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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
조회수 | 2,378
작성일 | 07.08.17
1. 성경 이야기

제1독서 예레미야 38,4-6.8-10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론 세력을 하느님께서 죄많은 유다왕국을 징벌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로 확신하여 바빌론 세력에 대항하는 일체의 항거운동을 반대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대신들에게 반역죄로 몰려 투옥되었지만 왕궁 내시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구덩이에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과 고독, 수난과 오해로 점철된 생애를 산 예언자였습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12,1-4는 시련 중에 필요한 인내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시련을 겪기 마련인데 그럴 경우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신 것을 본받아 끈기 있게 참으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아빠 하느님께서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내리는 교육적 견책입니다.
  
복음 루가 12,49-53은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불과 세례의 상징어(49-50절)와 예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내용(51-53절)입니다. 불과 세례의 상징어는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레 20,9 ; 23,29에 의하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셨고(불을 지르다) 그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를(불이 타오르다) 바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신약에서 ‘불’은 하느님 나라가 오기 전에 세상이 겪게 될 종말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마르 9,48; 마태 3,11; 7,19; 루가 3,16). 따라서 예수께서는 세상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종말심판이 하루빨리 닥치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50절의 ‘내가 받을 세례’는 예수께서 맞이하게 될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 고뇌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르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족과도 갈라지는 경우가 생기니 예수께서는 결과적으로 분열을 일으키러 온 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신 예수께서는 그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세상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겪어야 할 죽음을 눈앞에 그리면서 초조해 하셨습니다. 가족을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결국에는 죽음으로써 세상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가족까지도 버리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질책과 박해를 받으면서 살았고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녔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셨던 생활방식을 곧이 곧대로 따를 수는 없겠지만 정신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다보면 때때로 오해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고 사는 삶, 그것이 믿음이며 이 시대의 예수 추종과 복음전파의 올바른 자세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기를 바라셨던 예수님, 그리고 세상 구원과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그리며 초조해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늘 생각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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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평화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그 영원한 참 평화를 우리게 주옵소서." 

우리가 자주 부르는 성가 44번 '평화를 주옵소서'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잘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의 이런 바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고 악의가 가득 찬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깜짝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해왔던 신자들 역시 오늘 말씀을 들으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평화'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일치'인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도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미카 7,5-6).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미카 예언자는 호소합니다. 또한 이렇게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주님께서 몸소 원수를 갚아 주시고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줍니다(미카 7,8-10 참고).
 
오늘 예수님 역시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사이나 형제 사이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 분열을 일으켜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싸워서라도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는 잠시의 혼란이 두려워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싸워 갈라지더라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바로잡는 것, 그래서 바르게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분열을 일으키러' 왔으며 집안 식구끼리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악이 끼어듭니다. 먼 옛날 미카 예언자 시대만의 말씀이 아닙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합니다. 어둠과 죄가 나날이 득세하는 세상을 살면서 노력은 하지 않고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하고 노래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하며 덮어둔 채로 두루뭉술하게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면서 '평화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노래할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참 평화를 위해서는 일시적 분열이나 누군가와 맞서는 일까지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정의를 바로 세우고 참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와의 갈등이라도 개의치 말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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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뜨거운 여름에 듣는 평화이야기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월평균 최고기온이 29.5℃인 8월에 듣는 복음 말씀치고는 너무 뜨겁지 않나요? 하지만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루카 12,50)라고도 하시니 시원한 물세례를 상상하며 불이 주는 뜨거운 느낌을 떨칠 수 있을까요? 월평균 강수량이 348mm나 되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빗물로 불볕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는 확률이 높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문맥을 살피면 이처럼 가벼운 말놀이를 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루카12,51) 주님의 도전적인 질문이 우리를 매우 당황스럽게 합니다. 주님은 원래 “평화의 주님”(2테살 3,16)이 아니신가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학대하거나 심지어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던 분이 아니신가요?(루카 6,27-28 참조) 게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욱 몰아부칩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왔다”(루카 12,51)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 갈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당신이 그토록 타오르기를 바라는 ‘불’, 그리고 당신을 그토록 짓누르는 ‘세례’와 연관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받아야 할 세례는 형식적인 물의 세례가 아니라,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완성되는 참된 정화의 세례입니다. 이 불은 온갖 죄의 불순물들을 깨끗하게 태워버리고 순수한 신앙으로 거듭나게하는 불입니다. 그래서 떨쳐버려야 할 것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심판의 불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거짓과 위선과 죄악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신앙을 가려낼 수 있는 불이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로마6,3)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 애매한 태도로 양다리를 걸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분명한 입장과 확고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며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2,34)이 되리라 예언하였습니다. 주님을 믿으며 주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자신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가족들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때로는 미움을 받고 배척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간교한 대신들의 입장과 완전히 대치되고, 게다가 매국적으로 들릴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치드키야임금(기원 전 597-586)에게 주님의 말씀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고함으로써 죽을 위험을 자초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는 말씀이,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다잡아 줍니다.

<서울대교구 김영국 신부>
  |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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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오늘 제1독서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포위된 몇 달 동안 일어난 극적인 사건을 전해줍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빌론 군대가 이집트 군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철수했는데 이것을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주신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고, 예레미야는 거침없이 그들 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바빌론 군대가 다시 돌아와 이 도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불태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다수의 백성에게 예레미야는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백성의 사기를 꺾는 유언비어 유포자, 적을 이롭게 하고 민족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민족의 반역자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들은 격한 반감과 증오심으로 그를 왕에게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급기야 자기 백성들로부터 대립과 불화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생명까지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고통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루카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당신 죽음과 영광을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이 지상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깊은 의미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연결시켜 사용하고 계시는 ‘불’과 ‘세례’라는 상징적 표현은 분명히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 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 과 죽음의 깊은 물속에 잠기는 침례적 행위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드러내는 위대한 사랑과 철저한 가르침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께서는 참 평화를 주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 평화가 깨져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 사랑과 이기심을 싸움 붙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한 가정 안에서도 식구끼리 서로 반대하여 갈라지는 일도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레미야나 예수님처럼 불같이 타오르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어떠한 고 난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거짓된 평화와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사랑과 진리 안에 머물러 살기를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8월 14일
  |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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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비 온 뒤에 굳은 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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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듣거나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여전히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분열된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주시는 것이 먼저가 아닐지, 아니면 분열 뒤에 더 친밀해진다는 말씀인지? 이런 의문들이 생겨납니다.

복음 말씀은 ‘불’로 시작됩니다. 불은 성경에서 다양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신구약 전체에서 찾을 수 있는 불은 정의를 세우는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또 불은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기도 하고 성령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가 이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나타내듯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세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짓눌림에도 구원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그 의미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 탄생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영광이자 땅의 평화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평화가 아닌 분열을 말씀하십니다. 이 분열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종말은 성경에서 빛이 없는 어둠이나 멸망, 두렵고 무서운 사건으로 표현됩니다. 또 종말은 전쟁이나 싸움을 통해서 표현되기도 합니다. 유다교의 전승에는 종말이 오면 친한 친구들 역시 서로 갈라져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분열은 종말의 배경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세례로 표현되는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란 죄로 십자가형에 처하길 바랐고, 또 다른 이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십자가 죽음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족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세상에 오셨지만, 결과적으로 그분의 삶과 죽음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서로 분열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그 진정한 평화는 믿음 안에서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같은 평화를 말하지만 적어도 신앙인에게 평화는 하느님 안에 바탕을 두는, 그 안에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청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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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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