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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불을 지핀다. 새로 남을 위하여.
조회수 | 2,398
작성일 | 07.08.17
처음엔 “왜냐고?” 물었습니다. 왜 세상에 불을 지르려 하시냐고, 왜 모든 걸 태워버리려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시냐고도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처럼 세상을 온통 불태우려 하시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시듯 그분은 아무 대답도,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온 신경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침묵의 끝에서 그분의 작지만 간절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애처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던지신 말씀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애처로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의 눈동자를 통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불을 지피시는 모습을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우리들이 아파하며 신음하는 모습을. 저는 불신으로 가득 차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투고 물어뜯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들 안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추악하고 사악한 모습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 다.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개 숙인 채 눈물 흘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그분은 또 한번 거센 불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 있던 우리의 모든 추악함과 사악함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리고 그분 눈빛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영원히 타오를 지옥의 불길 속에 우리를 내버려두실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분께서 우리들 안에 지피시려는 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화의 불’이자 ‘생명의 불’입니다. 우리들 안에 내재 되어 있던 모든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태워버리는 정화의 불이자, 새로운 모습, 곧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 태어나게 하는 새 생명의 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망설일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지르시는 불길 속에 우리를 던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우 여러분, 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바람을 아룁시다.

“사랑의 불이신 예수님, 더욱 거센 불길로 저희를 휘감아 주세요. 그렇게 저희의 모든 추악함과 사악함을 말끔히 정화하시고 새 하늘, 새 땅을 차지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이끌어 주세요. 아멘.”

수원교구 박영훈(요한사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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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있어서의 갈등

참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일시적인 나쁜 경향 또는 거짓된 보증,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로 사람들과 상황을 새롭고 대담하게 판단하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이 되고 만다. 이 때의 심정을 예레미야는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옵니다”(예레 15,10)라고 한다.

복음: 루카 12,49-53: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예언자의 운명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은 더 나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49-50절). 여기서의 ‘불’과 ‘세례’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깊은 물 속에 잠기는 행위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강렬한 원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크신 사랑과 숭고한 가르침 앞에 인간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짓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가족들 간에도 만남과 충돌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951-53절).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근본적인 선택에 있어서 대립되게 되면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필연적 소명 때문에 복음과 일치되지 않는 사상체계, 정치적 사회적 관습, 그리고 굳어진 현실을 거슬려 싸우는 ‘투쟁자’가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 동조하고 만다면, 그것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내버려져 짓밟히게 되는(마태 5,13) ‘맛을 잃은’ 소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그리고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내적인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내면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의무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결정적 가치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메시아의 때가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함을 비난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여러 기적사화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요란스러운 ‘표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일인지 스스로 판단할 줄을”(57절) 모른다면 이것은 그분도, 그분의 메시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마음이 거짓되어 진실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겉꾸미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예레미야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거추장스러운 예언자이시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원초적 의미로 볼 때, ‘투쟁적’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뜻을 안다는 것’(56절)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예언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두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의 세례를 통해 세례를 받고 또한 그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타오르게 하신 성령의 불로 자신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그분께 ‘충실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기에 2독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이 ‘표지’에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 때문에 가치관의 변화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과 이미 대립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족들 사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내 자신 안에서 가치관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게 되어 있다. 이 갈등을 통해서 진정 우리에게 평화를 가질 수 있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에 일치시켜 평화를 이끌어 내느냐가 내 몫으로 남는 것이다. 이 몫을 잘 하기로 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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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나?

신학교에 상주하는 신부들은 매월 1회 전체모임을 갖고 신학교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논의한다. 그런데 사안에 따라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있다. 사안에 대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고 통찰하며 각자의 생각을 개진하기에 쉽게 마무리 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토론 과정에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열띤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도 사제들의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 즉, 사제양성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과 관심이 없다면 사제 모임은 별 의견대립 없이 원만하게 종료될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족 사이에 발생한 갈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 ‘평화의 왕’(이사 9,5)이신 예수님이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사실은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일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갈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의 상황 즉, 참다운 신앙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련으로서의 의미일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바빌론이 퇴각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들이 다시 올 것이니, 오히려 ‘그들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얻어야 한다.’(예레 38,2 참고)고 주장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바빌론의 ‘앞잡이’라고 생각하여 저수 동굴에 감금해 버린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예레미야가 침묵하며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하였다면 생명은 구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생각을 따르기보다는 고난과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사람들을 정의와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 역시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흐름이나 공동체의 사정에 관심 두지 않고 조용히 ‘개인적인 신앙생활’만한다면 어려운 일에 직면하지 않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 정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야’(히브 12,1) 한다.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좌지우지되기보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기 위해 헌신하였듯이 우리도 그 길을 가야할 것이다. 빈부격차, 이웃 간 무관심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오늘날 한국 사회 속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무얼까 고민하고, 예수님의 외침에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 - 2016년 8월 14일
  |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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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신자를 대상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동기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여러 다른 이유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서 불안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신이 바라던 평화가 바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 사이에 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편법과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양심을 따르고 정도(正道)를 걸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다보면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당장 주말마다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남들은 ‘주말여행이다, 캠핑이다, 등산이다, 낚시다.’ 하며 아무런 부담 없이 신이 나서 떠나는데, 신자가 된 후로는 주일 미사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소연까지 하십니다.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면….” 혹시 여러분들도 이런 마음이 든 적이 있으셨습니까? 충분히 공감이 가는 하소연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손해 본다.” 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은 “먼저 용서하라”, “네가 좀 참아라”, “크게 양보하라”, “천주교 신자인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 등 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가 얻게 되는 기쁨이나 행복도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받는 갈등이나 스트레스 역시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 진정한 회개, 하느님과의 합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체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 여정은 고되고 험난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살면서 우리가 누렸던 기쁨은 얼마나 충만한 것이었습니까?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누리는 우리의 행복은 또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의 십자가 역시 기꺼이 져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함으로 인한 슬픔이나 고통 역시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기꺼이 수용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 마음 안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을 태워버리는 불, 극단적인 이기심을 살라버리는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삼라만상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려는 열정의 불, 세상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강한 의지의 불을 지르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그 예수님의 불이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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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환 루카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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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성령의 불 옮겨 붙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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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7개월 동안 700명을 입교시킨 분이 계십니다. 1998년 공덕동 본당 신자인 채충석씨는 이 공로로 서울 대교구장으로부터 선교 대상을 받았습니다.

선교왕이 된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선교하여 1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명 이상을 입교시켰다고 합니다.

이 분은 선교를 하다가 거절을 당하더라도 좋지 않은 기분으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인디언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대상자가 입교할 때까지 꾸준히 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말씀대로 선교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개신교의 한 할머니의 이야기이지만 가톨릭 식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한 성당의 전교 왕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1년에 백 명도 선교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지방 도시에 규모가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서 1년에 100명을 전도한 연세 많으신 할머니의 선교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선교를 계획하면 일단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선교 대상자를 먼저 찾습니다. 찾으면 그를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합니다. 때로는 단식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정으로 선교하러 가십니다.

한번은 선교 대상자를 결정하여 놓고 오랜 시간을 기도한 후 그 가정을 찾아갔습니다. “계십니까? 저는 00 성당에서 왔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할머니의 선교 내용은 간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의 대답도 간단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안가요!”

그때 할머니는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아! 그래요.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주간 뒤에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 집주인은 첫 번째보다 약간 언성이 높았습니다.

“성당 안 간다는데 왜 왔어?”

그때도 할머니는 아주 기쁘게 “아! 그래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깊은 절을 하면서 물러나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때 안에서 주인이 나오더니 “저 할마시(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로 약간 하대해서 하는 말) 성당 안 간다는데 왜 또 왔어.” 하면서 이번에는 할머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아주 기쁜 얼굴로 “아! 그래요” 하면서 친절히 절을 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할머니는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도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 다음 주일 네 번째 그 집을 또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 때 그 집주인은 침을 뱉어도 찾아오는 그 할머니에게 “지난 번 일이 죄송해서 나 오늘 한 번만 성당에 가 줄 테니 다시는 오지 마시오.”

“아 그러지요.”

할머니는 이미 기도를 많이 해 둔 상태라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은 신부님의 강론에 크게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또 동료들에게 선교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선교 왕들은 왜 그렇게 선교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마음 안에 어떤 열정이 타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정은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 뜨거움으로 스스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분열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열은 사람들과 일어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성령께서 들어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이시려는 불은 싸우지 않으면 평화로워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만약 방 안에 뱀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잡지 않고서는 평화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 안을 밝히시어 자아의 실체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아와 싸우지 않으면 절대 평화를 갖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죄에 맞서 피 흘리며 죽기까지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불은 나의 피를 통해 이웃에게 옮아 붙습니다. 위 예에서 할머니는 당신이 침을 뱉어도 기쁠 때까지 선교하였습니다. 침뱉음을 당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죽으면 나오는 피가 선교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가슴에도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붙이셨듯이 그 불이 나를 죽여 흐르는 피가 이웃에게 불을 옮겨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양 팔로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힘이 들어 아래로 쳐지면 아말렉군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양 옆에서 아론과 후르가 양 팔을 받쳐주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양 팔을 십자가에 높이 들고 계십니다. 거기서 흘러내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 성령의 힘은 싸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양 팔을 높이 들고 계신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자신이고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싸우라고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까? 그러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내가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불이 타는 중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맙시다. 그러면 내가 침 뱉음을 당하여도 기쁘고 그러면 그 침 뱉은 사람에게도 성령의 불이 옮아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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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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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분열을 주시러 오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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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예레 38,4-6.8-10: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할”(예레 1,18) 만한 용기를 가졌던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 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레미야는 불신과 저버림을 당하면서 느끼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49-50절) 여기서 ‘불’과 ‘세례’의 의미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물속에 잠기는 행위로써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 이제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리와 허위를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믿음과 믿음을 통해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를 통하여 내적인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체로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전쟁’ 즉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이 내적 전쟁을 통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 즉 구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전쟁은 전쟁이며 갈등이지만 범죄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다.

이 갈등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갈등을 계속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갈등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립시다.

히브리 서간에서도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표징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4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언제나 부딪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삶을 결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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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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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참 제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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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어떤 뜻에서 하신 말씀일까요? 그 뜻을 알기 위해,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의 신원에 관한 물음과 베드로 사도의 대답(루카 9,20) 이후, 예수님은 첫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루카 9,28-36) 이후 두 번째 예고하신 다음,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시고 발걸음을 옮기십니다.(루카 9,51) 오늘 복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예고 사이, 곧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 위에 자리합니다.

예루살렘! 분명 그곳은 당신의 예고대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과 ‘세례’는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의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종말과 심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그 길 위에서 내려야 할 결단이 어떤 것인지에 그 초점이 맞춰집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고난은 참 제자와 거짓 제자를 판가름낼 종말과 심판의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고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운명을 당신 것으로 지시며,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셨지만, 그것이 종결점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늘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으며, 곧 당신께 닥칠 수난의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수난의 길을 걷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그 답은 당신을 따라 실제로 그 길을 걸은 제자들을 통해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제자 공동체에 큰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면서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분을 팔아넘긴 이도, 그분을 모른다고 외면한 이도, 모두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슬픈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모였으며,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제자들 안에 위기를 불러일으켰고, 그들이 갖고 있던 막연한 상상이나 인간적 기대를 깨뜨렸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보다 더 큰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힘에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위기를 동반하는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깨고 버리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도 대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길인 동시에 부활의 길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인간적 욕심으로 만들어놓은 헛된 하느님 상을 깨뜨리고 하느님과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해가는 기쁨과 환희의 길을 향해 걷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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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민택 신부 : 평화신문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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