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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가보니 참 좋더라!
조회수 | 2,206
작성일 | 07.08.24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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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넓은 문을 지나는 것에는 아무런 불편함이나 수고가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고 좁은 문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하는 불편함과 수고가 따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야만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문이 이처럼 ‘작고 좁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있는 힘을 다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고 좁은 문. 분명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문에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어렵고 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큰 길은 크고 넓기 때문에 지나다니기에도 편할뿐더러 남들에게도 멋지고 화려하게 비춰집니다. 세상 누구도 여러분이 크고 넓은 길(문)을 선택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의 특권, 곧 자유의지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작고 좁은 길은 지나다니기에 불편하고 남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좁은 길을 선택했다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세상 누구도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우리에게 뭐라 하지는 않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건 저의 소견입니다만, 혹 아직 자신의 길을 정하지 못하셨다면 한 번 귀담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리고 그분을 알아가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에도, 그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좁은 문을 택하시고 결국 그 문을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문으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꼭 한 번 들어와 보라고, 끝까지 걸어보라고, 그러면 분명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선택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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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영훈(요한사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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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루가 13,23). 이 질문은 당시에 선민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유대인이나, 또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지금의 우리 모두가 구원을 위한 과제를 다시금 생각할 것을 권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입장이 보장되어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에 가르치신 내용이다.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도 이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기에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23절)라는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유다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늘나라를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Meir라고 하는 랍비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Shema(신명 6,4)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와 반대로 어떤 묵시문학계에서는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치 흐르는 물이 한 방울의 물보다 크듯이 구원받는 사람들보다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제4에스델 9,15).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서 직접적인 답은 회피하시고 구원에로의 결단을 촉구하시고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혀지게’ 될 시간은(24-25절)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위대한 선물인 하느님 나라를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버린 뒤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고 아무리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고 할 것이다”(24-25절).

만일 문밖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같은 민족이고,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세례를 받았고,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영했다는 것으로 하늘나라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26절). 선을 행한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 앞에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악을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들만이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에 속해있다는 특권으로가 아니라, 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았다거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에 따르는 의무와 사명을 잘 수행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다. 구원받을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인간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만 하느님만이 은총과 사랑을 통해 당신의 길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차지하고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분명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이제 교회는 이러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사명 즉 ‘선교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열려진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1977년 8월 3일, 바오로 6세 담화문).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먼저 항상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이 철저히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부 사람들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게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모든 이로 하여금 그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세례 때 받은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그에 맞는 삶을 살아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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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고 겸손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

‘구원’. 이는 죽음 이후 삶을 믿는 모든 이들의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는 각자의 방식대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고 또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확신하는 우리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구원되기 위한 단서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진짜 좁은 문’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부제 때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 방문했던 ‘예수 탄생 성당’의 한 입구였습니다. 그 입구는 높이 약 140 cm, 폭 100 cm의 작은 문인데, 십자군 시대에 말이나 마차로 회교도들이 성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 역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질 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나를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은 곧 구원에 이르는 문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기에 합당하게 살았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희생·극기·봉사해서 구원의 조건을 채웠기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주님 앞에서 작은 사람이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 한 가지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저는 늘 주님과 함께 있었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살았습니다”라고 그 문 앞에서 아무리 외쳐대도,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한 삶이 아니었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다면, 위선과 교만으로 굳어진 우리 영혼은 구원의 문 밖에서 울며 이를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편적 구원 의지로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 잔칫상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가 그저 기뻐할 수만 없는 것은, 잔치에 초대받기는 하였지만 잔치에 들어가는 문이 좁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데 있어서 나는 얼마나 내 자신을 낮추고 비웠는지 돌아보면서, 겸손한 몸과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뜻에 맞갖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이윤섭(요한사도)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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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은 불안함을 갖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불안함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 이후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한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금도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올바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많은 것을 잘 지키니 내가 죽은 후에 하느님이 나를 모른 체 하시지는 않으시겠지?’ ‘비록 내가 약간의 죄를 지었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행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복음을 보면 바로 이런 의문과 불안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한 마음에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한편으로 제자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에 자신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나 자부심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자부심을 가차 없이 깨뜨리십니다. 구원의 문은 좁으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사정해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우월감에 빠져, 율법서에 적힌 대로만 행동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아 항상 불안에 떨며 생활하였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였고,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어딘가 불안했던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답을 받고자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해 약속을 하시지 않고,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낮추고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입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총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거듭 잘못해도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러한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작아지는 것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약한 모습을 수없이 많이 체험합니다. 비참한 일이나 억울한 일로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일을 불평과 분노 없이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작아지는 생활의 출발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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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환 루카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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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좁은 문은 힘들면서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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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2019)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 정규군에 맞서 처음으로 승리한 감동적인 역사를 그렸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더 잘살게 해 주겠다고 이 집에 들어왔는데 왜들 난리냐고. 그러나 독립군들은 말합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아내 자식 재산 다 차지하고 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니 그것에 무슨 말이냐고. 그래서 그 침입자를 몰아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이때 일본 군인들은 마치 여우를 사냥하는 것처럼 교만해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은 그들의 교만함을 이용해 계속 화를 북돋아 도망칠 곳이 없는 분지 안까지 끌어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큰 희생도 치러야했습니다. 숫자가 부족한 까닭에 몇몇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일부러 포로가 되어 무수한 고문을 받으며 잘못된 정보를 흘려야 했고, 혼자서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총알받이가 되기도 해야 했습니다.

이들 덕분으로 정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쟁경험과 군사훈련으로 무장되고 최고급 무기를 가진 이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자신들이 미끼가 되어 그들의 열을 바싹 오르게 했던 희생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생 뒤에는 승리의 기쁨이 서려있었습니다. 그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했고 300여명이 부상을 입어 총 4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독립군 피해는 사상자가 총 1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지는 십자가를 통해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던 그들은 십자가를 지는 동안에도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도 실제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을 넘어서서, 또한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동시에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 ‘좁은 문’의 의미를 모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미사에 나오고 봉사와 선교도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좁은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걸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얼굴 찡그리며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좁은 문은 그 자체로 그 뒤에 에덴동산의 약속이 있기에 그 문으로 가면서도 기쁩니다. 힘들지만 기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기에 힘들기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러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곧 좁은 문입니다. 그러니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길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는 기쁨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도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상급이기에 노력 없는 상급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아직 상은 받지 않았지만 상을 받기로 약속이 된 사람처럼 이미 부활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으로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에 카인은 기분이 나빴고 아벨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기분이 나쁜 카인은 아벨을 살해하였지만 아벨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벨은 항상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넓고 편한 길로 가려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기분이 나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을 기대하기보다는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의 행실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벨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아주시니 당연히 ‘언제 상을 주실까?’라는 기대에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한 컵의 선행에도 반드시 상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면 반드시 기분이 좋아야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은 운동할 때 힘들고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더 큰 기대와 행복이 그를 계속 뛰게 만듭니다. 더 건강해지고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일면으로 고통스러운 마음도 있으셨지만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며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받을 상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은 주님께서 어떤 상급을 주실 것인가?’란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힘든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의 법칙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나를 기분 좋게 만드시려고 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고 잘 했으면 칭찬해주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자아는 상 대신 벌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엇을 사랑할 때 기분 좋아졌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랑보다 강한 에너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보다 행복한 감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주님께 상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겨울 풍경화를 마친 화가가 몇 걸음 물러나 자기의 작품을 감상하였습니다.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휘어진 듯 유연히 드리워졌고, 오막살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우아하게 내려져 있었으며, 또한 땅 위에는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신선한 눈송이가 조화 있게 화면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리지 않고 몇 개월 동안 화랑에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 화가의 특징은 겨울 풍경화이었는데도, 아무도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다른 화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붓 가지고 계세요?”

그는 대답 대신 붓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붓을 받아들고는 몇 가지 색을 혼합하더니 듬뿍 찍어서 오막살이 창문에 붉은 빛을 덧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색을 찍어 오막살이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그림은 그 날로 팔려버렸습니다.

우리도 이 풍경화와 같습니다. 내가 차갑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아 더욱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따듯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면 나도 사랑받습니다.

사랑하십시오. 물론 사랑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됩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고 있다면 반드시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상을 주실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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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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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구원을 위한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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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구원에 대한 질문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나 어려운 문제임은 틀림없다. 오늘 복음은 당시의 신자들과 우리 모두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라고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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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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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을 보면 9,51~19,28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동안의 말씀과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고, 이제는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 수 있는 분의 절박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라는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유다인들은 유다인이라는 사실마 가지고도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랍비 메이르(Meir)는 이스라엘에 살고, 거룩한 언어를 말하며, 신앙고백문인 셰마(Shema) 기도를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아주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의도적으로 멀리 하신다. 즉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도 하시지 않고, 많다고도 하시지 않는다. 다만 구원에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면서 상징적 개념으로서 절박함을 말씀하신다.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고 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인이 문을 닫아버려 문밖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집주인이 갑자기 문을 닫아걸기로 결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고 또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환상에 빠져 선행에 힘쓰지 않ㄷ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선을 행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모르겠다고 선언하시는 그 “불의를 일삼는 자들”(27절; 시편 6,8 참조)과 정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만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오늘 복음 전체를 보면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특권, 즉 율법, 할례, 선민사상을 자랑하며 뽐내던 그 ‘보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여기서 루카는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았다거나, 영성체를 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어떤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 따르는 의무와 자기 고유의 사명을 수행하여 완수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주 적어 보이지만, 그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하늘 나라는 특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늘 나라를 위한 우리의 결단과 선행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은총을 통해 인도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사람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차지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30절)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특권이 아니라, 선행을 통해 들어간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봉사하는 교회와 같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만이 분명 이사야가, 바벨탑으로 상징되어 왔던 그 분열의 모습과 대립되는 종말의 시대에 이루어질 구세주의 보편성과 형제적 사랑을 그리며 보여주었던(창세 10장; 이사 66,19 참조) 새로운 사랑의 ‘바벨탑’을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사명감으로 항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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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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