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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참으로 부자 되는 길
조회수 | 2,699
작성일 | 07.08.02
한여름입니다. 우리는 대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을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마기간 동안에 내린 비로 땅은 물을 충분히 확보하였고 뜨거운 태양은 열매를 재촉합니다. 곡식과 과일로 풍성한 계절을 기대하는 시점에서 교회는 복음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과 자연이 주는 재화에 현혹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부자 농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곡식과 재물” 그리고 “목숨”이라고 하는 대립구조를 통해 소유와 존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화들(재산, 경력, 경험)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수단은 수단일 뿐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재화의 증식과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화의 증식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생각했던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자신이 언제라도 죽어야 할 존재이며 죽은 뒤에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집니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입니다(1코린 3,11-15 참조). “자신을 위해서”(루카 12,21)라는 말을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재화를 “자신을 위해서” 모읍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는 말씀처럼 그에게는 하느님이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코헬렛(전도자)은 온갖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해 벌어들인 재화가 결국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리라는 말을 함으로써 재화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코헬 2,21-23). 그는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무책임한 삶을 찬양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의 재화들은 결국 바람처럼 지나가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매우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그로서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1) 하며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저 위에 있는 것”이란 벌어들인 재화나 재능 또는 명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에 나온 “곡식과 재물” 그리고 “목숨”의 대립구조가 여기서는 “땅에 있는 것”과 “위에 있는 것”으로 반복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참된 생명이고, 우리 존재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콜로 2,3)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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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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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상징인 돈

아주 큰 부자가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장서서 천국을 안내하고 부자가 살게 될 집을 찾아갑니다. 아름다운 천국을 바라보며 부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역시, 천국은 다르군. 아~, 여기서 살게 되다니 정말 좋구나.'
 
그런데 천사는 으리으리한 저택들을 계속 지나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자는 더 좋은 집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갔지요. 천사와 부자는 다음 마을로 들어섰는데 이 마을에는 165㎡(약 50평), 330㎡(약 100평)가 넘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도 살만은 하겠군.'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사는 그 마을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저만큼 달동네가 나왔습니다. '설마 저 곳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가는 부자에게 천사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세워진 어느 쓰러져가는 판잣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가 당신이 살 집입니다."
 
화가 치민 부자가 따졌습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저는 지상에서 살 때에도 호화주택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니 천국에 와서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자 천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당신이 지상에 살면서 보내준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니까요."
 
우리 모두는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끼고 모아서 자식을 교육시키고 저축을 하는가 하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 보험까지도 들지요. 더군다나 요새는 80, 90살이 예사로 느껴질 만큼 수명이 늘어나 노후대책을 위한 국가 차원의 해결책을 요구하기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끔 세상에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노라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얼마나 준비해 놓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에 더 큰 희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신자 여러분들은 정작 하늘나라에 얼마나 저축을 해 놓으셨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산이 많은 부자를 야단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는 말씀처럼 자기와 가족을 위해서는 넘치게 살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한 이들에게 나눔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재물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에 형제 사이를 갈라놓고 심지어 부모 자식 간의 왕래마저 끊게 만드는 사건의 내막에는 대부분 재산 다툼이라는 어두운 면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한평생 고생하며 모아 놓은 재산을 앞에 놓고 부모 형제가 남만도 못한 가슴 아픈 관계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반면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잘 활용하면 이것처럼 큰 축복도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재산이라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기쁘게 사용하면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영광을 드릴 수 있고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없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소유하는 순간부터 욕망을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믿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없는 재물은 이웃을 피눈물 나게 만들 수 있고, 사방에 죽음의 문화를 꽃피우기도 합니다. 또한 영원한 세상을 믿기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만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재물의 유혹이고 악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생에 대해서 오늘 독서는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고 말씀하시고,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산 분배에 대한 불평으로 괴로워하며 가르침을 청한 청년에게 지나치게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며 살아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당부이시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히 잃지 않을 재물, 진정한 재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과 이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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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부(富)가 무엇인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쌓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 재산을 잘못 관리한 데 있습니다. 그가 축적한 재산은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형제들과의 연대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는 새로 지은 창고에 자기가 모은 재산을 쌓아 두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영혼까지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형제 사이에 유산 분배로 인해 분쟁이 생긴 어떤 사람의 부탁으로 시작합니다. 유산의 공정한 분배를 원했던 이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부가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루가 12,15). 예수께서는 부탁한 사람이 기대했던 공정한 분배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녀들에게 애써 모은 유산을 남겨 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기억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부는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며 선물입니다(신명 28,1-14 참조).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유산을 선물로 남겨 주듯이 말입니다. 유산을 선물로 남겨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들 간의 불목과 분쟁이 아니라, 서로를 보살펴 주는 사랑의 유대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부가 과연 진정한 행복을 주는지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0) 이 말씀은 ‘어차피 가져가지 못할 것이라면 그렇게 애써 모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는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루가 12,21). 정확히 번역하면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는 뜻입니다.

이 부자의 문제는 그가 애써 모은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를 축적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다는 의미는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풍요로운 무엇인가를 행하고 쌓으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삶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골로 3,3).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기에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주님만은 알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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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들

한평생 '결국 믿을 것이라곤 돈뿐이다. 돈이 최고야!'라고 외치며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자린고비로 살았지요. 혹시라도 부인이 허락받지 않고 색다른 반찬 한 가지 준비한 날은 난리가 나는 날이었습니다. 동기생들, 또래 사람들이 다하는 계모임이나 송년회도 회비 아깝다고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과 왕래도 쓸데없이 돈만 든다며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주말이 와도 '움직이면 돈'이라며 가족끼리 나들이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너희들, 잘 들어둬. 이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어. 돈이 최고야 돈이!"하고 가르쳤습니다.

평생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가 지상 최대 과제였기에 말년에 이르러서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큰 빌딩도 두 동이나 소유하게 되었고, 건물 임대료로 나오는 수입만으로도 재벌 못지않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나중에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돈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돈만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OK)고, 천년만년 살 줄 알았는데,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사(生死) 문제'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죽음의 때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죽음 앞에서는 돈을 아무리 갖다 퍼부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 이름'하는 큰 병원 의사들도 방법이 없다고 하자, 전국의 이름난 한의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의 건강은 하루하루 악화되었습니다. 정신도 점점 혼미해져갔고, 결국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임종 직전의 순간에 도달했습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그 순간은 참으로 서글픈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분명 애도의 순간이어야 할 텐데, 병실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재산상속권이 있는 부인이나 자녀들, 그밖에 이런저런 이유로 부자의 유산과 조금이나마 관련있는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과 기 싸움은 정말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넘어간 뒤에도 귀는 얼마간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부자는 자신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은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바닥으로 내려앉는 소리를 숨이 넘어가는 순간 고스란히 듣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부인들이나 자녀들, 친지들이 체면불구하고 환자 앞에서 재산권 문제로 싸우는 이유도 결국 자신이 '돈이 최고'라고 평소에 가르쳤던 결과였기에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부자 할아버지의 인생은 맛있는 죽을 열심히 쒀서 자신은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개밥통에 부어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네 삶도 그 부자 할아버지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기를 써서 모은 많은 재산들은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물론 자식들에게 좋은 일 한번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간 후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게 될 것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들인 빌딩도 절대로 아닙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게 될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궁극적인 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영혼의 중요성, 영혼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위치를 재물 위에 설정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건전한 가치관, 인간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일깨우는 영성,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관대한 마음, 인간이 지닌 무한한 정신적 능력, 하느님, 신앙, 우정, 이런 요소들이 사실 재물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기억하는 이번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고 여기고 돈에 집착할 때에도 우리만은 돈 그 위에 하느님이 계심을 선포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가진 것 없이 살아간다 하더라도 충분히 당당하고, 충분히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세상 앞에 온 몸으로 보여주도록 노력합시다.

평화신문 2004년 8월 1일
  |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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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로다, 허무?”

오늘의 첫째 독서는 코헬렛의 서두입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모르는 분들도 한 번쯤은 “하벨 하발림”이라는 코헬렛의 유명한 탄식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말로 직역해 본다면 “공허 중의 공허”라는 의미가 될것이며, 우리말 성경은 “허무로다, 허무!”라는 약간 의역된(하지만 매우 적확한) 표현으로 이를 옮기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벨이라는 이름도 여기에 등장하는 하벨/헤벨이라는 명사와 같은 어근을 갖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이렇게 인생의 허무함/공허함에 대해 노래하면서 염세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쫓고 노력하고, 또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루기도 하였으나 결국 깨닫는 것은 인간은 결코 영원한 행복에 스스로 이를 수 없다는 헛됨에 대한 체험을 코헬렛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코헬렛만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과 그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도의 문명과 함께 태동된 고대 종교로부터 현대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사상계는 같은 깨달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종교인들과 철학자들만의 깨달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채규엽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가 그렇고, 80년대에 많이 불렸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 역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울먹였습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 사상이 던지는 의문의 깊은 기저에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으나, 우리가 깨달아 온 것이라고는 우리가 이룬 어느 하나도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결국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허무로다, 허무!”라는 탄식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세상의 허무함 앞에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은 인간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코헬렛은 그 이유를 강조합니다.

오늘의 둘째 독서와 복음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것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덧없는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는 있겠으나, 그 “탐욕은 우상 숭배”이며, 그는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콜로새 서간 3장과 루카 복음12장의 공통된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누군가가 헛된 것을 쫓으며 살았다면 그는 결국 헛된 것을 얻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길을 쫓아 영원한 것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다행입니다.

▶ 최승정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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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은혜를 안다면…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더운 여름날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를 비웃지만,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베짱이는 개미네 집에 가서 먹을 것을 구걸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에 많은 소출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부자는 베짱이가 아닌 개미에 비교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나무라십니다. 그 부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느님을 제 피신처로 삼지 않고 자기의 큰 재산만 믿으며”(시편 52,9)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거둔 많은 소출이 하느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것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도록 안배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농사를 예로 들어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씨가 싹트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으려면 적당한 햇살과 비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노력은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이렇게 힘주어 말합니다. “부자들은 열매와 곡식이 자라는 논과 밭을 자기네가 소유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씨앗을 싹 틔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자기 밭에서 나오는 소출을 거기서 일한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궁핍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 부자들의 임무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나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재물이 많아지면 그 재물을 탐하는 사람들이 꼬여들어 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돈 때문에 부부 사이가 갈라지고 자식들이 불목하며 친족 간에 분쟁이 벌어진다면, 그 재산을 모으려고 쏟은 “모든 노고와 노심”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제1독서) 자신이 거둔 결실과 성공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한다면, 가진 바를 기꺼이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제2독서) 신앙인은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현세적인 것, 곧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탐욕을 버릴 때 가진 바를 흔쾌히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나눔으로 응답하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보다는 돈에 더 희망을 거는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 진정한 주님이심을 삶으로 고백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손희송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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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아예 시작 때 결론을 내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소출을 낸 것도 아니고, 자기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을 괴롭힌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의 상식과 우리 신앙의 진리는 길이 서로 엇갈립니다. 부자가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소출을 얻고, 그것으로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평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돈처럼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을 이용하셔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생각에 빠져들다 보면, 평화를 청하는 가운데 곧잘 평화를 위해 돈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을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목적이 뒤바뀌어서, 평화의 근원이신 주님보다 재물을 먼저 청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얻을 평화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재물로 옮겨갔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 살아가야 할 우리 안에 우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우상 앞에서 우리를 평화롭게 해 달라고 빌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에 재물이 놓인 이들은 자기 삶을 재물로 평가하고, 하느님의 힘도 재물로 평가하게 됩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이 모두가 내 업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사람은 내 삶조차 하느님의 것이고, 지금의 내 모든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언제든 없어질 수 있고, 그것을 쓰는 것도 내 뜻에 맞춰서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기꺼이 남을 도우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고, 자신의 혼을 진정으로 돌보게 됩니다. 평화를 자기 곳간에서 찾는 부자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혼을 ‘되찾아갈’ 것임 을 선언하십니다. 내 혼조차 ‘내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께서 되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가 그런 것이니, 우리가 사는 중에 얻고 잃는 것들을 두고 ‘내 것’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미 그 점 을 알았나 봅니다.

옛날 경주 최부자집 가훈에는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앙을 모르던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이 역시 자기 곳간 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자기 곳간을 채우면서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당함’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탐욕조차도 넘어서야만 우리는 진정 평화로워집니다. 안심할 만큼 재물을 얻어야 오는 거짓 평화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신 만큼 누리고 그 분 쓰시고 싶은 데에 쓰시게 해 드리면서 얻는 참 평화. 우리 발걸음은 그 둘 중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 서울대교구 손경락 사도 요한 신부 2016년 7월 31일
  |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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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   [수도회]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  [4] 2493
770   [수원] 하느님의 크신 자비  [3] 2374
769   [인천] “아버지” 하느님  [4] 2316
768   [서울] 너무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5] 2288
767   [의정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3] 2298
766   [군종] 죄인들 중의 가장 큰 죄인  [1] 440
765   [안동] 나약한 인간  [4] 2337
764   [마산] 잃은 자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3] 2434
763   [부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9] 2443
762   [대구] 아버지의 마음  [3] 2362
761   [원주] 머리의 논리보다 가슴의 논리로 살자  [3] 2630
760   [춘천] 주님께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2] 84
759   [대전] 하느님 앞에 좀 뻔뻔해집시다.  [2] 2103
758   [청주]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59
757   [광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2676
756   [제주] 화해와 용서  57
755   [전주]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1] 66
754   (녹) 연중 제24주일 독서와 복음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4] 1883
753   [수도회] 제자됨의 길  [4] 2423
752   [수원] 제자들의 선택  [5] 2315
751   [인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7] 2448
750   [서울]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9] 2696
749   [마산] 적극적인 포기  [4] 2565
748   [대구] 동행  [3] 2393
747   [춘천]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3] 2471
746   [원주] 천국행 네비게이션  [2] 51
745   [대전] 이제는 내려놓아라.  [4] 2337
744   [청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라.”  57
743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2] 2474
742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2] 45
741   [제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1] 2381
740   [전주] 신앙생활  42
739   [광주] 삶을 헤아리면서…  52
738   [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5] 2731
737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8] 2351
736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68
735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13
734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41
733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0
732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07
1 [2][3][4][5][6][7][8][9][10]..[20]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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