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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이야기
조회수 | 2,753
작성일 | 07.07.20
루가 10, 38-4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집에 가셔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손님 시중들기에 분주했습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와서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부산을 떨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예루살렘 근방 베타니아에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복음서들은 그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복음서는 초기 교회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 바를 알리는 문서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주인공들입니다. 오늘의 마르타와 마리아도 순전히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등장한 인물로 보아야 합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주인공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두 자매간에 발생한 갈등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손님 시중드는데 협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만 앉아 있는 동생을 언니가 손님인 예수님에게 와서 비난했다면 자매간의 갈등은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갈등을 해소하고 두 자매를 화해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르타가 많은 일 때문에 부산을 떨고 있고, 마리아는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셔서 자매간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예수님이 소중한 것은 그분이 우리 인생살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층과의 갈등으로 당신 생명을 바치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르타와 같이 여러 가지 세상일에 부산을 떨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문서입니다. 인간이 하는 말은 언제나 그 시대적 여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오늘의 복음은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생활보다는 수도원 안에서 관상(觀想)하는 수도생활이 더 우위에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마르타는 사도직을 하는 수도자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관상 수도자의 모습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더 중요했고, 보이는 노동보다 보이지 않는 생각 혹은 관상이 더 소중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을 위해 사도직 활동을 하는 수도자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관상한다는 수도자들이 더 돋보였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했습니다. 황제와 영주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결정하면, 사람들은 전화(戰禍)에 휘말리고, 세금을 결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는 통신매체를 통해서 중요한 일의 결정 과정을 봅니다.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집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에 분주합니다. 보이는 이웃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이는 노력을 하는(마태 25,31-46)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비인간적이었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수도자들은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하여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관상이 활동보다 우월하고, 선비가 농사짓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세상과 격리되면 사람이 되지를 못합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람답게 삽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격리되어 하느님만 생각하고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옛날에 입던 옷이니까 입고, 옛날에 하던 짓이니까 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과거 사회의 사고방식, 차별, 우월감 등에 마음을 쓰지 말고, 먼저 자기가 사는 시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우월감을 전면 거부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고 우리를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나라와는 다릅니다. 우월함과 차별을 찾고 만드는 우리의 나라입니다.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관상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 우리는 이런 차별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우리의 나라 안에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삶으로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차별을 그 은혜로우심과 사랑의 실천으로 극복하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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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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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발치에 앉아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언뜻 보기에 우리의 일상생활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집에 손님을 모셨을 때, 그 손님이 반갑고 귀한 사람일수록 풍성한 대접을 하며 시중을 드는 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시중들던 마르타가 예수님께 꾸중을 듣고 있고, 얄밉게 일도 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 듣고 있던” 마리아는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꾸중을 들은 것은 “많은 것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고”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리아는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타의 모습은 혹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바쁘고 열심이고 또 많은 일을 하고 걱정하고 있지만 실상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현대 사회 안에서 바쁘게 산다는 것은 하나의 유행병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나가서는 유능하다는 척도로 여겨지는 것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 안에서 바쁘지 않다는 것은 무능하다는 증거이며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것, 즉 뒷전에 밀려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러한 소외에서 벗어나고 무능한 주변인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바쁜 일을 만들고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쁘게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속감이나 만족감을 주기보다는 더욱 공허함을 만들며,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확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은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경청하는 자세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자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의 말씀은 봉사활동과 기도생활로 상징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도생활과 신앙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모습입니다. 이 두 가지 행위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의 실천은 자기 생각과 계획의 실현으로 치우칠 수 있으며, 마르타처럼 타인을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일에 동조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미워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실천 없는 기도는 기복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기도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거나 선행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할 때 절름발이 신앙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먼저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 말씀에 따라 행동 안에서 드러날 때 비로소 사랑은 항상 흘러 넘칩니다. 그 사랑을 풍성히 받은 우리 신앙인들은 고여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해 그 사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생명의 말씀에 귀 기울며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간청해 봅시다.’

부산교구 김형태 베드로 신부
  |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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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말씀

성체성사는 주님과 우리를 하나로 결합시켜 주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 그 자체가 바로 성체성사의 생활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생명 또는 영혼의 양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과 영혼의 양식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 또한 요한1, 1에 이르기를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했습니다. 즉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스도교는 말씀의 종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가 이미 하느님을 받아들인 신앙인들의 영혼 양식이라면,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씨앗을 뿌려 주는 첫 번째 씨앗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10, 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이루어집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는 그들을 방문하신 주님을 향해 각각 다른 두 가지 태도를 취했습니다. 마르타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융숭하게 대접하려고 바쁘게 일을 했고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이와 같은 태도를 못마땅해 하는 마르타를 향해 주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넓은 뜻 속에는 주님은 마리아처럼 당신을 위해 지극 정성의 뜻도 좋지만 우선 우리 인간 자신들의 영원한 구원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들려준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었고 영원한 구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세상에서 최우선적이고 최상의 일입니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성경 읽기를 거듭 강조하고 그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구원의 열매를 얻으려고 한다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느 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2디모2, 9)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부산교구 오남주 프리모 신부
  |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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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르타와 마리아

오늘은 농민 주일이다. 성소 주일, 군인 주일 등이 그러하듯이 농민 주일에도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우리 농촌의 어려움을 알리고 농민들을 위해 기도하며 농촌을 보존하고 살리는데 한 몫을 다한다. 이미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농촌 사목이 활발히 전개되어 왔고, 가톨릭농민회의 주관으로 1993년에 출범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를 통해 도시와 농촌 간에 인격적, 공동체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만남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전국의 우리농 매장을 통해 식품과 먹거리의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교우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천사를 맞이했던 것처럼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맞아들인다. 그리고는 온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든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물론 마르타도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계속 부엌에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수님과 간간이 말도 주고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으니 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마르타보다 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지 않았다. 마르타는 마르타대로,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서로 비교하여 말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께, “주님, 제 언니가 주님의 말씀은 안 듣고, 주방에서 일만 하고 있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여기 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언니에게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구나. 마르타야, 하던 일을 멈추고 여기 와서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마르타가 자기 일을 하게 놓아두고 너는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하여라”라고 하셨을 것 같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관계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이다. 약간 다른 방식이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동반자이다. 때로는 마르타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때로는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앉아서 주님과 대화하는 것, 즉 기도도 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도회에서는 “기도하며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맡겨진 일을 열심히 수행하면서, 동시에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산교구 임석수 바오로 신부>
  |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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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뒤의 강렬한 햇볕에 정원의 나무들이 생기를 잃었습니다. 때문일까요?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쉬던 아브라함의 노곤함이 아주 생생히 느껴집니다. 온 사위가 숨을 죽이듯 적막한 중동의 한낮, 손도 달싹하기 귀찮을 그 시간에 길을 가는 길손을 “달려 나가” 맞아들였다는 구절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 지닌 후덕한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라 싶습니다. 발을 씻기고 나무 아래에서 쉴 자리를 마련하여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백살 노인 아브라함의 코 끝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을 것도 같습니다.

성경은 오늘 하루 주님의 일정을 들려줍니다. 파견하셨던 “일흔 두 제자”들의 성과 보고를 듣고(10,17) 이어서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10,25)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을 하셨으며 바로 그날에 마르타의 초대를 받아 방문을 하셨으니 무척이나 빡빡한 일정을 보내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르타의 집에는 자그마치 ‘일흔 명’이 넘는 손님이 들이닥쳤던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그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마르타가 얼마나 동분서주했을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마르타의 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그 바쁜 와중에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시킨 동생이라니… 당장 불호령을 들어도 마땅하다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조심스레 다가가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는 마르타의 당부를 거절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마르타가 참말로 민망하고 난감했을 듯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사랑의 본질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분주한 마르타의 모습에 빗대어 인간의 선행보다 더 소중한 것을 일깨우십니다. 선한 행위를 실천하는 속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르십니다. 세상에는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가 자기과시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점을 각성시키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는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제야 그날 마리아가 만사를 제치고 주님 말씀에 주목한 것을 칭찬하신 이유가 살펴집니다.

마리아는 무엇보다 주님 의향을 소중히 살피려 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선행을 더 잘하기 위한 방도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선행이 당신의 뜻에 근거할 때 하늘에서 ‘채권증서’가 작성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이”(잠언 19,17)라고 분명히 기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독서에서는 길 가는 나그네에게마저도 최고의 정성과 최선을 쏟아 대접했던 아브라함의 진심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주님의 고백을 캡니다. 그날 아브라함을 찾았을 때, 막강한 하늘군대의 호위를 받는 천군천사를 대동한 신비한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환대해 준 아브라함의 ‘사랑’에 감동하셨던 것이라 헤아립니다… 얼마나 기쁘셨으면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라며 두고두고 자랑을 하시는지… 큰 묵상거리를 건집니다.

솔직히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족족 송아지를 잡아 대접한다면 그 살림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말씀대로 무조건 살아내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점을 계속, 반복하여 강조하실 뿐입니다. 언제나 세상의 경제논리를 거부하고 세상의 손익공식과 확연히 다른 생명의 셈법을 익히라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멍텅구리 셈법’에 익숙하라 명하십니다.

그날 마리아는 주님의 지혜로써 가득했을 것입니다. 차오른 기쁨과 감사로써 마침내 언니 마르타까지도 덩달아 신이 나게 했으리라 믿어집니다. 쪼로로 달려가 “언니는 좀 쉬어요”라며… “내가 다 할께”라며… 주님 일행의 식사를 바지런히 준비했을 것이라 헤아립니다. 말씀으로 힘을 얻으면 사랑을 전파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틀림없습니다. 그 왁자지껄했을, 시끌벅적했을 주님 모신 기쁨이 우리의 것이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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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필요한 것 한 가지

한국에 정착해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빨리빨리’라고 합니다. 가족들이나 동료들의 말을 천천히 듣고 대화하는 것보다는 명령하고 재촉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대도시의 바쁜 삶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마르타는 주님 시중드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조용히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일과 머무름 사이에서 예수님은“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하시며, 가장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필요한 것 한 가지란, 우리 신앙인이 바라는 모든 것이며, 우리가 목적으로 삼는 것, 바로 하느님입니다. 많은 것들을 이루는 것보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해내고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인이 목적으로 삼는 것, 하느님을 모셔 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할 일들에 온통 신경 쓰느라 하느님을 잊는다면 꼭 필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그 하느님을 나의 삶 속에서 모시고 살까?’‘바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까?’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바쁘고 다급한 일에 묶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지하고, 성실한 모습을 통해서 빠르지는 않더라도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해내고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바쁨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얼마나 주님 발치에 머물고자 했는지 되돌아보며 한 주간을 살아갑시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정한 농민 주일입니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에게 농민의 수고로움과 어려움은 그저 막연한 생각에 머물 뿐입니다. 그들의 수고로움과 땀방울이, 더디지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서 우리의 식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어긋난 경제논리 속에서 농업은 돈을 벌어야 하는 산업으로 전락하였고, 농민의 땀방울은 헛된 수고가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의 땀방울이 좀 더 존중받고 더욱 정직해질 수 있기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기도합시다.

▮ 부산교구 이재원 다미안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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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열심히 일하고, 마리아는 앉아서 놀고만 있었는데 왜 마르타만 야단맞을까?

아마도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 익숙하기에 이런 질문이 나오는 듯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독자들이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를 옳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대개 이야기 흐름을 통해서 누가 옳은지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마르타가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말씀하시며, 마리아가 진정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르타의 문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집에 모신 인물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맞아들여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주님을 초대만 해 놓고서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하지 않고, 온갖 시중드는 일에 “분주”합니다. 분주하다는 표현은 마르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아브라함도 마르타처럼 주님을 맞아들인 뒤 주님과 그분 천사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와 달리 아브라함은 주님 곁에 머물며, 주님께 시중을 듭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공손히 답합니다. 1독서에서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은 자기 천막 안에서 나오지 않던 사라였습니다.

성경의 관심에서 벗어나 개인적 관점에서 ‘말씀만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리아가 정말 잘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 의문으로 복음의 초점을 흐려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미 마르타와 베짱이 마리아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에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와 관련해 루카 8,15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주님 곁에서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간직하는 이들은 인내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실제 복음사가는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마르타의 비난을 받은 마리아가 실제 말씀을 들은 뒤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좋은 몫,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간직한 인물임을 밝혀줍니다. 복음서가 말하지는 않지만 마리아는 분명 말씀을 간직한 뒤 인내로 열매를 맺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르타처럼 자신의 관심 때문에 분주한 삶을 살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말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일꾼들입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더불어 ‘삶이라는 각자의 제단’ 위에서 하느님과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들이지만 종종 자신의 근심 걱정 때문에 갖가지 일에 부산을 떨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빠져 분주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갖가지 일로 분주하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그 열매를 맺는 것. 마리아는 참으로 좋은 몫을 택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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