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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 : 항상 ‘의식’하며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조회수 | 2,372
작성일 | 07.08.09
알츠하이머병으로 5년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의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분은 자신의 시한부 처지를 축복으로 이야기하면서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존재다』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우선 그동안 무심하게 행했던 모든 일들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하찮은 걸음걸이에서부터 집안의 작은 꽃 한송이까지 의식하게 됩니다. 즉,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서랍을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임을 자각함으로 좀 더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 분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우리의 성취와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좀 더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삶을 놓아 버리면 역설적이게도 좀 더 충실하게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에, 삶에 충실하기 위해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이를위해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지난 주 복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모아야 할 곳은 지상의 창고가 아니라 하늘의 창고요, 하늘 창고에 보화를 저축하는 길은 자선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후반부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뜻하고 종들은 우리 신앙인들을 뜻하는데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결혼 풍습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의 혼인은 약혼기간이 끝나고 혼인날이 되면 저녁 때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을 방문하여 신부와 손님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신랑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잔치는 일주일 정도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그러기에 이때 혼인잔치에 참석한 주인을 모시고 있는 종들이라면 주인이 돌아올 때 까지 밤낮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준비해야 하는데 이를위한 준비를 복음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할 준비, 즉, 자신의 역할을 언제든 할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하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밤에도 주인을 맞이할 수 있는 태도를 뜻하기에 언제든 주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할 사실은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종들의 이러한 자세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요 기본적인 임무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임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놀라운 칭찬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일 자체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의식함에서 우러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똑같은 행위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에 칭찬을 받는 밤중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은 것도 만일 주인이 돌아와 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행동은 의미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기름낭비 또는 게으르다는 이유로 책망받을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사실은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언제」 하느냐가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매일의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처지가 종들과 비슷하기에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밤중이나 새벽녘이라는 표현은 「재림의 지연」을 뜻하기도 하고, 「뜻밖의 시간」이란 의미로써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한 말입니다만 이는 오늘날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 파묻혀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경고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데, 어떻든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분명한 현실이기에 현실에 안주하는 불충한 종(46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요,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매일 반복되는 나의 일상과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의식함. 아마 예수님을 맞이해야할 우리가 갖추어야 할 띠와 등불이 아닐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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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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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아냐?"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문제해결의 나라에 살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많은 전문가들이 해결책을 제시한다. TV만 틀면 전문가들이 많은 해답을 제시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역사를 잠깐만 훑어봐도 전문가들도 무지하게 많은 경우 틀렸다는 것이다. 전문가라고 어찌 다 옳을 수 있으랴.

인생의 해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어리석고, 부적절하고, 열등하다고 느낀다.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이런 느낌들을 피하는 수단을 만들어 내는데 자기기만이 그것이다.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기만의 명수다.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을 확신시킨다. 자기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을 확신시킨다. 우리는 이 거짓된 확신을 거머쥐고, 사실상 정말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한다. 예를 들면, '우리 집의 문제는 남편인데, 남편만 변하면 결혼 생활이 다 잘 될 것이다'라는 따위의 생각이다. 매사를 이렇게 보기에 마음의 상처, 오해, 낙담, 실패가 끊이지 않는다.

다 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신비의 요소에 마음을 닫는다. 다 알고 있으니 삶의 신비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생각 속에 다른 사람을 집어넣는다. 아주 단순한 진리는 세상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 진리인가. 결국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와 정직성을 가질 때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신비에로 마음을 열게 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준비하고 있으라 한다.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하나? '너는 하느님을 아냐?' 알아야 준비를 할 텐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차라리 아는 체하는 것을 그만두고 하느님의 신비에 마음을 여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너는 나를 아냐?' 하느님이 내게 묻는다. '너는 나를 아냐?' 내가 너에게 묻는다. 모르지? 그런데 왜 아는 체를 하는 거야? 짜증 지대루다.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있고, 나와 하느님이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잘 모르겠는데요."(영구 버전)

원주교구 김창수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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