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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나의 관심은 어디에?
조회수 | 2,496
작성일 | 07.07.20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예수님을 두고도 부수적인 것들에 치중해 있는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둘의 사랑은 아름다웠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이들의 사랑은 변치 않고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사랑을 키워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자 쪽에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애정을 쏟고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부수적인 것들에 치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남자의 핸드폰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랑 통화하고 누구와 문자를 주고받는 건지 일일이 다 참견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모든 연락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랑 통화한 거야?”, “왜 전화 안 받아?”, “그 사람하고 통화한 거 맞아?” 게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났는지도 일일이 체크하고 보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시간에 뭐 했어?” “거기 갔다 온 거 맞아?” “누구랑 갔었는데?” “어떻게 확인시켜 줄건데?”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남자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여자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고, 여자도 쓸데없는 걱정과 의심 가는 것들에 대해 머리가 아팠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을 바라보고 사랑을 키워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부수적인 것들에 매여 쓸데없는 신경을 쓰고, 의심에 의심을 더해 아예 불신을 하고, 스스로도 너무나 큰 혼란스러움과 고통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좀 비약해서 말하면, 마르타도 이와 같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는 자체에 관심을 쏟지 않고 외적인 것들에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단체생활에도 충실한 것이 아니라, 가끔 외적인 것들에만 집중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지금 신부(수녀)는 어디에서 뭐한대?” “신부(수녀)는 지금 누구 만나고 있대?” “지금 신부(수녀) 어디 가는 거야?” “저 사람, 신부(수녀)랑 너무 가까이 있는 거 아니야?” “저 사람은 신부(수녀)랑 무슨 얘길 저리 오래해?” “저 사람은 기도하는데 왜 저렇게 혼자서 궁시렁 거린대?” “저 사람은 집에서 할 일이 없나? 항상 성당에만 있네. 집에는 신경이나 쓰나?” “저 사람은 사목위원(단체장)이면서 어쩜 저리도 옷도 허름하고, 추해 보인다니?” “자기가 단체장이고 사목위원이면 다야! 왜 저렇게 나대는 거야?” “저 사람, 성당에서는 저렇게 자상하고 따뜻한 모습 보이면서, 과연 집에서도 그렇게 할까?” “저 총무, 과연 돈은 제대로 관리하고 있을까?” “저이는 왜 저러고 다녀?” “저이는 왜 저렇게 말이 많아?” “저이는 왜 저렇게 꿍하고 있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이것저것 주변의 일들, 주변의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쏟고 있다면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고,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 정말 ‘좋은 몫’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향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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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주현철 라우렌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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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노동하면서 살아서(특히 갑곶성지에서) 그랬을까요? 몇 해 동안 체중의 변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따로 구입하지 않아도 입을 옷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곳 간석4동 성당에 온 지 7개월이 넘은 지금,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맞는 바지가 없다는 것이지요. 점점 늘어나는 허리 치수에 바지는 점점 제 몸에 꽉 끼었습니다. 바지가 맞지 않는다고 새 바지를 사기도 아까웠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지에 맞추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니까요. 즉, 다이어트를 해서 체중을 줄이겠다는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 해결 방법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며칠 전에 큰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글쎄 허리를 숙이다가 그만 바지의 히프 부분이 쭉 터진 것입니다. 다행히 사람들이 없을 때 이러한 사고가 나서 아무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또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라는 걱정에 조금만 허리를 숙이는 것도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결국 저는 이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옷가게에 갔습니다. 물론 옷가게에 가면서도, ‘독한 마음먹고서 살을 빼면 집에 있는 옷들을 다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급한 대로 두 벌은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생각보다 저렴한 옷이 많았습니다(몇 천원밖에 되지 않는 옷도 무척 좋아 보이네요).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사이즈의 옷을 선택해서 입어 보았습니다.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것을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몇 개월을 불편하게 생활했으니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하던 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모두가 편안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차별하시나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 아마 모든 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내용이지요. 마르타는 예수님이 모신 뒤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을 듣고 있습니다. 이에 마르타는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하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몫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것저것 하려는 마음,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좋은 몫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마리아의 마음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편안하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마리아처럼…….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22
451 36%
“주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시다가 한 가정에 접대를 받으십니다. 주님을 초대한 마르타와 마리아의 행동에서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데 열중합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주님이 오셨기에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평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주님을 접대하느라 경황이 없는 마르타의 행동이 부차적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마르타에게서 진정 보고 싶었던 것은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그의 내면입니다. 마르타는 손님들을 위해 기쁘게 일에 전념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의 성취를 위해 오히려 그 일에 빠져버립니다. 초대된 손님을 위해 무엇인가 보여주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해내려고 염려하고 불안해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미흡한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만족과 성취를 위한 일로 변질된 것입니다.
 
마르타의 행동은 엄격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전통적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하는 듯이 보입니다. 주님 현존을 체험하려면 613가지 율법 규정을 모두 철저히 준비하고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편협한 사고를 대변하는 듯이 보입니다.
 
마르타의 행동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시지만, 먼저 집에 남겨 둔 많은 일들을 해결하러가는 사람들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루카 9,57-62). 그러니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고 주님 현존 앞에서 너무나 할 것이 많아 보입니다.
사실 본당에서도 가정방문을 나가보면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 되곤 합니다. 방문한 가정에 신앙이 어떤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어떤 어려움은 없는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무슨 부탁이 있는지 등을 알려고 가지만 결국은 그 집에 그릇이 얼마나 많은지, 요리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구역 신자 동원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고 오게 됩니다. 신앙의 내면이 아니라, 외적인 단면만을 보게 됩니다.
 
주님 현존 앞에서 우리는 더욱 단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마리아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가장 본질적인 길을 선택합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는 주님 말씀처럼, 마리아는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했고, 그것을 온전히 선택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눈은 주님 얼굴을 바라보고, 마리아의 귀는 주님 말씀을 듣는데 몰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얼굴에서 삶의 위로를 받고 주님 말씀에서 삶의 희망을 봅니다. 주님 현존이 마리아에게는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반면 마르타에게는 주님 현존이 기쁨보다는 해야 할 많은 일들로 인해 귀찮고 피곤한 시간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물론 복음 저자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행동이 상반된 행동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해야 할 많은 일들로 인해 귀찮고 피곤한 시간을 어떻게 기쁨과 행복의 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주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에 있습니다. 그 일치의 시간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어 그것을 주님 일에 반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일이 즐겁고 주님을 올바르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콜로 1,28).
 
주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 속에서 주님 말씀은 우리를 점차 변화시킵니다. 그 시간은 귀찮고 부담이 되는 시간이 아니라,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시편 73,28).

▶홍승모 신부
  | 07.17
451 36%
“주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시다가 한 가정에 접대를 받으십니다. 주님을 초대한 마르타와 마리아의 행동에서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데 열중합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주님이 오셨기에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평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주님을 접대하느라 경황이 없는 마르타의 행동이 부차적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마르타에게서 진정 보고 싶었던 것은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그의 내면입니다. 마르타는 손님들을 위해 기쁘게 일에 전념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하는 일의 성취를 위해 오히려 그 일에 빠져버립니다. 초대된 손님을 위해 무엇인가 보여주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해내려고 염려하고 불안해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미흡한 행동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만족과 성취를 위한 일로 변질된 것입니다.
 
마르타의 행동은 엄격한 율법에 얽매여 있는 전통적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하는 듯이 보입니다. 주님 현존을 체험하려면 613가지 율법 규정을 모두 철저히 준비하고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편협한 사고를 대변하는 듯이 보입니다.
 
마르타의 행동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시지만, 먼저 집에 남겨 둔 많은 일들을 해결하러가는 사람들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루카 9,57-62). 그러니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고 주님 현존 앞에서 너무나 할 것이 많아 보입니다.
사실 본당에서도 가정방문을 나가보면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 되곤 합니다. 방문한 가정에 신앙이 어떤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어떤 어려움은 없는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무슨 부탁이 있는지 등을 알려고 가지만 결국은 그 집에 그릇이 얼마나 많은지, 요리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구역 신자 동원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고 오게 됩니다. 신앙의 내면이 아니라, 외적인 단면만을 보게 됩니다.
 
주님 현존 앞에서 우리는 더욱 단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마리아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가장 본질적인 길을 선택합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는 주님 말씀처럼, 마리아는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했고, 그것을 온전히 선택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눈은 주님 얼굴을 바라보고, 마리아의 귀는 주님 말씀을 듣는데 몰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얼굴에서 삶의 위로를 받고 주님 말씀에서 삶의 희망을 봅니다. 주님 현존이 마리아에게는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반면 마르타에게는 주님 현존이 기쁨보다는 해야 할 많은 일들로 인해 귀찮고 피곤한 시간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물론 복음 저자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행동이 상반된 행동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해야 할 많은 일들로 인해 귀찮고 피곤한 시간을 어떻게 기쁨과 행복의 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주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에 있습니다. 그 일치의 시간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어 그것을 주님 일에 반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일이 즐겁고 주님을 올바르게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콜로 1,28).
 
주님과 함께하는 일치의 시간 속에서 주님 말씀은 우리를 점차 변화시킵니다. 그 시간은 귀찮고 부담이 되는 시간이 아니라,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시편 73,28).

▶홍승모 신부
  | 07.17
인천교구 민경덕 신부 1 7.2%
주일 강론(루카10,38-42)

찬미예수님, 어린시절에 주임신부님께서 저희 가정에 방문을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 자신이 사제가 되어 가정방문을 가기도 합니다.

전에 신학생이였을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몇가지 복음들이 있었는데, 막상 사제가 되고보니 이해가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약은 청지기의 비유와 더불어서 오늘 복음인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련된 복음이였지요.

본당신부님의 가정방문이면 어머님은 언제나 정신없이 주방과 응접실을 왕래하시며 정신없이 음식들을 준비하셨고, 주임신부님께서는 어머님의 세례명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미리암, 미리암,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으니 그만 준비하시고, 이리와서 앉으세요”라고.

저는 그 때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예수님도 아니면서 예수님을 흉내내네,”라고.^^
그런데 어느순간 저 역시 같은 말씀을 드리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실상 어느 가정에 방문을 가게 되었을 때, 그 가정의 자매님께서 음식이나 차를 준비하시면서 분주하게 다니시면 왠지모르게 제 자신이 이렇게 대접을 받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의구심이 들었으리라 생각을 해보게 된답니다.
그럼 마르타가 음식 준비를 하지 않으면 누가 예수님을 대접하지?라고. 그러나 정작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시지 않고, 그저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고, 함께 함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정말 당신께서 필요로 하신 것이라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처럼 아버지께 청하시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쉬이 잊어버리고 살았던 듯 싶습니다.

사랑하는 삼위일체 신자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지난 금요일의 복음처럼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주위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말씀에 대한 집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 참된 사랑이 우리의 귀를 통해 머리와 가슴과 영혼에 새겨질 때,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워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로부터 받고 싶어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우리 서로간의 사랑이였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가장 큰 대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 당신의 말씀을 듣고 행함이 진정 당신을 향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멘
  | 07.18
451 36%
민경덕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묵상글을 계속해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신부님의 코너를 만들면 어떨가?하고
욕심이 들어갑니다.
부탁합니다.

홈피주인 오요안 신부
  | 07.18
451 36%
저는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에 맞춰서 약속 장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상대방보다 조금 일찍 약속 장소에 나가서 기다리곤 하지요.

어느 추운 겨울 날, 저는 친구와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평소의 습관대로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정시가 되어도 그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 거의 30분이 되어 가는데도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나는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친구가 괘씸했고 또 그래서 화가 많이 났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왜 오지 않느냐면서 무조건 화부터 냈지요. 그 친구에게 변명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심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잠시 뒤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제 밤에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어. 그래서 여태껏 병원에 있었어. 미리 연락했어야 하는데, 사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약속을 잊어 버렸다. 미안하다.”

친구의 말을 듣고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친구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추운 겨울 날 단지 몇 분을 떨면서 기다렸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화를 냈던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던 지요.

어떤 책에서 이러한 인디언 속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아라.’

남의 입장에 서보지 않고서 내 입장만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나의 부족한 생각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후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마르타와 마리아는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지요. 먼저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에 반해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지요. 이 모습에 마르타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를 손아래 동생인 마리아가 차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낫겠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지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바로 자신의 입장을 내세워 동생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분주하게 시중드는 마르타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판단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마르타의 모습을 취하면서 상대방의 잘잘못을 따지려고 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발을 먼저 신어봐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조명연 신부
  | 07.18
451 36%
[인천] 마르타는 정말 간이 큰 여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 가운데 아니 사람 가운데 가장 간이 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구요? 예수님께 잘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구체적 지침까지도 내놓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 세상이 왜 이 모양입니까? 왜 하느님 알면서도 보고만 계십니까? 이렇게 안 해주십니까? 등등. 그러나 그런 것을 요구하는 자신이 누구이고, 그런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한 마르타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뜻인 양 여기는 것이죠! 하느님 앞에 두려움을 상실한 믿는 자들의 모습, 하느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고 완전히 굴복할 줄 모르는 오만함. 예수님 위에 올라서서 하느님께 대해서도 무의식중에 판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눈멀음. 이런 것이 바로 마르타의 영혼입니다.

마르타는 바쁘게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많이 닮았고 특히 한국 사람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바쁘다 바빠! 바쁘다 바빠!” 바쁜 것이 자신의 존재인 듯이 사는 삶은 어리석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엿새 일 하고 하루를 하느님 안에 쉴 수 없는 영혼은 하느님을 짓밟고 하느님의 축복을 걷어차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쁘게 일하는 것을 자신의 존재인 듯이 여기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마르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기는 했으나 정작 딴짓만을 하는 믿는 자의 모습이 바로 마르타의 모습이며 우리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그분을 모셔 들였으나 그분 앞에 머물 줄 모르며 그분과 단 한순간도 깊은 사랑의 눈을 마주치고 그분의 그윽한 사랑의 숨결을 나눌 줄 모르는 믿는 이의 모습이 바로 마르타입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일이었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르타는 정작 그분을 자기 집에는 모시지만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모시지는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는 무엇을 합니까? 나는 마르타입니까? 마리아입니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작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마르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 됨이며 바로 어둠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 발치 앞에 있을 때 언니가 자신을 속으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판단하는 것을 몰랐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니가 자신을 미워하고 판단하고 싫어함을 겪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삶은 결국 또한 우리 마음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돈을 쓰는 일, 내 시간을 쓰는 일, 내 능력을 쓰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쓰도록 하는 내 마음을 쓰는 일에 나는 무엇을 제일 중요한 몫으로 선택하고 있나요? 시편 16편 5절의 말씀처럼 “주님은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시니…….” 알렐루야.

<인천교구 안규도 도미니코 신부>
  |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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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한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대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모든 것을 인내하라. 잠겨 있는 방 같고, 어려운 외국어로 쓰인 책 같은 그 문제들 자체를 사랑하도록 노력하라. 지금 그 문제를 살아라.”

침묵 속에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너무나 급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활동하실 시간도 드리지 않으면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급하게 결론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가 외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들이 풀릴 것 같으면서도 계속 문제가 꼬여서 보통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문제들이 어떻게 풀렸을까요? 실제로 어떤 특별한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기도하면서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 힘을 통해서 새롭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있었지요.

만약 그때 세상의 관점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서둘러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이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지요. 반대로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드리는 사람들은, 비록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평화 속에서 좋은 해결을 갖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모습일까요?

물론 무조건 세상의 것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관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아무리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순간도 부정적인 마음과 함께 가장 불행한 순간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라는 여자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순간이었겠습니까? 그리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동생인 마리아 때문이었지요. 자신은 예수님을 시중드느라 너무나 바쁜데, 동생은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조용히 말씀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그 마음이 외적인 판단을 계속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어도 기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쁘지 않을 때,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들었을 때, 세상의 관점을 내세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순간 조용히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귀를 쫑긋 세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분주한 마르타의 모습과 조용히 주님 말씀을 들으려 침묵 속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 중에서 어떤 모습을 따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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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참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

한국인의 심성에서 유별난 것 중 하나는, 바로 유달리 강한 ‘평등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평등의식은 흔히 ‘똑같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 ‘똑같이’라는 평등의식이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바로 ‘남과 비교하기’와 ‘시기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무척 강하고, 타인을 칭찬하는데 인색하고 남을 깎아내리는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학원을 7~8개씩 보내는 초등학생 엄마들에게 ‘왜 그렇게 아이가 많은 학원에 다니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학부모들의 대답은 대부분 한 가지였습니다.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보내면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해서…….’

따지고 보면 아이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마음 안에는 ‘남들 다 하는데’와 ‘불안해서’라는 두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타인과 비교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받았던 그 비교의 괴로움을 내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낳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속에서 화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리아더러 자신을 좀 도와주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르타를 타이르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내가 지금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너도 마리아처럼 여기 와서 내 얘기를 들으라.’고 하지 않으셨고, 마리아에게 ‘네 언니가 지금 바쁘니 네가 가서 도와주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각자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오는 것이라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습니까. 비교하는 마음속에는 감사함이 자리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남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학대한다면 마음의 평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시는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드립니다.

▮ 인천교구 김수철 바오로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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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참 좋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성당, 자그마한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 속에서의 주님과 만남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이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칠 즈음에 9월부터 있을 일정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9월부터는 정말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성지의 일도 만만치가 않지만, 신학교에서의 강의와 성지에서 있을 토요특강 그리고 이미 많이 들어온 외부 특강과 라디오 방송까지 정신없는 일정이 제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써야 할 글들도 많아서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순례객이 그래도 적어서 조금 여유로움을 지내고 있는 7월과 8월이 계속되었으면 싶더군요.

바로 그 순간 모기한테 물린 것입니다. 제가 있는 곳이 바닷가이다 보니 모기가 다른 지역의 모기와 달리 조금 셉니다. 특히 한번 물리면 통통 붓기 때문에 가렵기도 하지만 벌써 한 가득인 모기한테 물린 상처로 사람들에게 보이기 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빨리 이 여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 곧바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방금 전에 한가한 7, 8월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해놓고는, 모기한테 물리자마자 여름이 지나가고 모기가 사라지는 가을이 되길 원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왔다 갔다 합니다. 즉, 지금의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면 더욱 더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작 해야 할 것들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시중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요. 참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마르타이지만, 예수님과는 어떤 행동도 또 말도 함께 나누지 못합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처음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대화 시간을 마르타는 동생이 자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보내버리고 말지요.

복잡한 세상에 맞춰서 복잡하게 살아가는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으며, 부정적인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던 마리아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여유와 함께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주히 살아가는 내 삶 안에서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마음이 복잡했던 이유, 걱정이 많았던 이유, 부정적인 불평불만이 가득한 이유는 바로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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