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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조회수 | 2,258
작성일 | 07.08.18
묵상길잡이: 그리스도교는 현실에 안주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을 하느님의 뜻 아래 변화시키는 종교이다.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뛰어드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이다.

1. 이벽 성조의 신앙적 고뇌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앙전래는 외국의 선교사가 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던 중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강학회(講學會,요즘의 세미나?)를 하는 등 학문을 연구하던 선비들 중에는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김원성 이벽 이승훈 등이 있다. 이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이들 중 ‘광암’ 이벽은 ‘죽하공’ 이부만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 가문에 서양 오랑캐들의 학문을 하는 이단아(異端兒)가 생겼다고 하여 아들 이벽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들을 누구를 만나거나 문밖출입 못하게 하였다. 아들 이벽이 방에서 단식하며 결심을 꺾지 않자, 이벽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벽은 할 수 없이 하느님께 대한 스스로의 믿음은 어쩔 수 없으나, 다른 사람에게 천주교를 선전하지는 않겠다고 아버지께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는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며 괴로워한 나머지 결국 건강을 잃고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상제(上帝)가 바로 천주님이라고 확신하였기에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으신 임금님을 모른다고 배신할 수 없었다.

2.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바꾸는 종교이다.

일찍이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쓴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충돌 이론’을 말한 바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의 이 혼란은 세상 종말의 징조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문명이 퇴조하고 새로운 문명의 물결이 들어옴으로 일어나는 과도기적인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교가 어떤 나라에 들어가면 항상 그 나라의 기존 문화와 충돌을 일으키며 갈등을 빚었고, 그것은 곧 박해로 나타났다. “짐(朕)이 국가다.”는 말이 있듯이, 황제나 왕이 절대권을 휘두르던 봉건체제 하에서 “황제나 왕도 하느님 앞에서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믿는 신자들은 임금을 우습게 보는 대역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기 집 하인을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하여 노비(奴婢)신분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일 등은 반상(班常)의 신분 차가 뚜렷하던 그 당시로서는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뿌리 채 뽑아버려야 한다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뛰어드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빛 아래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세상의 질서를 개편하는 종교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항상 박해를 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얼룩진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3.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흔히 ‘칼의 복음’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면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도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에 안주하였다면 결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도 참으로 세상에 속한, 세상에 안주(安住)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자들도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 낳고 직장생활하며 같은 아파트에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인양 모든 희망을 세상 것에 두고 산다면 그는 참된 의미의 옳은 신자는 아닌 것이다. 그는 세속 사람과 꼭 같아져버렸기에 세상에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이며,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일상의 생활 안에서 신앙인으로,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 내가 겪는 어려움과 희생이 없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안주하며,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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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어떤 부부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혼을 하고 새롭게 혼인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의 말입니다.

남편 : “저는 첫 번째 결혼이 전혀 불행하지 않았어요. 좋은 편에 속했죠. 오래 연애한 캠퍼스 커플이었고 10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러다 이 친구를 만나게 된 거고요. 그래서 우리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자주 물어요, ‘더 강적이 나타나면 또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고.(웃음) 제가 가끔 ‘내가 더 강적을 만나서 잠시 그 여자하고 연애를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공연을 같이 다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요. 하지만 이 친구는 걱정을 안 해요. 내 맘 중심에 자기가 있다는 걸 완전하게 느끼고 있어서죠.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제가 바람 같은 구석이 있지만, 이제는 굉장히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린 바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인 : “저는 000씨가 바람같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살면서 그랬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 또 제게 얘기하고요. 근데 저는 그게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왜냐면 나랑 000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는 천 개 정도의 조각을 계속 맞추어온 꽉 맞는 관계거든요. 그걸 맞춰가는 과정에서 면과 면사이의 끊임없는 접촉이 있었고요. 나 아닌 누구와 어떤 접촉을 하더라도 그건 서너 조각 정도의 일부분에 불과한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관계의 깊이, 양 이런 것들보다 더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다음은 이 두 사람을 인터뷰한 사람의 말입니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남과 다른 ‘부부’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독립된 개체인 두 사람 사이의 성숙한 관계’가 상위 개념이고, 부부는 그보다 아래에 있는 일종의 틀에 불과했습니다. 부부인데 다른 사람과 그래도 되느냐는 식의 고정관념을 벗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틀을 넘어선 그곳에 묘한 탄탄함이 있었습니다.”

부부이기 때문에 갈라서서는 안 된다는 형식적 틀이 아닌, 부부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성숙한 인격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라는 참의미를 사는 것, 주일미사 참례가 의무이기 때문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틀이 아닌,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신앙을 배우며 참삶의 길을 이해하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미사에 참례한 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질러, 평화라는 이름의 탈을 둘러쓴 비뚤어진 고정관념들을 깨고 전해주고자 하시는 참 평화입니다.

<마산교구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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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주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시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작별을 준비하며 ‘불’을 상기시켰다. 바알 프오르에서 바알 신에게 넘어갔던 사람들의 멸망을 말하며 준엄하게 경고한다. 호렙의 산에서 하느님과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하늘까지 치솟는 불이셨음을. 그 불은 우상을 거부한다. 모세는 불의 형상으로 오신 주님 외에 어떤 것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주님은 태워버리시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모세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있는 불은 하느님 외에 하느님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우상들과의 결별을 영원히 요구하는 표징이 된다(신명 4,1-31).

훗날 모세의 경고와는 달리 다시 하느님의 자리에 바알과 아세라가 올라섰다. 주님의 예언자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엘리야는 혼자 남았다. 모든 이스라엘이 재물을 의미하는 이 우상을 섬겼다. 엘리야는 홀로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들과 대결한다. 그는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하늘에서 불을 청한다. 그 옛날 모세가 말했듯이 그리고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를 들었던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태워버리는 불로 백성들 앞에 나타나신다. 이 불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다른 우상들과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이 결별은 다른 차원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1열왕 18,20-4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제단에 올려 진 제물이시다. 완전하고 흠 없는 제물이신 예수님의 봉헌으로 교회는 불을 받았다. 그 불은 갈라진 혀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불이시다. 그 불은 세상과 교회를 갈라서게 한다. 주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이것은 분열일지 모르나 다른 차원의 더욱 굳건한 결합이다. 이 불을 받은 베드로는 요엘 예언자의 선포를 인용하며 외친다(사도 2,1-36). “나는 위로 하늘에서는 이적들을 아래로 땅에서는 표징들을 일으키리니 곧 피와 불과 짙은 연기다…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요엘 3,1-5)

이 이야기들은 우리와 상관없는가? 우리는 미사 때마다 제물로 바쳐지신 주님의 몸과 피 위로 하느님의 불이 내려오길 청한다. 그 불은 모세가 보았고 엘리야가 청해 받았으며 오순절에 믿는 이들이 받은 그 불이다. 불은 다시 우리들에게 분열을 요구한다. 이 분열은 우상들과의 분열이다. 대신 우리는 하느님의 불이 내려앉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앞에 두고 서로에게 평화의 축복을 준다. 이 축복은 우리가 제대로 결별했을 때에만 가능한 다른 차원의 결합이다. 그 결합은 주님의 몸을 서로 나누게 하고 우리를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한다.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는 태워버리는 불로 우리와 당신을 결합시키신다.

그러나 그 불 속에 있을 때마다 반드시 모세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금하신 그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주 너희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신명 4,23-24) 만일 우리가 주님의 불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고 있다면 묵시록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사탄)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들을 속이던 악마는 불과 유황 못에 던져졌는데,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이미 들어가 있는 그곳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묵시 20,9-10)

▮ 마산교구 김유겸 베드로 신부 2016년 8월 14일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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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불과 칼을 주러 오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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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오늘 루카 12,49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고,12,51에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하셨다. 이 내용을 마태 10,34에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평화가 아니라 불을 지르고 칼을 휘두르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그 모습은 어울리지 않고, 이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태 5,9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늘 평화의 인사를 하셨다. 또 사도 바오로는 에페 2,14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했기 때문이다.

흔히 평화라고 하면 우리는 전쟁이나 분쟁 따위의 불안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참 평화는 이런 외적인 안정은 물론, 내적으로 정의가 구현되고 영생에 대한 확신이 보장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평화는 이러한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 14,27에서 당신께서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나 참 평화실현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의구현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반대자들의 저항에 부딪히고, 또 영생 추구의 삶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세속주의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뜻이 다른 가족들과 갈등을 겪으며 분열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성경에서 말하는 ‘불’과 ‘칼’은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상징이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이 불로 태우고 칼로 자르려고 하신 것은 참 평화실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었다. 우리도 정의구현과 영생에 걸림돌이 되는 무사안일과 나태, 불신풍조와 이기주의, 미신적인 허례허식 같은 유혹을 자주 받는다.

그러한 것을 태우느냐 마느냐, 잘라내느냐 내버려 두느냐의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평화실현을 위해 성령의 불과 칼로 태울 것은 태우고, 자를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도록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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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최봉원 야고보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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