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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조회수 | 2,185
작성일 | 07.08.17
한.미 간의 자유무역협정이 양국의 국회 비준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연합과의 협상도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이모저모를 따져 최선의 가치를 구해야 할 협상이 충분한 준비도, 마땅한 대책도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진한 정보의 공개문제, 일방적인 양보, 절차의 비민주성은 차치하고 내용적으로도 부실한 협상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업경시의 시대적 아픔을 막기 위한 절박한 몸짓과 외침들을 스스로 ‘아스팔트 농사’라 부르며 논과 밭에서 흘려야 할 땀방울을 길바닥에 눈물로 대신 쏟아내겠습니까? 안치환의 노래 ‘세상이 달라졌다’의 노랫말처럼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진 여름날의 한때처럼 세상은 고요’합니다. 눈앞에 놓인 이익 때문에 ‘벗들은 말수가 적어지고’ ‘저항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친구가 되어 주지 않으니 마음이 아픕니다. 폭염과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도로변 곳곳에 나부끼는 형형색색의 깃발에 적힌 농민들의 FTA 반대 구호가 무척 힘겨워 보입니다.

에벳 멜렉은 제1독서에서 치드키야 임금에게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예레미야 38장9절)라며 죽을 처지에 놓여있던 예레미야 예언자를 살려 줄 것을 직언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리서 12,1절)라며 박해의 위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다 지친 히브리인들을 격려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 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장49절-50절)라고 하시며 당신이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 기존의 구태의연한 가치를 뛰어 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독일의 극작가요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집 속의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역사는 언제나 왕과 통치자, 국가의 업적만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을 뿐이며, 역사와 그를 기록하는 역사가는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할 때 그 혼자서 해냈는지 묻지 않고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완성한 날 밤에 벽돌공들과 인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헤겔은 이를 두고 세계사의 주역인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나 프리드리히 대제와 같은 왕과는 다른 보통의 무구한 사람들은 세계사의 여백”(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의 문학 평론가 복도일의 서평에서 인용)이라고 말합니다.

어디 삶의 애달픔이 극에 달한 이들이 농민들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에벳 멜렉의 직언과 사도 바오로의 격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역사의 진짜 주인공이면서도 뒤안길로 밀려난 벽돌공들과 보통의 무구한 사람들, 역사의 여백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의하게 죽을 처지에 빠져있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줄 것을 직언하는 에벳 멜렉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꾸준히 갈 길을 달려 갈 것을 격려했던 사도 바오로처럼 고통에 빠진 이들을 구름처럼 에워싸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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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영식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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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불을 놓는 삶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접할 때에 어떤 부분은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말씀이 그러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이란 상징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듣기가 힘이 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불”이란 표현이 때로는 ‘예언자의 말’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언자 엘리야가 불과 같이 일어났으니,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또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하여도 뼛속에 갇혀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9)고 예언자 예레미아는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인간 삶에 있어서 한 쪽 면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늘 그곳엔 문제와 다툼이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불이 가족들 사이에 다툼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전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거나, 귀로만 듣고는 바로 배척하거나, 극히 일부만 알아듣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지간이라도 하느님의 말씀의 불 때문에 다투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이 갈라집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정의와 불의가 갈라집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진실과 거짓이 갈라집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똑같은 양의 밥이라도 많게 느껴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밥 양이 적게 느껴지는 이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차이’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통해서 모든 이가 구원되길 바라십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르게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면 참 답답하실 겁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끊임없이 불을 놓아야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적절한 삶의 습관들에 불을 놓아야 합니다. 하느님 적이지 못한 우리의 삶의 모습들에 불을 놓아야합니다. 삶의 변화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아울러 이웃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합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나의 것만이 최고이고 전부라는 생각과 소속감에 가득 차 있다면, 배타적인 삶의 모습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안동교구 신동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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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우리에게 있어서 참 평화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참 평화’란 무엇이며,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 우리도 ‘참 평화’를 만들 수 있고 또 누릴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참된 평화를 얻어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분열과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탐욕 등이 판을 치는 세상을 보곤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대신들이 나서서 사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세상을 향해 지르는 ‘불’이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십니다.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는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자.’라고 외칩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어지럽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래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신마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평화’란 무엇입니까?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말합니다. 또 “화평(和平)”이란 말도 있습니다. 화평이란 ‘개개인이나 나라 사이에 충돌이나 다툼이 없이 평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평화든지 화평이든지 간에 이 두 가지는 우리를 “참된 행복”에로 이끄는 기본적인 바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평화를 말하면서 무기를 만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시무시한 무기를 도입하여 설치합니다. 상대방도 또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무기경쟁을 하다보면 서민의 삶은 고단해지고 핍진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세상의 재물이나 무기경쟁으로는 참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거나 혹은 역사를 통해서 보거나 간에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핍진’이나 ‘피폐’는 모자람이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조리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말씀의 본래의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고, 거스르게 되면 하느님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 되고, 거리를 두게 되면 위험에 노출되게 되고, 노출되면 평화를 잃어버리고, 평화를 잃어버리면 참된 행복은 우리들에게서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신앙고백을 하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외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충돌과 갈등과 시기와 질투 등으로 일관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참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이유는 결국 인간의 오만과 탐욕스런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끝을 모를 정도로 오만하고 탐욕스럽게 되면, 하느님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고, 멀어지게 되면 부조리하게 되고, 부조리하게 되면 평화나 화평을 잃어버리게 되며, 평화를 잃어버리면 갈등과 분열, 탐욕과 오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결국엔 불행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일이 지나면 내일은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자 우리민족이 일본압제로부터 벗어난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런저런 부조리한 반(反)평화적인 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부조리한 삶, 반 평화적인 삶은 곧 반(反)하느님적인 삶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것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자 ‘분열’을 말씀하시고, 그런 것에서 정화시키시고자 ‘불’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날씨만큼이나 후텁지근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마시고 참 평화이시며 참 희망이신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얻어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 안동교구 신대원 요셉 신부 - 2016년 8월 14일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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