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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참평화를 얻으려면
조회수 | 1,840
작성일 | 07.08.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49-­53)

우리가 살아가는 녹색별 지구가 마치 거대한 용광로가 된 것처럼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오염의 열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더운 여름날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ㄱ)고 하시니, 그럼 예수님이 방화범?

예수님은 책임 의식 없이 재미삼아 불장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 불은 집을 태우고 산을 태우고 사람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냉랭하고 무심한 마음에 지피는 불이므로 ‘자나 깨나 불조심’ 하며 방화범 예수님을 겁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를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시편에 기록된 말씀을 떠올렸다고 요한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13-­17). 이렇게 혁명적인 불을 일으키시는가 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루카 15,3-­7) 비상식적인 불이기도 합니다. 미쳤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마르 3,21) 하느님 나라 일에 몸 바치다가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제자들 마음속에 불씨를 당긴 뜨거운 불입니다.

불은 세상을 밝혀줍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불의와 억압이란 어둠의 실체는 빛 속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1,5) 그리하여“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의 무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들어 어둠에 타협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십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편했을 텐데 예수라는 사람을 알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더 많이 받아 갈등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 5,7-­9)

빛의 자녀답게 뜨거운 마음의 불을 지니고 살았던 두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제1독서에서 전쟁이 무용하다며 진실을 외치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대신들은 구덩이에 처넣어 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8ㄴ-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ㄴ)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분열이 좋은 것은 분명 아니지만 정의와 진실이 아닌 것으로부터는 갈라서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계층이 다르다고 갈라서고 싸우면 안 됩니다. 올바르고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는 모두가 내 형제이며,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나 아버지라도 진리가 아니요 의롭지 않으면 그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타협이 아니요, 진실을 은폐하여 그저 ‘좋은 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 3,16)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예레 6,13-­14)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33ㄱ) 선과 정의와 진리와 사랑이 승리할 때 이루어지는 평화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ㄱ)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21)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과 권력과 치부를 위해 불을 태웁니다. 모차르트·베토벤·반 고흐같이 예술에 불을 태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주독립을 위해,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을 유린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생태계 보호를 위해, 농민들의 생존과 자주경제를 위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긴급구호 현장을 찾아가 고통 받는 이들을 보듬어 안는 한비야씨는 “재미있는 세계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혼자 애쓴다고 세상이 변하나요?”라는 질문에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라이베리아를 떠나기 전 열다섯 살 모모가 “나는 그동안 미쳐 있었어요. 전쟁이 나를 미치게 했어요!”라고 한 것이 자꾸 목에 걸려 “나는 모모와 같이 미칠 뻔한 소년병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고 싶다. 그 기회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무거운 총 대신 무거운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 옆집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밤잠을 설치며 사랑의 열병을 앓는 것, 십대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이런 일상을 돌려주고 싶다.”(「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라고 했는데, 자! 그렇다면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 불은 무엇인지요?

예수님이 당겨주시는 불은 이른바 명예와 부와 권력의 습지 안에서는 잘 타오를 수 없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시편 42,2­3ㄱ)라고 말하는 가난한 영혼 안에서 잘 타오릅니다. 그리고 지펴진 불길은 하얀 재가 될 때까지, ‘나’가 없어질 때까지 활활 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방화범 예수님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탈대로 다 타시오.…`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느니다.”(가곡 ‘사랑’ 중에서)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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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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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불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타오르시는 불이신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가장 빛나는 불이십니다.

우리 또한 타오르는 불이 되길 바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사랑이 이제는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의 모순을 우리의 거짓을 불태워 우리 어둠을 이제는 밝히길 원하십니다.

타오르는 불이 길을 안내합니다. 타오르는 불이 신앙공동체를 환히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삶을 가득 기쁜 소식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시작도 마침도 불이십니다.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불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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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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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과 나태함을 떨치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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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복음 12장 49절, 51절)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 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

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리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즈카르야서 13장 8~9절)

우리 역시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쫒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분 일초라도 의미있게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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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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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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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는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언하신 참사랑은 갈등과 분열로 잃어버린 평화를 다시 찾는 원동력이 됩니다. 연중 제20주일의 복음 말씀은 힘들더라도 그리스도인이 평화를 이루는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들립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치드키야 임금 때(기원 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점령당하고, 지도자들은 유배지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시기에 산 증인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우러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바빌론군은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것(예레 37,5)을 본 대신들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착각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예레 37,9)을 선포합니다. 대신들은 그의 말이 군인과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재앙을 바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선동합니다.(예레 38,4) 유약한 임금은 그를 저수동굴에 가두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고 대립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에게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음에 충실한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과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우리의 수호자이니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촉구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 속에 ‘영원한 도성’(히브 13,14)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는 믿음의 영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십니다. 아람어 문화권에서 ‘세상’은 진흙으로 만든 ‘화덕’으로도 풀이됩니다. 화덕의 연료는 동글납작하게 만든 낙타분에 소금을 뿌려 말린 것입니다. 소금은 연료를 태우는 촉매제(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불쏘시개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맙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평화를 누리라는 가르침으로 새깁니다.(마태 5,13; 마르 9,50; 루카 10,34)

성경에서 ‘불’은 하느님의 현존이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힘을 나타냅니다.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그가 기도하자 주님의 불길이 번제물을 태웠습니다.(1열왕 18,38)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루카 3,16)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고 내면을 정화시켜 사랑의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사랑의 불이 타오르려면 주님께서 받아야할 세례가 있습니다. 세례는 순교의 은유적 표현(루카 12,50)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십자가로 세례의 원천(마르 10,38; 요한 19,34)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삶을 시작하는 거룩한 성사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대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아우성치던 군중 심리를 예견하신 것일까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주님(요한 14,27)의 말씀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세상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힘의 균형 상태나 심리적인 안정을 두고 말합니다. 군비경쟁이 지속되는 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권이 무시되고, 불의와 불신, 교만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shalom, irene)는 하느님의 본성, 강복, 안심, 안녕, 풍요, 번영, 조화, 화해, 기쁨, 완성 등 적어도 열 가지의 의미(사회교리 488-495)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주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내려지는 하느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닌가가 분열의 기준입니다. 믿음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요한 5,24) 믿음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자랄수록 성령의 불은 타오르기 마련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응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때 성령의 선물인 평화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신앙공동체의 참 가족이 됩니다.(마태 12,50; 마르 3,35; 루카 8,21)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말씀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인도주의에 이바지하는 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는 길입니다. 애덕의 실천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보장과 의료서비스 같은 문제에 우선적인 배려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알면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삶의 최고의 규범입니다. 참사랑은 진리 안에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완덕의 최고봉입니다. 성체성사와 생명의 말씀이 일치의 원동력이 되고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순례의 여정에서 이기와 위선과 교만을 태워버리고 주님과 함께 사랑의 불쏘시개가 될 때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의 평화는 믿음에서 오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평화’(요한 15,1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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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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