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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조회수 | 2,646
작성일 | 07.08.09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유별나게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점점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지엄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전제 군주들과 같이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인권이 소중하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높고 무서운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언어는 과거 봉건시대나 전제 군주시대에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오늘도 하느님은 높고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언어가 복음적 체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지극히 높고 심판하실, 무서운 분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그런 분이면 오늘 복음의 말씀,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신앙 진리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생각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 삽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을 이어받았지만 독자적으로 사는 생명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반대되는, 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당신 자녀로 키우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어야 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자상한 생명을 살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다음 만나는 환상적인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무서운 분으로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입니다. 높고 무서운 사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무섭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군 지휘관이나 재판장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가르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나라 혹은 그분의 ‘함께 계심’을 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받들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자녀답게 변하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 ‘함께 계심’을 철저히 사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롭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풀어서 은혜로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해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으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재물이나 지위를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살기도 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재물과 지위는 자기 한 사람이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재물을 사용하고 지위가 요구하는 봉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아버지 앞에서 가지는 자세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바쳐야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심청전의 용왕과 같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여 이루어드리는 것이 자녀 된 사람의 기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도 부모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여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기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베푸심은 은혜로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무서워서 빌고 바치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베푸시기에 우리도 베풀고, 그분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고치고 살리기 위해 힘씁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실현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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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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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기다리는 종

예수님은 오늘 깨어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사는 그리스도인의‘미래를 향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가르침을 요약은‘항상 준비하고 깨어 기다려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깨어 기다리는 삶이란 무엇보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다시오시는 그날을 위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쇄신시키려는 자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이켜보고, 성숙하게 변화되고자 노력하는 것이 깨어 준비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무수한 변화를 겪습니다. 그냥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하여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지 못한 종(種)은 결국 멸종되거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변화할 때 변화하지 못하다면 우리 신앙은 점점 쇠퇴할 것입니다. 내가 고백한 주님,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얼마 못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자신이 변화되고, 복음을 통해 나의 신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변화된다면 고정된 가치관과 독선적인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고, 온갖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으며, 세속의 근심과 유혹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되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기에 참으로 많은 유혹이 다가오는 세상입니다.이 세상 속에서 나 자신과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주님 안에서 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이 세상으로부터 나름대로 도전을 받으면서 무엇인가 그래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우리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그렇기에 ‘깨어 기다라는 자’는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언제 어디에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부터 깨어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나갑시다.

부산교구 김종남 스테파노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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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현재에 충실한 깨어 있는 삶을 살자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 35∼36)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통신수단도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서 혼인잔치에 간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에서는 혼인잔치를 며칠씩 하였고 길게는 일주일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주인이 올지, 그리고 시간도 한밤중에 올지 새벽에 올지 알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종들은 만반의 준비를 해서 주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막상 주인이 돌아왔을 때 모든 종이 자고 있다든지, 그제야 부스스 일어나서 늦게 문을 열어준다든지 하면 주인이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을 겁니다. 혼인잔치에서의 흥이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종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즉시 열어주면, 혼인잔치에서의 여흥이 남아 있던 주인이 얼마나 흡족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주인이 피곤도 잊은 채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 37)라고 합니다. 종들로서는 얼마나 몸 둘 바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종들이 주인을 위해서 띠를 매고 주인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주인이, 그것도 피곤해 있을 주인이 시중을 든다는 게 상상이 가십니까? 그만큼 주인이 기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깨어 있는 자세는 현재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충실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현재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지 오늘을 접어두고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법구경에 “깨어 있음이야 말로 삶으로 가는 길, 어리석음은 죽음처럼 잠든다. 지혜로운 이는 잠들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의식을 가지고서 깨어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삶이 삶의 길이고, 어리석고 흐릿한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처럼 잠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은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기 때문에 잠들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지금 그리고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고 겸손히 하는 깨어 있는 우리가 되었으며 좋겠습니다.

<부산교구 전동기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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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 켜고 기다리는 ‘행복’

루카 사도는 오늘 말씀이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으로 혼잡했던 상황에서 “몇몇 제자”들에게만 들려주신 것임을 밝힙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지만 우선 ‘받아들일 만한’ 신앙인의 마음 밭에 집중적으로 말씀의 요지를 심어 주신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오늘 말씀이 그분께 집중하여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갈 몇몇 제자에게만 들려주신 내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마음을 모아 새겨듣게 됩니다. 당신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의무사항’을 꼼꼼히 챙기고 싶어집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를 통하여 선포되는 말씀은 온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인류가 귀를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의 능력은 간절히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키기 원하는 몇몇 사람만을 치유시킬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는 은총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강론을 준비하는 제 마음이 자꾸만 2독서에서 딱 한번 언급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로 쏠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말 그대로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인 믿음으로 가득했는데요. 이야말로 모든 신앙인들이 꿈꾸는 로망일 터입니다. 2독서가 들려주는 아브라함의 삶, 오직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실행하기에 거침이 없는 모습을 묵상하다 불쑥 아브라함의 믿음이 사라의 내조에 의해서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었던 탓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던 우직한 남편 아브라함의 결단에 군소리 없이 따랐던 아내, 사라의 마음을 뒤집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1베드 3,6)라시며 사라의 삶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계신 이유를 캐고 싶어졌습니다.

솔직히 창세기를 통해서 알려진 사라의 생활상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양순한 남편 아브라함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입니다. 자기 생각에 따라 변덕을 부리고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면모도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의 동침을 권하고선 아들 이스마엘이 태어나자 태도가 돌변해 버립니다. 하갈을 구박하는 것도 모자라 내쫓아 버리기를 청하는 장면에서는 만정 떨어집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내내 이 극성맞은 사라의 역성을 든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 주어라”(창세 21,12)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라는 평생 동안 ‘남편에게 순종하였다’고 단언하십니다.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결정을 내릴 때마다 바가지를 긁고 툴툴대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더라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고 격려했던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아내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부부의 모습을 가르치려 하신 것이 아닐까요? 아내와 남편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일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일깨우려 하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과의 해후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참 행복의 모습을 스케치해 주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의 행복은 결코 걱정 없고 고민 없는 무사안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놓고’ 밝히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세상의 가정에 들려주는 가르침으로 듣겠습니다. 가족의 마음가짐이 아브라함을 향했던 사라처럼 지혜로울 때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섬김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란 뜻으로 새기겠습니다.

사랑은 그리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그리워합니다. 하여 그분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설렙니다. 하루에도 몇 번,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양새를 점검할 것입니다. 그분께 보여드릴 삶이 어여쁘도록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사람의 행복’이라 믿습니다. 이야말로 믿음으로써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되는 비결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의 기다림으로 가득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참 행복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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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언제나 찾아오는 부두의 이별이 아쉬워 두 손을 꼭 잡았나. 눈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 마세요. 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눈물지으며 힘없이 돌아오네.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가 그렇게 다! 아~ 이별의 눈물 보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

어느 가수의 대중가요‘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의 노랫말입니다. 떠나는 남자, 기다리는 여자. 우리나라 대중문화 속에 번번이 나오는, 현대 여성운동가들이 고쳐야 할 것으로 지적하는 대표적인 남성우월주의 이미지입니다. 왜 남자만 항상 떠나고, 여자만 기다려야 하는가? 남자가 언제나 주도하고, 주체적이고, 여자는 수동적이어야 하는가? 어찌 되었든, 현대는 남자든 여자든 기다려야 하고 수동적이게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먼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같고, 우리는 주인을 기다리며 집을 관리해야 하는 집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떠나는 하느님을 우리는 기다리며,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기다리기를, 수동적이기를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오늘 복음에서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덜 매력적인지도 모릅니다. 매년 차츰 줄어드는 주일 미사 참석 신자 수와 예비신자 숫자는 이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문학가 롤랑 바르트는‘사랑의 단상’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을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느낍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자는 항상 여기에 없어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손아귀에서 조정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떠나 있는 대상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하느님을 묘사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분,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사랑하시는 분,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기다림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사랑받기는 바라지만 사랑하려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떠나는 배들만 있고, 정착할 항구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먼저 우리를 기다리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또한 깨어 기다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 부산교구 권순호 신부 2016년 8월 7일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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