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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더 큰 평화를 위해 작은 평화를 깨트려라.
조회수 | 2,182
작성일 | 07.08.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가정의 평화와 식구들의 일치인데 분열을 일으키고 집안 식구들이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한 신사가 말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먼 길을 가는 젊은 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자의 가련한 모습을 본 신사는 말에서 내려 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을 말에 태웠습니다. 여인은 혹독한 바람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겉옷을 벗어 아이에게 덮어 주었습니다. 그 겉옷 덕분에 아이는 잘 자고 있었지만 여인은 거의 얼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인이 곧 얼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신사는 여인에게 갑자기 말에서 내리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아기를 낚아채 말을 타고 달렸습니다. 여인은 갑작스런 일에 놀라 미친 듯이 뒤쫓아 가면서 아기를 돌려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신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에야 신사는 서서히 말을 세웠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뒤쫓아 온 여인에게 신사가 말했습니다. "이런 방법을 써서 미안하군요. 이제 더 이상 춥지 않죠?" 사랑하는 자식을 빼앗겼을 때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엄마의 마음에 있던 평화는 사라지고 심한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신사는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더 큰 평화를 위해 작은 평화를 깨트렸을 뿐입니다.

예화 하나를 더 들어볼까요? 남편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싸워서라도 그러한 불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분열을 일으키러' 왔으며 집안 식구끼리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앞장선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라는 제하의 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바꾸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른다.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고, 실망을 느낄 수도 있으며, 상실의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 앞장선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다.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 -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할아버지의 기도》중에서 - 아무리 외로워도 누군가 앞장서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씩 바뀔 수 있습니다. 좋은 방향, 아름다운 쪽으로... (07.8.16. 고도원의 아침 편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셨는데 그 불은 분명 변화의 불입니다. 작은 불이 서서히 타올라 큰 산을 태우듯이,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한 사람의 믿음이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를 받지만 마침내 반대하는 사람마저도 회개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가족들의 반대가 심한 가운데 홀로 입교하여 나중에는 가족 모두를 입교시킨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시련은 견디어 내면 보답이 주어집니다. 시련 속에서는 분열이 있었지만 결국은 은총을 위한 준비였던 셈입니다. 여러분도 비신자 식구들에게 분열을 일으켜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해봅시다. 더 큰 평화를 위하여...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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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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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분열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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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루카 12,49)

우리들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좋은 것들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상반된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평화와 일치, 화합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아닌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한가정 안에서도 서로 대립하고 반대하며 갈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일치의 하느님께서는 왜 이토록 한 가정을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어찌 보면 평화와 분열은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일치와 화합을 위한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거쳐 가야 할 통과의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립하고 서로 미워하고 상처 주며 고통의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 과정을 거쳐 이처럼 자유롭게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는 평화라는 말 속에 불안과 공포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거짓된 평화, 마치 평화로운 것처럼 위장된 평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 같은 편인 양, 같은 생각인 양, 같은 처지인 양 처신하는 평화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수박 겉핥기식의 관계처럼 깊이가 없고 진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평화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압과 처벌과 힘에 의한 평화는 오래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숨겨둔 분노는 터지기 마련이고, 꼭꼭 숨겨둔 의심과 무관심은 결국 평화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대립이 발생하게 되고, 의견의 상충이 발생하며, 그 간격을 줄여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일치를 위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이해를 생각하고, 나 자신 내 공동체만의 이익이 아닌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한걸음 물러설 수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될 것이며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습니다.

참 평화를 맞이하기 위해 서로가 진실해져야 합니다. 거짓된 평화 속에 자신의 생각을 숨겨두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참 평화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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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이성호 요셉 신부
  |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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