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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주님이 주시는 평화
조회수 | 2,060
작성일 | 07.08.18
예비신자 교리반을 시작하게 되면 꼭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성당에 어떻게 나오시게 되셨어요?” 다양한 대답이 나오긴 하지만 제일 많이 듣는 답은 평화를 찾으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요한 14,27).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렸을 적 많이 싸웠습니다. 싸웠다기보다 제가 형이니까 동생을 많이 때리고 괴롭혔지요. 둘이 한참 싸우다가도 어머니께 혼나면 조용히 있었지요. 하지만 그 때의 조용함이 평화로움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아무 일도 없는 시간이지 동생과 제 사이가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평화의 개념은 이러한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의미가 아닌 단순히 아무 일도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평화의 참뜻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2,51)

예수님은 평화가 아닌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고, 분열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칼을 주러 왔다고(마태 10,34) 하십니다. 불은 화재가 아니라, 옛날 역병이 난 곳을 태워버리듯이 소독하는 것이고, 유품을 태우듯이 정리하는 것입니다. 분열은 혼란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고 머물게 하는 익숙함으로부터의 결별이고, 생명이 세포 분열에서 생겨나듯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칼은 무기가 아니라, 수술하는 메스이고, 도를 닦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바란다면 커다란 대수술을 해야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고, 꾸준히 수련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집니다. 그분이 탄생했을 때, 하늘의 군대는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고 노래를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분으로 오신 그분께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였습니다. 주님의 죽음 앞에 제자들이 느낀 두려움과 원망, 불안을 몰아내는 것은 바로 주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많은 것을 몰아내고 오직 주님께 의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사실 평화는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늘 무엇인가 채우려고,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고, 안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보면 그 채운 것들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덜어내어 주님께 맡기고, 불안이 있다면 주님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인정받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 하고 싶은 것들을 주님을 위해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있는 사람은 생각도 많고 더 불안합니다. 하지만 없는 사람은 단순합니다. 단순함은 곧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만이 바로 그 원리입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불을, 분열을, 칼을 받아들이십시오.

인천교구 최인비 유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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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마을에 철수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굉장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철수의 옆집에 영수라는 아이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영수 역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입니다.

두 아이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똑같이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경쟁을 했어요.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 대한 질투심으로 불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틀 동안 시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달리기 종목은 이 체육대회에서 최고로 인기가 있었지요. 더군다나 이 두 아이는 동네에서 가장 달리기를 잘 하는 것으로 이름 나 있었거든요.

철수는 영수가 이기면 자신이 창피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영수가 잘 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설치했습니다. 영수는 철수의 의도대로 함정에 걸려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어요.

결국 첫날 달리기는 철수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철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다음날에는 마을 대항전 이어달리기 경기가 벌어졌습니다. 우승 상품도 그냥 달리기에 비할 수 없이 크고 멋진 것이었지요. 경기방식은 2인 1조의 이어달리기였는데, 영수는 다리를 다쳐서 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철수는 잘 달리지 못하는 다른 아이와 같이 경기를 하게 되었고, 마을 대항전 이어달리기에서 어떠한 성적도 얻을 수가 없었지요.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1등을 하는 것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허위 학력 문제가 지금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지요. 사실 학벌이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과 능력이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으면 실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높게 평가되는 세상,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학력을 조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최고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등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옳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같이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만큼 올바른 길로 가겠다는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가지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일치를 가져오시는 분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벗어나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마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세상의 편과 주님의 편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서있나요?

증오와 불의가 가득한 세상의 편인가요? 아니면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주님의 편에 서있나요?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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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랑의 불을 놓으세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참 과격하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어이구, 어쩌시려고 이러시나?’ 싶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세상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타올랐다가도 쉽게 사그라지곤 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말씀에서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이 훨훨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잘 느껴집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우리는 밤에 전등불만 나가도 당황해서 허둥댑니다. 그런데 만일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비추던 하느님의 사랑의 불이 꺼진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사랑이 사라진 세상…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겠죠. 생각만 해도 이 더운 여름에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좀처럼 꺼질 줄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불을 끄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불을 끄는 어리석은 일은 없어야 합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불타는 사랑이 최고로 표현된 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었고,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가리켜 세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이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마치 세례처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통로가 될 것임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자기 죄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묻혔다가 새로이 태어나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새로이 태어난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사명을 띠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불을 놓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불을 놓아야 하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처럼 세상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려면 사랑의 불을 먼저 댕김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의 불을 다른 사람들에게 놓아 줘야만 합니다. 이 불 놓음은 결코 쉬운 길도 평탄한 길도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의 이 경고처럼 우리가 사랑의 불을 놓는데 거센 반대도 있고 가족 간의 분열도 있게 될 겁니다. 사랑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사시는 동안 반대 받는 표지였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사랑의 불을 놓고 또 놓고 계속해서 사랑의 불을 놓아야 합니다. 그 길 끝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천교구 안규태 베네딕토 신부>
  |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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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안녕과 재앙, 평화와 분열, 갈라짐과 맞섬,
“그분의 영광”은 무엇?

어느 순간부터 저는 미사의 ‘영성체 후 기도’ 내용을 볼 때마다 돌덩이와 같은 무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오늘 미사의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가 기도할 내용을 보니 또다시 무겁습니다.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모든 기도가 그렇듯이,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더군다나 성체를 모신 상태에서 드리는 공동체 기도이니만큼 그 진정성과 중요성은 어떠하겠습니까?

교회는 오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상태이길 소망합니다. “그분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제로 살아가는(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ㄱ)라고 알리면서 “그분의 영광”을 장엄히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14ㄴㄷ)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평화가 아니라 분열(갈라짐, 맞섬)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영광”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도 그 영광을 보고 싶어 한참을 머물러 봅니다. 분열의 상황은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그를 두둔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친지들, 특히 가족들에게서조차도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12,6; 20,10)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자신이 속한 시대적 사건에 하느님이 계시해 주신 의미를 찾아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언 정신은 왕의 정치적 활동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타의 모든 인간적 선택과 마찬가지로 왕의 정치활동도 양심과 하느님 말씀에 기초한 검토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새로운 성경신학사전 2』, ‘예레미야서’, 바오로 딸)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히 살아가는(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은 증오(20,1-2), 저주(20,10), 박해(26,11), 살해 위협(18,18), 도피 생활(36,26), 매국노(17,16)로 몰아붙이며 대응하였습니다.

오늘 독서 내용과 복음의 상황은 우리 사회와 무척 닮았습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의 삶은 우리 교회가 앞으로 감내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4대 강과 세월호의 국내 정세를 넘어서,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사드)’는 국제 정세로까지 연결되어 서로를 짓누릅니다. 이에 대해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려는 교회의 입장을 천명하였습니다.(7월 15일)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한다.’(예레 38,4)며, 그것을 ‘짓눌러’(루카 12,50) 버리기 위해 ‘적대 행위’(히브 12,3)를 하는 모습이 교회 밖에만이 아니라, 슬프지만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 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까? 갈라짐과 맞섬 속에서도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리는’(히브 12,1)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 정신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악한 짓’(예레 38,9)이라 부르짖는 양심의 고백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리에 용기를 내어 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예레 38,10). 이것이 “그분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를 견디게 하는 기쁨’(히브 12,2)이 아니겠습니까!

▮ 인천교구 신장세윤 모세 신부 - 2016년 8월 14일
  |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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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평화의 반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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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다. 평화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평화의 반대말을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없는 세상이 평화로운 삶을 유지시켜 준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어떤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무력 충돌 상황이다. 전쟁은 평화를 파괴하는 강력한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하지만 전쟁상황이 아닌 지금, 나(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반문해 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평화의 반대말을 ‘불안, 혼란, 초조, 갈등, 차별 등등’이라고도 정의하기도 한다. 이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평화의 반대 모습은 내적으로는 나 자신의 마음 상태(불안, 혼란, 초조)를, 외적으로는 타인과의 관계(갈등, 차별)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받으실 ‘세례’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세례’는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킨다(마르 10,38 참조).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라는 말씀의 의미는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의 내적 마음 상태를 깨뜨린다는 것일까?

이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평화는커녕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천명하신다. 그저 단순한 분열이 아니다. 가장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집안의 구성원들까지도 분열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라는 질문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집안과의 단절을 스스로 보여주시며 외적 관계까지도 깨뜨리시려는 것일까?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으로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내적, 외적 모습을 바라보면 분명하게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세례의 내적 짓눌림은 부활을 지향하고 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하신 첫 말씀이다. 당신 집안과의 관계 단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루카 8,21)하라는 더 커다란지상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

‘힘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그 ‘힘’이 평화로 둔갑하기도 한다. 마치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참된 예언을 재앙이라고 우기며 거짓된 ‘샬롬(안녕, 평화)’에 안주하려는 대신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작금의 시대에 필요한 모습은 참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알아보고 부당한 힘의 논리에 대항하여 예언자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이라는 인물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평화의 반대말은 분명하게 ‘분열’이다. 하지만 이 ‘분열’은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편 가르기’가 아니라 오히려 에벳멜렉이 보여준 ‘편 고르기(선택)’일 것이다. 이미 내 안에서 평화가 아니라 분열이 시작되었다. 세상의‘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것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며 산다면 내 마음속의 ‘편 가르기’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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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태일 안셀모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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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급하게 이송되었습니다. 골절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사고로 인해 심장과 뇌에 심한 손상이 온 것입니다. 병원의 의료진들은 가망이 없을 것 같다면서 이 아이의 어머니에게 준비하라는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면서 가망이 없다는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술 후, 어머니께서는 의료진을 비롯해서 사람들에게 아들의 완쾌를 의심하는 표현을 아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전혀 들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상관없이 아들의 귀에다 완쾌할 것이라는 확신의 말을 계속해서 들려주었습니다.

며칠 뒤, 아들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도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들은 몇 달 뒤에는 정상인처럼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불가능을 이겨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의식중이지만 어머니의 긍정적인 말이 작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의 힘은 대단합니다. 말은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과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정적인 말, 한계를 짓는 말, 힘이 빠지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희망을 보여주는 말과 생각이 아니라, 의욕을 꺾어버리는 말과 생각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사랑의 불이고, 정의의 불이었습니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지요. 또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서 장작은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그런 불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완전히 태우는, 하나도 남김없이 태우는 불의 삶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태우는 불이 되기 위해서는 큰 아픔이 동반될 수도 있습니다. 남들에게 오해를 사서 외면을 당할 수도 있고, 남들과 다른 모습에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피우기 위해 위선적인 삶을 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들처럼 부정적인 생각과 말로 희망의 주님 곁에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눈에서는 분열로 보이지만 참 진리의 길을 향하는 우리가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긍정적인 생각과 말, 남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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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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