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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옳게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조회수 | 2,538
작성일 | 07.08.09
제1독서:지혜 18,6-9
제2독서:히브 11,1-2.8-12(19)
복음:루가 12,32-48(35-40)

묵상 길잡이
신앙이 없는 사람은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신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안다. 그분의 뜻대로 살려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참된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다.

1. 졸면 죽는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은 보초를 설 때 ‘졸면 죽는다.’는 표어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후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전방 철책선 근무를 하는 사람이나, 전후방의 구별이 없는 월남전이나 게릴라전에서는 너무나 절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적(敵)을 먼저 발견하고 숨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살 수 있다. 누가 먼저 적을 발견하느냐가 생사를 결정짓는 유일한 조건일 때가 많다. 매복을 할 때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敵)이 있는지 없는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깨어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깨어있음이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아니겠는가?

2. 내 인생은 참으로 나의 것인가?

누구나 어릴 때에는 부모형제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갖가지 배려를 하며 지켜준다. 그러나 점차 성장할수록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찾고 일자리를 구하는 등 자기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각자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안목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 남자로 또는 여자로, 어떤 소질과 어떤 외모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한 바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내가 언제 죽게 될지,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철저한 불확실성에 쌓여있다. 한마디로 우리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나 자신의 모든 조건에 대해서 전혀 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의 삶은 참으로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신앙인은 인생을 제멋대로 살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간다. 여기에 인생을 사는 자세의 근본 차이가 있다.

3. 진정한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오늘 복음은 세 가지 비유를 전하고 있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 하인을 맡아 다스리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관리인의 비유가 그것이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일깨우는 비유들이다. 그리고 나의 삶이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언젠가는 셈을 바칠 수 있도록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관리인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맡기신 분께 대한 충성과 성실이다.

누구나 유비무환의 자세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삶인가? 많은 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신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삶이 알차고 깨어있는 삶인 양 생각한다. 물론 게으르고 소극적인 삶보다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목적지를 잘못 알고 엉뚱한 곳으로 달리거나, 함께 뛰는 사람을 걸어 넘어뜨리면서 달린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기 살기로 하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은 진정 깨어있는 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위해서는 가끔 멈추어 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완전한 거울이신 주님 앞에 우리를 비춰 보아야 하고,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 ‘깨어있음’은 진정한 유비무환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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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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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첫 발을 내 딛는 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시작에 앞서 우리는 많은 것을 준비하고 이제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간과 사건 속에서 기뻐하기도 하며 함께 슬퍼할 때도 있습니다. 11주라는 훈련을 통해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군종신부라는 명함이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순간에 이렇게 기쁨과 보람, 긴장감으로 다가 오고 있음을 느껴봅니다.

오늘 이렇게 저와 같이 하느님 앞에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동안 자신의 이름을 숨겨둔 채 번호로써 자신의 이름을 대변하는 신병들입니다. 바로 8명의 신병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례를 받는 뜻 깊은 시간을 같이 하였습니다. 훈련 중에 까맣게 탄 얼굴이며 기합소리에 쉬어 버린 목소리를 들으면 이제 이들이 대한민국의 의젓한 군인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제 자신들이 지내야 할 새로운 삶의 터를 기대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서는 늘 긴장감을 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긴장감을 하느님께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성당에 찾아왔고 이젠 의젓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간식을 먹고 난 뒤 성당 문을 나서는 그들의 입에선 ‘감사합니다’ ‘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등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합니다. 특히 그 아쉬운 작별인사 중에서 ‘너무 행복합니다. 신부님’이라고 말한 친구가 특히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어두운 얼굴을 지니고 있어 내심 걱정을 많이 했던 친구였는데, 평소와 달리 해맑게 웃는 얼굴과 함께 그 친구 입에서 ‘행복합니다’ 라는 그 한마디가 너무 아름답게 제 마음속에 메아리칩니다.

‘행복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이 행복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왜 항상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남들보다 잘 사는 것만이 행복이기에, 남들보다 더 앞서 나가고 더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이기에,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고마움을 잃어 버렸기에 우리는 불행하지 않겠습니까?

향기로운 차 한 잔에서 오는 여유 속에서 내 삶을 잠시나마 반성해 볼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산길을 지나가다가 들판에 피워 있는 작은 들꽃의 흔들림에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체험 할 때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소박한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이 소중히 가지고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소박한 기쁨을 주십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에 우리는 주님을 닮아 갑니다. 주님을 닮아감에 우리는 어떠한 부족함이 없이 소박한 기쁨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고 내가 주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 가기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힘든 훈련 이였지만 주님의 성체를 처음으로 받아 모셨던 그 신병도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행복을 알기에 저에게 마지막 인사가 ‘행복합니다’ 였나 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의 소박한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든지 주님이 오심에 준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행복을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를 주님과 함께 더 열심히 하루 첫 시작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군인장병들의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던 새벽에 오던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마산교구 박재우(베드로푸리에)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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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有備無患)’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이 말은 ‘준비를 하면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미리 준비해 두면 근심될 것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삶은 준비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입학 준비, 시험 준비, 취직 준비, 출세를 위한 준비, 행복한 가정의 설계, 사업 준비, 내일을 위한 준비 등 우리의 일생은 준비의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으름과 무관심과 타성에 젖어 그저 스쳐 지나버리는 것으로 인식하고서 그만 망쳐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인생의 종착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 또한 그렇습니다. 대개 죽음이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나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아직은 젊으니까, 아직은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아직은 할 일이 많으니까 죽음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죽음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후회를 합니다.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을 맞게 되는 사람은 죽음 앞에 쩔쩔 매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합니다. 결국 준비 없이 살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 앞에 가슴 깊이 후회를 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잃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심판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늘 깨어 있으면서 준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을 만나 뵈올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언제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결코 무섭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하느님의 심판을 언제나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에 더 이상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평소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나아가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심판을 얼마나 준비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하느님께서 오실 날이 멀다고만 생각하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졸고 있지나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순간순간을 하루하루를 항상 마지막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순간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준비하는 자세,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결코 내일 속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속에, 이 순간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는 자세,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자세로 하느님께서 언제 어느 때 오시든지 기쁘게 맞이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 나라를 기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마산교구 김국진 가우덴시오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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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온다’라는 진리

‘언제(갑자기, 도둑같이 또는 주인같이) 온다.’ 이 명제에서 ‘언제’에 초점을 두기보다 ‘온다’에 우선적으로 눈길을 돌려야 하는 때인듯합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있어라.’라는 예수님의 명령도 확실히 (언제든) ‘온다.’라는 오고야 말리라는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오긴 올까?’ ‘오기는커녕 더 멀어지고 있다.’ ‘(단정 지어) 안 온다!’ 그야말로 잘못된 믿음입니다. 언제인지는 하느님의 시간에 속해있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온다.’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미련한 불신 때문에 그 도래가 미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파국이 먼저 올 수도 있겠지만, 여러 번 먼저 올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최후의 발언을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빠르게든 늦게든 인간은 믿게 되리니, 끝내 그 나라는 오고야 말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음이란 선이 악보다 강하며 참이 거짓보다 힘차다는 것을 믿음입니다. 결국은 선과 참이 악과 거짓을 이기리라는, 하느님이 사탄을 정복하시리라는 것을 믿음입니다. 악이 최후의 발언권을 가지리라거나 선과 악이 반반의 기회를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세상에는 선을 지지하는 힘이 엄존합니다. 인간 안에서 그리고 자연 안에서 깊디깊은 욕구로 나타나서 활동하는 힘, 결국에 가서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힘, 그런 힘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그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앨벗 놀런).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를 믿음이란 단순히 그 나라의 가치들을 지지하고 언젠가는 이 지상에 그 나라가 도래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희망이나마 한번 걸어 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나라는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참이기에 바로 이 확신의 힘으로 그 나라는 올 것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것이 굳은 결단 또는 확신이라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바라는 바가 진리라는 데서 그 힘이 나옵니다. 진리 덕에, 그 나라를 믿는 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불가능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힘은 진리의 힘입니다.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32)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도, 등불을 켜 놓고 있어야 하는 이유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도 우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함은 그 나라가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

하느님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로 기꺼이 주셨으니,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준비합시다, 준비!

▮ 마산교구 이수호 다미아노 신부 2016년 8월 7일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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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여러분도 ‘인싸’가 되고 싶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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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사람이 ‘인싸’가 되고 싶어 한다.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어떤 무리 안에 잘 섞이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많은 사람은 ‘아싸(outsider)’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에서 ‘인싸’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하느님에게 ‘인싸’가 되어야 한다. ‘인싸’가 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인터넷에서 ‘인싸 되는 법’을 치면 된다. 만약 하느님에게 ‘인싸’가 되는 법을 알고 싶다면 성경을 펼치면 된다.

오늘 1독서인 지혜서가 알려주는 ‘인싸 되는 방법’은 이러하다.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 1,1)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곧 의인일 것이다. 지혜서는 보상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의인의 죽음에 대한 문제도 함께 제기한다.

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아 소위 하느님의 ‘인싸’가 되었던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에 대한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인싸’였지만 믿음 속에 죽어 갔다. 또한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기며 끝까지 이방인, 나그네로 머물렀다. 믿음으로 ‘인싸’가 된 이들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아싸(outsider)’를 자처하며 죽어갔다. 그 이유는 세상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머물기 위함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팔아 세상에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모든 재물의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종들은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자신이 종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된 것 마냥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는 상처 주는 ‘인싸’ 노릇을 한다. 복음 안에서 주인이 오는 때는 아무도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죽음의 시간, 심판의 시간일 것이다. 죽음이 오면 내 것처럼 여겼던 모든 것을 빼앗긴다. 하지만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의 ‘인싸’가 된다면 죽음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그 보상으로 ‘불멸성’을 얻게 된다. 지혜서는 이 불멸성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싸’가 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지혜 6,19)

우리는 삶 속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끊임없이 ‘인싸’가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친다. 마치 ‘인싸’가 되지 않으면 버림받고 잊혀지며 죽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인싸’되기를 그만둬 보자. 남들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대신 피 터지는 ‘인싸 경쟁’ 밖으로(outside) 나와서 하느님이 계신 성경 안으로(inside) 들어가 보자. 여기에는 참 ‘인싸’가 되는 방법이 많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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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정재덕 안토니오 신부 : 2019년 8월 11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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