끔은 수도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분주함과 고단함에 젖어 유혹과 갈등이 깊어질 때면 관상수도원에서 오롯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그려보게 됩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침묵과 기도, 노동 안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살아야 할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더 좋은 몫을 차지한 수도자가 되고 싶은 충동을 오늘도 기도로 대신합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주어지는 팔일 간의 연 피정이 끝날 때쯤이면 본당 신자들이 보고 싶어지고, 본당에 간다는 설레임을 갖게 되는 자신을 보며 역시 본당신부가 나의 소명인가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여러 본당을 다니며 사목을 하다보면 인간적으로 친숙해져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신자와 가정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세리의 가정을 즐겨 방문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의 삼남매 가정을 방문하고 계십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베타니아에 예수님께서는 꽤 자주 들르셨고 특별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 11,36) 이렇게 사람들이 수군거릴 정도였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삼남매 집을 방문하시자 집 안은 온통 수선스러워졌습니다. 언니 마르타는 언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손님들을 맞이한다, 음식을 장만한다, 집을 치운다하며 일손이 모자라서 쩔쩔 매고 있지요.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그런 언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동분서주 뛰어다니던 마르타는 은근히 화가 나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술을 더 떠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의 좋은 몫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이면에는 마르타의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움은 신자들에게서도 자주 보게 됩니다. 사목 방문을 나가보면 정작 신자들은 음식 준비에만 골몰해 변변히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좀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고 나간 자리이고 보면 다른 일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목자로서 성당에 있다 보면 신자들이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르타 유형의 신자들은 역시 성당에서 활동을 많이 합니다. 음식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단체 활동 또한 열심히 하지요. 한편 마리아 유형의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나서서 하는 활동은 아예 외면을 하고 성체 조배를 한다, 성령 기도회를 한다 하며 자신의 기도 생활에만 열심입니다.
 
저는 이 두 유형이 적당히 섞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한쪽으로 지나쳐서 그저 활동만 열심히 하는 것에도 아쉬움이 있고, 또 마치 신앙을 자기 개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로만 국한시켜서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데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이지요. 마리아와 같은 말씀 안에서의 생활과 마르타와 같은 실천이 어우러진 삶이 필요합니다.
 
자칫 실천에만 집중하게 되면 혁명가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또 기도에만 몰두하면 이론가 혹은 개인주의로 치우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은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끔 신앙생활을 주일미사 참례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일에만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한 주간을 살고 주일에 공동체와 함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봉헌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주일 미사의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두 여인의 일상을 통해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조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이 우선돼야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좋은 몫을 택하는 지혜로운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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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10장 38-42절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르타도 좋습니다

봉쇄 수도회에 들어가려 했는데, 어쩌다가 일이 많은 활동 수도회에 들어간
수녀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 처음에는
본원 주방 소임이 맡겨졌답니다. 다음번 소임은
학교 기숙사 주방 담당이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역시나
병원 식당이었다지요. 수도 생활 대부분을 파 다듬고, 나물 무치고,
국물 우려내며 다 보내고 나니 회의가 몰려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요.
물끄러미 묵상 중에 스쳐지나가는 생각, ‘마리아이고 싶었는데 마르타처럼
살아왔구나.’ 그러니 정작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며 마리아를 칭찬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를 무시하시는 듯 몹시 야속했는데, 급기야 오기로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마르타면 어때! 지들이 다 내 밥 먹고 공부하고, 치료하고,
기도한 거잖아.’ 그분의 기도는 도마 앞에서 바쳐졌습니다. 그분의 희생은
손을 베면서 다듬은 생선구이로 바쳐졌습니다. 그분의 봉헌은
배추를 절여가면서 들어 높여졌습니다. 마르타면 어떻습니까?
마르타야말로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도
비길 데 없이 좋은 몫을 주셨습니다.

서울대교구 남상근 신부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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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집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모신 마르타가 환대하고, 이미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던 라자로의 자매들이기에 그 집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이유는,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시나고가에서 토라를 들을 수 없었기에 예수님은 그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곳에 들렀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예수님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녀들에게도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태도는 신앙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할 우리의 정신입니다.복음에서 두 여인은 똑같이 예수님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 발치에서 들으면서 진리를 깨닫고 있었고, 마르타는 예수님을 환대하려고 이것저것 바쁘게 움직입니다. 화가 난 마르타가 예수님께 자기의 편이 되어 마리아를 혼내시라고 투정부립니다. 마르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른 중요한 이유는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이지, 환대받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것을 깨달은 마리아는 제 몫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 챙기기에 바쁩니다. 신앙인들이 자칫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마리아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행동입니다. 마르타처럼 성당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데만 치중하여, 정작 중요한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신앙인들 사이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듣는 것입니다.

전례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과 독서를 듣고 강론인 말씀의 설교를 들으며,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감사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청원과 기도가 바쳐지며, 생활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랑이 펼쳐집니다. 이렇게 신앙의 출발은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는 신앙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먼저 해야 합니다.

이 듣는 것은 자연스럽게 기도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주 혼자 외딴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메시아 사명을 받는 올리브 동산에서도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대화하시고 결국 그분의 말씀에 따라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깊은 침묵 속에 기도의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행위에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주님이 원하는 실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삶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대화자의 의견을 듣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행위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듣는 자세는 겸손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진위를 구별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진실한 말을 듣는 태도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며, 우리의 말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상대방에게 말하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 속에 진정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양해룡 신부
  |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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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르타와 마리아의 화해

재미삼아 사람의 성격과 혈액형을 연결지어 볼까요. 예를 들면, 언니가 바쁘던 말던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마리아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AB형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씩씩하게 팔을 걷어 붙이고 음식을 준비하며, 주님에게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씀드리던 마르타는 소심한 A형은 아니었겠지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마르타도, 마리아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마르타는 맛있는 음식에 자신의 사랑을 담으려 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마르타의 경우에는 수단(음식)과 목적(사랑)이 슬그머니 뒤바뀌어 버립니다. 음식 만드는 일이 최종 목적이 되는 순간, 동생이 얄미워지고 주님도 원망스럽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현대 사회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람들을 선호합니다. 성과와 실적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려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집에서 자녀를 키우고 가사를 책임지는 사람들도 직장에서의 근무 못지않게 일에 쫓겨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어 기도할 시간은커녕 자신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에 쫓겨 사는 사회는 말 그대로 ‘피로사회’입니다.

건강한 삶은 외적인 활동과 내면으로의 집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삶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돌아봄 없이, 외적인 성과나 성공만을 추구하다보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초고속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40대 사망률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이유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업환경 속에서 묵묵히 소중한 땀을 흘리며 우리의 먹거리를 장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고 특별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요한 15,1 참조)의 사랑을 믿고 “땅의 귀한 소출을 참고 기다리는”(야고 5,7 참조) 농민의 마음가짐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와도 통합니다. 농민들은 농사가 인간의 외적인 활동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과 섭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의 사랑방법과 마리아의 사랑방법이 우리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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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앙의 출발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빕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믿음의 성조인 아브라함은 사막에서 낯선 나그네들을 후하게 대접합니다. 사막에서는 물과 양식과 천막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낯선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그들 안의 하느님을 섬기고 대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친구 라자로의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깁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그분 발치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 마르타는 손님들을 잘 대접하려고 음식과 이것저것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입니다. 화가 난 마르타는 예수님께 마리아를 혼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환대를 위해 음식 준비에 바쁜 마르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신 중요한 이유는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에 여성들은 회당에서 토라를 들을 수 없었기에 예수님은 그녀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없이 그녀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마르타처럼 일하는 데만 치중하여, 정작 중요한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을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듣는 것입니다. 오늘미사 전례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들으며,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청원과 기도가 바쳐지며, 생활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시작은 무엇보다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기도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분명하게 찾고, 실행하는 데 힘을 얻기 위해서 자주 혼자 외딴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신앙 안에서 무엇보다 기도의 시간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듣는 자세는 겸손한 모습이며, 자신을 낮추는 행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상대방에게 말하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조차 삭막한 사막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삶을 삽니다. 우리가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것은 물이나 음식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적인 만남과 대화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부유한 가정일지라도 인간적인 대화와 만남이 없다면 그 가정은 삭막한 사막이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 속에 진정 우리가 선택해야할 몫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 2016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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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르타의 괘씸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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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타가 잘못한 이유

마르타는 예수님께 뭔가 정성껏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동생이 얼마나 얄미울까요. 그 바쁜 마르타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일까요?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르타가 예수님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 말씀을 자신이 반복하고 있지는 못할망정,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반복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사실 자세히 따져보면 기가 막힐 일이지요. 집안에서도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자녀가 부모에게 명령하면 되겠습니까?

마리아는 왜 그렇게 주님의 발치에만 앉아 있는 것일까요? 바쁘게 움직이는 언니를 제쳐 놓고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막연하지만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니의 면박을 들어가면서도 그렇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만 듣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 현대 사회의 마르타

과연 동생 마리아는 언니의 말만 들어야 할까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그 옛날의 마르타만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 그 마르타처럼 바쁩니다. 바쁘게 살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할까요? 아무것도 안 하고 무조건 예수님 말씀만 듣겠다고 성경만 보거나 기도만 하고 있어도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들려오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자면 오늘 복잡한 현대 사회 한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 하느님을 떠나는 인간의 고독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조건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떨까요? 오늘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바쁘게 살아갑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침묵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바쁘게 살아가는 이 세상살이에서 그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맙니다. 침묵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요즘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모두 스마트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조용한 것이 아닙니다. 게임 내용이 전쟁 중이어서 폭력적이기도 하고 도박에 정신이 팔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실은 모두 시끄러운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속에 자유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없고, 인간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는 현대의 인간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난민, 실업자, 죽어가는 아이들…. 모든 외침이 멀리서 들려올 뿐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산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어떤 유익함을 가져다줄까요? 꼭 필요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바싹 다가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줄 알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 때,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오해도 생기고, 소통이 안 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결국, 혼자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고독감과 분노로 발전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 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도 귀담아들을 줄 알게 됩니다. 자기 주장을 내려놓고 잠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지혜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안겨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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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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