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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
조회수 | 2,331
작성일 | 07.08.09
오늘의 주제는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은 하느님께서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준비하시고 실현시키시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서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1독서: 지혜 18,6-9: 하느님의 약속을 분명히 깨달았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의 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수백 년 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해, 역사를 통해 완성돼 나가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직 도래하여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다.

복음: 루가 12,32-48: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 역시 지난 주일복음과 같이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고 이 세상의 재물에다 자신의 보증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다(32-34절). 이렇게 재물과 재화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내용은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는 ‘집주인’을 깨어 기다린다는 내용(36절)과 연결되고 있다. 즉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현실적으로든 미래에 있어서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상의 재물로부터의 자유보다도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에”(40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순간에 나타나게 될지 모르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자유롭고’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35-36절).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여행이나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즉 움직이기에 편하도록 하는 것이다. ‘등불을 켜놓는 것’은 한 밤중에 갑자기 주인이 돌아올 때 필요하다. 종들의 이러한 태도는 겁이 난다든지, 염려스러워서 취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그 종들의 시중을 들어주리라는 사실이 입증하듯이 기쁨에 차서 취하는 태도이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예수님은 특히 수난사에서 ‘야훼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40절)는 이 권고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 빛에 기쁘게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어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다.

충실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1-48절).

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관리인처럼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진정한 ‘주인’에 대한 기다림이 이미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으로 항상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내용이 그들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 자체가 지배와 권세의 도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제2독서: 히브 11,1-2.8-19: 아브라함의 신앙

2독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선조들의 믿음은 그 ‘약속 받은 땅’이 장차 얻게 될 천상 고향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림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 그분을 우리가 항상 알아 모실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항구한 신앙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과 같이 우리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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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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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여 준비한다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에 노생(盧生)이란 사람이 세상을 유랑하다가 ‘한단’이라는 마을의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노생은 어여쁜 처녀를 만나 결혼하고 자녀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도 하여 재상(宰相)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는데 귓전에 ‘어서 일어나 식사하라’는 말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밥 먹으라’는 소리에 그토록 생생하던 현실같은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음식이 나오는 잠깐 사이에 그는 인생을 다 산 셈이 되었다. 노생은 얼마나 황당 했을까. 흔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하듯 노생의 일화에서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 유래한다.

요즘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사전적으로는 ‘복지’(福祉)의 개념이지만, 몸과 마음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켜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다양한 노력에 관한 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인간에게 최적의 상태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생활로 웰빙이 오인되기도 한다. 몸이 허약한 사람은 건강을 돌보아야 하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때때로 일손을 놓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휴식해야 한다. 생사가 달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템포에 맞춰 삶을 평화스럽게 유지하려는 내·외적 노력은 현명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오늘 복음말씀의 묵상은 짧게 ‘깨어 준비하라’로 요약된다. 종말에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도 가르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비유를 들어가시며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한 삶을 위하여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을 원하시는 사랑의 권고 말씀이다. 의롭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농부가 이른 봄에 일년 농사를 준비하는 것만 보아도 매사에 합당한 준비는 마땅한 삶의 원리이다. 살아가면서 한두 번쯤 준비의 부족으로 낭패를 본 경험은 있지 않을까? 하물며 구원을 향하는 신앙인들에게 ‘깨어 준비하는’ 삶의 자세는 필요충분조건이라 할만 하다. 찬미와 기도와 감사와 봉헌과 봉사가 몸에 배인 신앙인은 남의 말이나 행동에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대처한다.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삶이 질서 있고 마음에도 여유가 있어 사랑을 베풀게 된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은 날’에 오신다는 말씀은 긴장과 초조 속에 살라 하심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헤아려 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삶에 깊이 현존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 날’은 그 언젠가가 아닌 지금 살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다. ‘한단지몽’에 매이거나 재물과 명예만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그릇된 가치관에 편승하지 않고, 참신한 영성생활의 일상 가운데 살아간다면 주님 보시기에 ‘깨어 준비하는 삶’이라 하겠다. 때문에 균형 있는 영적건강(spiritual health)과 화목한 인간관계의 성장을 경주해야 한다. ‘깨어 준비하는 삶’이란 영혼과 육신이 건강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며, 냉담하지 않는 복음적 생활이 아니겠는가.

수원교구 이상선(요아킴) 신부
  |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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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람이 벼락에 맞아 사망할 확률은 얼마일까?

저는 매년 아이들과 함께 해외봉사활동을 하는데 올해도 필리핀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는 기간이 우연히도 봉사활동 기간이기도 합니다. 필리핀은 여름에 무척 덥기도 하지만 비가 많이 옵니다. 제가 봉사하고 있는 지역도 저녁이면 어김없이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지는데 그 양이 만만치 않습니다. 잠시 오는 비치고는 많은 양이옵니다. 그런데 비가 올 때 마다 천둥번개가 정말 옆에서 나는 것처럼 크고 무섭게 칩니다. 제가 들은 천둥번개소리 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여기서 듣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큰 천둥번개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사람이 벼락에 맞아 사망할 확률이 얼마일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미국국립번개안전연구원NLSI)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확률적으로 연간28만 명 중 한 명이 벼락에 의해 희생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벼락 맞을 확률은 1/28만1입니1다. 다른 곳에서는 1/50만이라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벼락 에 맞아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나라는 브라질이라는 통계도 나와 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한해에 75명7이 사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브라질에서는 벼락이 250만 번 칠 때 마다 평균1명꼴로 사망자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벼락에 맞을 확률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아주 낮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고 억세게 운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도 있지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깨어있는 삶을 살수 있는 확률은 얼마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40 참조).”라고 말씀 하시면서 우리에게 깨어 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늘 신앙생활을 이야기할 때 마다 깨어있는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깨어있음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생활에서는 이 말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결국 삶을 복음적으로 산다는 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복음적인 삶에 익숙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복음은 가난을 이야기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것을 이야기하고 겸손하고 배려하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실천할 의지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또한 이런 깨어있는 삶을 말할 때 마다 부끄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착 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에서 강도에게 당해 길가에 누워있는 행인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는 사제나 레위인이 바로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이 낮은 것처럼 신앙인 이 깨어있는 삶을 살 확률도 낮은 것은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하는 생각을 하면 너무도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벼락 맞아 죽을 확률이 낮은 것은 다행이지만 우리가 깨어있을 확률이 낮다는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의 기쁨과 희망이 찾아 올 확률은 금방 높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있다면 벼락도 피할수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2016년 8월 7일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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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복음의 내용이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이번 주는 시간(기다림)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태도, 두 번째 비유는 언제 도둑이 들지 모르는 집주인의 태도, 세 번째 비유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은 관리인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유 모두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어떤 기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런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기다림 속에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맞아들일 준비입니다. 이 준비는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이 상징하듯 우리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구를 거슬러,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기다림은 미래의 시점뿐 아니라 현재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기다림이 막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삶이 쌓이면 확고한 희망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재의 순간에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를 요한 묵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과 만남, 생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에 지쳐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내고”(루카 12,45) 있지는 않습니까?

권력의 남용,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 시간의 허비와 게으름 등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만 기다림 속에서, 이런 본능에 지배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향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주님의 오심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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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환 루카 신부 : 2019년 8월 11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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